고속터미널 근처는 생각보다 복잡했다. 아리가 정우를 찾았을 때 그들은 둘 다 반쯤 얼어붙어 있었다. 추워서 들어간, 터미널 안쪽 깊은 곳의 프랜차이즈 햄버거집에서 아리는 겨울 내내 망설이던 말을 꺼냈다.
“우리 아르바이트비는 언제 받아? 소원, 진짜 들어주는 거 맞아?” “그치. 그거 받아야 되는데”
정우는 햄버거 포장을 뜯다 내려놓고, 앞머리를 흔들어 털어냈다. 테이블은 한 번 쓰고 말 플라스틱과 한 번 쓰고 말 종이로 가득했고, 포장지마다 프랜차이즈 세계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아르바이트면 받는 게 있어야 되잖아. 근데 네가 3년아니 4년 동안 받은 게 뭐야?” “그게 아직이긴 한데야. 이거 같이 먹자. 내가 살게.” “너 지난 겨울에 편의점 알바한 것도 결국 못 받았잖아. 그 사람도 상황 좋아지면 주겠다고 하고 결국 너 차단하고얼마 전에 학교 게시판에서도 봤어. ★★ 알바가 다 사기라는 얘기. 부탁 들어주면 소원 들어준다고 하고서, 정작 소원 들어줄 때가 되면 뭐도 저도 다 안 된다고 하고, 뭣 하나 제대로 이뤄주는 법이 없다고. 우리도 이거 사기 아닌지 확인해 봐야 되는 거 아냐?”
그러니까, 아리는 일주일에 두 번, 아니 많으면 세 번이나 네 번씩 전화를 받고 나와 추운 밤거리를 헤매며 정우를 찾는 일이 지겨워졌다거나, 다음부터 못 나오겠다는 얘기를 하려던 건 아니었다. 정말로 아니었다. 정우는 매번 데리러 나와주면 아르바이트비를 나눠주겠다고 했지만, 아리는 특별히 빌고 싶은 소원은 없었다. 추운 밤 어딘가로 가려고 옷을 챙겨입는 기분이 좋았다. 달리 시간 쓸 데도 없었다. 긴 겨울 동안 집에만 있는다고 좋은 일이 생기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다만 아리는 갈 곳이 있었으면, 생각한 적은 종종 있었다. 그저 나오고 싶어서 집을 나와도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우가 지나가는 사람의 휴대폰을 빌려서 거는 전화는 건대입구역이나 석촌호수 같은 곳에서 올 때도 있었지만 주로 올림픽 공원 근방에서 왔다. 공원을 가로질러 같이 역으로 향하는, 유난히 빛이 많은 길을 그녀는 좋아했다.
하지만 고속터미널 햄버거집 구석에서 아리는 속을 차갑게 하는 어떤 감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이유로 밤거리를 누비고 다닐 시간이 모두에게 한정된 만큼만 주어졌다면, 그녀는 주어진 시간을 다 써 가는 것 같았다. 아리는 졸업 전시를 앞뒀고, 일주일의 반 이상을 밤은 꼬박 ★★의 일에 쓰고, 낮에 잠을 보충하는 식으로 계속 살 수는 없었다. 그녀 자신만이 아니었다. 시간이 무한히 있는 것도 아닌데 정우도 ★★를 위해 이 이상의 시간을 쓸 수는 없었다. 이미 쓴 시간만 해도 너무 많았다. 그러나 아리의 두려움은 깊은 만큼이나 복잡한 감정이었고 애초에 잘 전달되지 않는 종류의 감정이었다.
“야. 진짜 사기는 아니야요즘 사람들이 진짜 몸을 안 빌려준대. 그 와중에 세상을 구해야 된다는 거야. 그거 때문에 그래. 시간이 얼마 없대. 자세히는 말하면 안 되는데”
다음 여름까지 버티지 못하고 닫게 되는, 생각보다 프렌치프라이가 맛있던 햄버거집 구석에서 정우는 뭔가를 설명하려 애썼다. 그는 아리를 이해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기도, 아리의 두려움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것 같기도 했다. “위험하다더니 별거 아닌데? 오히려 기분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처음 몽촌토성 구석의 벤치에서 둘이 만난 날도 정우는 말했었다.
조금 마음이 들뜰 정도로 추운 날이었다. 몸을 돌려받자마자 공중전화를 찾았고 기다리느라 얼어 죽을 뻔했다는 정우는 자기 사이즈보다 너무 큰 패딩을 입고 있었다. 아리는 엄마 몰래 급히 나온 터라 체육복에 코트 차림이었다. “너무 자주 몸을 빌려주면 아주 뺏길 수도 있다던데 조심해.”라는 아리의 말에 정우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일 년만 할 건데 뭘. 수능 때까지만. 근데 진짜 한 일주일 잔 것 같음. 엄청 배고파. 뭐 좀 먹고 가면 안 돼?” 정우는 진심으로 몸 탈취의 위험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단순히 잠에서 덜 깬 것 같기도 했다.
그들이 처음 계획한 것보다 긴 시간을 같이 보냈던 건 결과적으로 정우가 아르바이트를 제때 그만두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온갖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점에서 야식을 함께 했고, 24시간 카페에서 띄엄띄엄 세상 만사를 얘기했다(춥고 다정하고 밝은 겨울밤이란, 말이 많아지는 시간은 아니었다). 기분이 나면 핫팩도 장갑도 잊어버리고 한밤의 서울을 산책하기도 했다.
“세상” 정우는 아리의 되물음에 뭔가 대답하려다 말고, “근데 진짜 너무 안 춥다.”라고 순간적으로 두려운 듯 말했다. “엄청 추운데.” 아리는 아직도 녹지 않은 손을 비비며 말했다. 올림픽 공원에서의 더 오래된 겨울들은 더 아리도록 생생히 추웠지만 그건 기억의 장난 탓 아닌가, 생각한 아리는 정우의 두려움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리는 세상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우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탓이기도 했지만, 그녀 스스로 세상처럼 거창한 존재를 좋아하고 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세상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특별히 슬플 것 같지는 않았다. 아리가 깜빡한 부분이 있다면 12월 밤의 무수한 빛이나 터미널 건물의 환함이 세상의 일부라는, 어쩌면 그런 것들이 곧 세상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이후로도 정우는 몇 번 더 아리를 불러냈지만, 전처럼 자주는 아니었다. 정확히 어떤 전화가 마지막 연락이고 어떤 외출이 마지막 만남이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았다. 새벽 다섯 시 반에 전화를 받고 나가서 동서울터미널 근처 한강 진입로에서 정우를 찾았던, 그가 오랜만에 기분 좋아 보인 날이었는지, 동서울터미널의 그날 이후에도 한두 번쯤 연락이 왔었는지 아리는 기억하지 못했다. 어떤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타이밍을, 우리는 눈앞에서는 결코 알지 못하고, 뒤늦게 떠올리려 해도 기억의 불완전함만 절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이 마지막을 포착하지 못하는 것은, 마지막이란 흔히 생각하는 만큼 중요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잊지 못하는 중간 부분, 그러니까 늦은 밤 올림픽 공원의 고요와 겨울 하늘과 멀리 보였던 아파트의 빛 따위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변화는 모르려 해도 모를 수 없는 형태로, 어떤 둔한 사람이라도 어느 순간에는 깨달을 수밖에 없는 형태로 찾아왔다. 미세먼지와 역대급 더위로 얼룩진 어느 봄과 여름 사이에서 아리는 정우의 두려움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 무렵 정우의 전화번호는 결번이었고, 페이스북 페이지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삭제되었다. 언젠가부터 모르는 번호로 오는 전화는 전부 대출이나 휴대폰 기기변경 권유였다. 아리는 어쩌다 한 번은 ★★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어릴 때는 ★★가 많았던 버스 정거장에도, 2호선 지상 구간 승강장에도 돌아다니는 것은 사람들뿐이었다. 정말로 더는 아무도 ★★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고 그들에게 몸을 빌려주지 않는지도 몰랐다.
누군가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을 구하러 돌아다니고 있기를 아리는 바랐다. 그리고 정우가 그런 존재 중 하나이기를 진심으로 진심으로 바랐지만, 그렇든 그렇지 않든 그녀가 정우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다시 만났다. 그것은 아주 추운 날의 일로, 아리는 이불 속까지 스미는 찬 기운에 눈을 떴다. 그녀가 대학 졸업 이래 쭉 사귄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그만큼 오래 다닌 회사를 그만둔 2월이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아리는 반쯤 깬 상태로 생각했다. 겨울이 예전처럼 깊지 않게 된 지도 오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상으로 만들 수 있는 추위가 아니었다. 맨발에 닿은 바닥은 흠칫할 정도로 찼고, 창문을 열자 남은 잠이 단번에 달아났다. 바깥은 그해 1월에도 맛보지 못한 깊은 겨울이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맑았다. 미세먼지는 온데간데없었다. 일기 예보에 이 정도 추위가 있었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아리는 시간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80퍼센트는 충전시키고 잤다고 생각했던 휴대폰이 완전히 방전되어 있었다. 찾을 수 있는 가장 두꺼운 스웨터를 걸치고 내려왔을 때 아파트 단지는 건물도 차들도 나무도 모든 것이 잠든 채였다. 한번 안에 들어가면 몇 달은 머물 수 있을 듯한, 거대하고 깊은 동굴 같은 추위였다. 어째서 다시 침대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집 밖으로 나왔는지 누가 설명하라고 했다면, 아리 자신도 못했을 터였다. 하지만 아리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주차장을 가로질러 오래된 나무들이 기다리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무 사이에는 벤치가 숨겨져 있었고, 벤치 옆에는 사람 형상이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는 고양이를 본 것 같았지만 아리가 다가갔을 때는 고양이는 소리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사람처럼 보이던 것은 고개를 들었다. 세상은 어두운 푸른색에 잠겼고, 아직 꺼지지 않은 가로등만 새벽빛을 뿜고 있었다.
“조금 늦었지만, 아르바이트값을 지불하러 왔어.” 새카만 동공의 존재는 말했다. 그는 정우의 얼굴이었지만 정우가 아니었다. 정우의 몸을 차지한 ★★는 눈을 덮는 앞머리 정도로는 방해받지 않는다는 듯 흔들리지도 깜빡대지도 않는 눈으로 아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르바이트를 한 건제가 아닌데요.” 아리는 자신이 ★★들에게 얼마나 오래 화가 나 있었는지 깨달았다. ★★들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인지, 그들이 세상을 구하지 못해서인지, 그 과정에서 그들이 가져가 버린 것들 때문인지는 몰랐다.
“같이 했잖아.” ★★는 말했다. 여전히 눈은 깜빡이지 않는 채였지만 묘하게 변명하는 투였다.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줄 수 있어. 정우에게는 아무 것도 들어주지 못해서 그래조건은 딱 하나야. 간절히 원하는 건 안 돼. 우리가 안 들어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 세상이 그렇게 돼 있어서 그래. 누구의 소원이든 정말로 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돼 있거든.”
“정우는이제 없는 거죠?”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건 뭘까? 감각하고 행동하고 선택할 수 있는 걸 존재라고 부른다면 그 애는 이제 없어. 하지만 움직이지도 느끼지도 않고 잠든 것 또한 존재의 한 형태라고 본다면아직 이 안에 있고, 이 몸이 다할 때까지 있을 거야. 아주 나쁜 존재 형태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더 변명하지 않을게. 이렇게 만들 생각은 없었어. 우리 실수야.”
“그러면 정우가 잠깐이라도 깨어나게 해주세요.” 그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는 그녀의 마음 어떤 부분을 헤아리려는 것처럼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건 간절한 소원이잖아.” “그러면 날씨가 변하는 걸 막아줘요. 몇 년 만이라도.” 아리는 자신이 말하면서도 날씨 소원은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서,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 주러 온 것이었다.
“그것도 네가 너무 바라고 있어. 그리고” ★★는 망설이다가 진실을 고백하듯 말했다. “그건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너희 과학자가아니면 누구든지 어떻게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내는 수밖에 없어. 정말로.” 그때 아리는 문득 좋은 소원이 하나 떠올랐다. 그 소원은
“직접 만날 수 없다면 잠깐 전화하는 건 안 돼요? 정우한테요. 실종되기 전의.”
⇒ 【1】로 간다.
“모든 걸 지킬 수 없다면 조금씩이라도 지켜 주면 안 돼요? 그러니까, 매년 하루나 이틀만이라도 원래 날씨로 있게 해 주세요.”
⇒ 【2】로 간다.
“소원, 꼭 당장 대답해야 돼요? 진짜 생각이 안 나는데 시간을 좀 두고 생각해 보면 안 돼요?”
⇒ 【3】으로 간다.
【1】
“직접 만날 수 없다면 잠깐 전화하는 건 안 돼요? 정우한테요. 실종되기 전의.” “딱 한 번. 오늘이 지나기 전, 네 휴대폰으로 걸어야 돼.” ★★는 아리를 가까이 불러서 귓속말로 13자리 번호를 알려 주었다. 아리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계단을 뛰어 올라가서 보조배터리를 찾아 방을 뒤졌다. 엄마가 깨서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아리는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비상계단에 도착해서야 숨을 몰아쉬었다. 옛날식 아파트에만 있는, 아주 오래되고 삼면이 밖으로 열린 비상계단이었다. 그녀는 색이 벗겨진 콘크리트 벽의 고요 속에서 휴대폰이 충전되기만 기다렸다.
★★가 알려 준 번호는 공중전화로 연결되었다. 해도 뜨지 않았지만 벌써 경적 소리와 바퀴 소리로 가득한 동서울터미널 앞의 공중전화였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었지만 알 수 있었다. 길 건너서 한강 내려가 있을게, 정우가 과거의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고 막 전화를 끊은 시점인 것 같았다. 과거 속 그날 아리가 정우를 찾았을 때, 그는 잠실 철교를 지나 한강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물결에 빛이 맺히는 걸 보고 있었다. 피곤하지만 평화로워 보였었다.
그들은 30분 동안 통화하면서, 간절한 소원이라고는 이뤄지지 않는 이 세상에서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을 했다. 하나의 가능성을 함께, 너무 슬프지 않게 닫는 일이었다. 그들은 처음 수상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을 때의 일부터 쭉 이야기하고, 아리는 정우가 결국 실패하고 서울이 아주 더운 곳이 된다는 것도 말했다.
“근데 그럴 것 같았어. 더 나은 결말이 있었을까. 잘 모르겠어.” 정우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과거의 아리와의 약속 때문에 슬슬 가봐야 한다고 말했다. “야. 최아리. 진짜 매번 나와줘서” “재밌어서 간 거야. 매번, 정말로.” 아리는 말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 앞으로는 그렇게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
“근데 또 생각보다 괜찮을 수도 있어. 아직 몰라서 무서운 걸 수도 있음. 막 좋을 거란 건 아닌데, 지금 생각하는 것만큼 나쁘지는 않을 수도” 정우는 또 별일을 별일이 아닌 듯 말하고, 택시 클랙슨 소리와 강변북로로 들어서는 버스 엔진 소리, 그리고 아직 미세먼지보다는 안개가 많던 아침 공기의 반짝임 속으로 사라졌다.
안녕. 이상한 추위가 걷히고 구름이 떠나기 시작한, 조용한 비상계단에서 아리는 생각했다. 진짜 안녕이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심지어 날씨 같은 것도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다면, 나쁘지 않은 엔딩이었다.
【2】
“모든 걸 지킬 수 없다면 조금씩이라도 지켜 주면 안 돼요? 그러니까, 매년 하루나 이틀만이라도 원래 날씨로 있게 해 주세요.” ★★는 반색했다. “그건 할 수 있지. 언제가 좋은데?” 아리는 고를 수 있다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에, 2월과 4월 중에 망설였다. 서울에서 날씨가 제일 좋았던 건 아무래도 4월 같았다. 밤에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오래된 아파트 단지에 목련과 벚꽃 꽃잎이 섞여 떨어지는 4월만큼 예쁜 때가 있을까.
여행을 많이 다녔던 아리의 친구 성희는 도시마다 가장 아름다운 시기가 다르다고 했었다. 도시 전체가 딱 특정 날씨를 위해 만들어진 듯한 시기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뉴욕은 크리스마스 무렵이지만 도쿄는 이른 봄이며, 서울은 10월 말에서 11월 사이, 마지막 따뜻함이 남은 늦가을이라고 성희는 말했다. 같은 술자리에 있던 성희의 남자친구 재욱은 동의하지 않았다. 일본은 안 가서 모르겠지만 서울도 봄이 제일 예뻐요. 재욱은 그날따라 물러서지 않고, 나뭇가지에 잎은 없고 하얀 꽃만 맺힌, 말 없는 3월이야말로 서울 봄의 원형이라고 주장했다. 아리도 서울은 역시 봄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차가운 3월보다는 말랑말랑한 4월의 날씨가 좋았다.
2월은 좋은 날씨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지만, 아리는 이상할 정도로 2월이 그리웠다. 정우와 서울을 헤매고 다닐 때 가장 춥던 것도, 반짝였던 것도 2월이어서일까. 마지막 눈이 내리고, 볕을 따라 걸으면 정말로 춥지는 않고, 곧 두 번 다시 들르지 않게 될 교실에 서 있던 2월그녀는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2월이 좋아요. 2월 중에서는 마지막 주가 좋고, 토요일과 일요일 중에서는” 아리는 쉽게 고르지 못하고 망설였다. “꼭 날짜를 고르지 않고, 일주일 전체라고 해도 돼.” ★★는 슬쩍 힌트를 주었다. 그렇게 해서 2월 마지막 주는 다른 모든 것이 변해가는 와중에도 오래된 서울 날씨 그대로 남게 되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을 눈치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2월의 좋음을 아는 사람이 원래 많지 않은 탓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리처럼 남몰래 2월을 좋아했던 사람에게 아리와 ★★가 만든 일주일은 살아갈 힘이 되었다. 기억 속의 2월이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매년 돌아오는 2월만큼 아름답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3】
“소원, 꼭 당장 대답해야 돼요? 진짜 생각이 안 나는데 시간을 좀 두고 생각해 보면 안 돼요?” ★★는 의외로 순순히 납득했다. “열흘 후에 괜찮아? 일곱 시 넘으면 바람이 불고 온도가 많이 내려갈 거야. 그때 올게.”
★★와 약속이 있는 날은 낮부터 무슨 일이 날 것처럼 바람이 불었지만, 온도는 생각만큼 내려가지 않았다. 바람이 공기를 깨끗하게 해 주지도 않았다. 가지고 나온 두꺼운 목도리는 짐이 되었다. 아리는 ★★와 만나기로 한 잠실 어느 몰의 카페에서 기다렸지만 ★★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대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날이 좀 추워야 ★★가 사람 모습을 뒤집어쓰고 돌아다닐 수 있다는 사실을 아리는 배웠다. 그러고 보면 정우가 그녀를 불러낸 때도 주로 겨울이었고, 봄이나 가을 중에서도 유난히 추운 날이었다.
올림픽 공원에서의 만남은 실제 일어난 일이었을까? 배터리가 다 되어가는 휴대폰을 들고 정우를 찾으러 다닐 때 아리가 본 올림픽 공원은 그녀 생에 가장 아름다운 장소였다. 밤은 손에 감각이 없어질 만큼 추웠지만 추운 밤이어도 빛으로 가득했고, 그 밤 덕분에 아리는 올림픽 공원을 영원히 좋아하게 된다. 물론 몽촌토성 둔덕들과 그 너머로 보이는 빛 같은 것들을 영원히 사랑하게 된 것이 그녀에게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떤 것을 너무 좋아하게 되면 우리는 그 빛을 잊을 수 없게 되고, 잊을 수 없는 빛은 하나하나 그리움으로 남게 되며, 어쨌든 최종적으로 마음을 조금 아프게 만들기 때문이다.
“혹시 내일모레 새벽은 괜찮아?” ★★는 정말로 미안한 것 같은 목소리였다. “괜찮아요. 아직 소원을 생각 다 못 했으니까.” 아리는 이틀 후 삼성역 근처 24시간 카페로 나가는 길에도 결정짓지 못한 채였다. 돈을 소원으로 빌 수는 없다고 했으므로, 좋은 곳에 취직되게 해 달라고 비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장 무난한 답이었지만 그렇다고 단 하나뿐인 소원으로 취직을 말하기는 싫었다.
그 외에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소원은 간절하거나, 진짜로 간절하지는 않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마음을 다해 절실히 원하는 것과 진심으로 원하지는 않는 것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뭐가 있기는 한지, 생각할수록 알 수 없었다. “이거,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해요? 보통.” “보통이면타인을 위한 소원이 많지. 정우도 결국 너한테 소원을 준 거잖아.” ★★는 정우라면 절대 입지 않았을 것 같은 화려한 색의 옷을 입고, 선글라스에 귀찌까지 하고, 한겨울에 휘핑크림을 올린 아이스 카라멜 마키아또를 마시며 말했다.
아리는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곰곰이 생각했다. 부모님을 그녀 나름대로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들을 위해 하나뿐인 소원을 쓰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얼마 전에 헤어진 남자친구를 생각해도 마찬가지였다. 아리는 그를 가장 좋아했을 때에도 그를 위해 뭔가를 빌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과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는 것 같았다.
이미 지하철 막차를 타기에는 늦은 시간이었고, 아리는 시간보다는 돈을 아껴야 하는 취준생이었으므로 그들은 시간을 두고 같이 생각했다. 말도 놓기로 했다. ★★는 제안했다. “시간 여행 같은 건 어때? 기억을 가지고 갈 수는 없는데, 그래도 괜찮다는 사람 꽤 있는데. 아니면 캐나다 같은 데로 이민은? 북쪽은 기후가 변하면 오히려 살 만해지는 데도 있을 거고, 잘 찾아보면 옛날 서울하고 느낌이 비슷해지는 곳도 있을 거야.” ★★의 제안은 둘 다 좋은 생각 같았지만 아리는 묘하게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이상한 말인데, 나는 그런 곳에 가도 엄청나게 행복해지지는 않을 것 같아. 시간 여행은 언제로 가는 건데?” “아주 옛날이나 모르는 시대로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의외로 별로 없어. 보통은 좋았던 때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몇 년 전이나 어릴 적으로좋았던 시간을 한 번 더 사는 거야. 너는 관심 없어?” “몇 년 전이나 어릴 적으로 돌아가도 결국은 지금으로 다시 돌아오는 거잖아.”
아리는 좋았던 것들을 잃는 부분까지 되풀이하는 과거 여행은 하고 싶지 않았다. 더워지기만 할 지구의 미래도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아리는 결국 그날도 소원을 정하지 못하고, 열흘 뒤 봄비 오는 밤에 다시 ★★를 만나 얘기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분홍색과 주황색 불빛으로 물든 석촌호수를 우산을 쓰고 산책하면서, 아리는 정우와 ★★가 정말로 하려 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들었다. “인간 세상 쪽 높은 사람이랑 말해보려고 했어. 높은 사람이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지.” ★★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은 절실하지 않은 소원 같은 건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니까. 말이 통하지 않았어.”
아리는 한 번도 정우와 정우의 몸을 빌린 ★★를 헷갈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얘기를 마친 다음에도 바로 집으로 향하지 않고 호수를 두 바퀴 더 돌면서, 아리는 마치 어른이 된 정우와 함께 걷는 것 같았다. 그는 이상하게 너그럽고 때때로 생각 없던 그녀의 옛 친구 정우와는 아주 달랐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어른이 되면서 조금씩은 모르는 존재에게 몸을 빌려주고 조금씩은 내적으로 잠드는지도 모른다.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가 그날 정우의 오래된 후드를 입고 나왔기 때문인지, 보라색 하늘이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것들을 생각하게 했기 때문인지, 비가 내리면 잠들었던 것들이 정말로 약간 깨어나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는 평소보다 말이 느렸고, 자주 눈을 깜빡였고, 우주는 중층된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가능성 중 대부분은 감각할 수도 선택할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그 밤 이후로는 좀처럼 ★★들이 좋아하는 날씨가 오지 않고 봄은 순식간에 여름이 되어, 아리가 ★★를 다시 만난 것은 역대급 더위를 견디고도 지난한 기다림을 지나서였다. 그렇지만 자꾸 전화하고 약속을 다시 잡는 사이에 정우의 모습을 한 ★★과 아리는 말하자면, 친해졌다. 그들은 겨울이면 꽤 자주 만나서 소원에 대해서는 잠깐만 얘기하고, 시시콜콜한 잡담을 하고 날씨에 대해 불평하며 늦게까지 운영하는 예쁜 카페를 찾아다녔다. 서울에는 예쁜 카페가 많았고 그건 날씨가 어떻게 되든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으며, ★★는 예쁜 카페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예쁜 카페도 정우와의 밤 나들이를 대체할 수는 없었으므로 아리는 원래 카페 같은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점차 카페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의 어떤 마음 정도는 이해하게 되었다. 두 번의 큰 전염병과 서울을 뒤덮은 전례 없는 홍수도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밤에 카페를 찾아 나서는 마음은 빛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아리와 ★★는 아주 친해져서 2049년, 서울이 인간적으로 견딜 수 없고 산책도 할 수 없는 곳이 될 즈음에 ★★는 이제 정우의 것인지 ★★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아리에게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우리 이제 다른 행성으로 떠나려고 하는데 같이 갈래? 서울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괜찮은 곳이야.” 한참 전 아버지를, 일 년 전 어머니를 세상에서 떠나보낸 2049년의 아리는 ★★를 처음 만났던 때의 아리보다도 혼자였다. 그녀를 잡아 둘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잃어버린 날씨는 물론 대체될 수 없었지만, 깊은 그리움과 행복이 같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작가소개.
짐리원. 서울대에서 미학과 영문학을 전공했고, 미국 피츠버그대에서 동물 윤리와 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서울에서 환경 윤리와 문학에 대해 강의 중이다. ‘올림픽공원 산책지침’으로 2023년 제3회 문윤성 SF 문학상 중단편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기후 변화와 환경 오염, 서울에 대해 계속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