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사형장까지 논쟁 몰고간 에디슨의 음모

직류, 교류 전쟁


에디슨의 전기 의자. 1890년 8월 6일 뉴욕 어번 형무소에서 사형 집행에 사용됐다.


1백여년 전 미국 뉴욕에서는 전기산업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은 직류와 교류 중 어떤 것을 전기 시스템의 표준으로 삼느냐를 두고 에디슨사와 웨스팅하우스사가 벌였던 ‘전류전쟁’ 이었다. 직류를 사용하던 에디슨은 교류 발전기를 ‘전기사형’ 에 의도적으로 이용해 교류의 위험성을 과대하게 선전했다. 하지만 전기사형은 실패로 돌아갔고, 교류는 전기 시스템의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에디슨은 백열등의 탄소 필라멘트를 발명한 후 에디슨사를 설립해 백열전구, 전선, 전기 모터, 발전기 등 전기 시스템에 사용되는 거의 모든 것을 개발함으로써 당시의 전기산업을 장악했다. 반면 웨스팅하우스는 기차에 사용되는 공기 브레이크를 발명해 백만장자가 된 후 교류 변압기의 특허를 사들여 전기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발명가에서 사업가로 변신한 두사람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2등이 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로비에 매수된 과학자들

직류 방식으로 전기를 생산하고 전송할 경우 전류를 강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전압을 높이기가 어렵다. 에디슨사는 1백20V의 전기를 생산해 각 소비지역으로 전송했다. 그러나 전송 중 전선의 저항으로 인해 전기량이 감소하기 때문에 직류 발전소는 소비지역에 매우 가까운 곳에 설치돼야 했다.

이에 비해 교류 방식은 전류를 강하게 만들기 어렵지만 전압은 많이 높일 수 있다. 웨스팅하우스사의 교류 발전기는 수천V의 전압을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전선의 저항으로 전기량이 감소해도 크게 우려할 정도는 아니었다. 한편 웨스팅하우스사는 중앙 발전소에서 전기를 전송한 뒤 각 지역에 설치된 전신주의 변압기에서 전압을 1백10V로 전환시켰다. 따라서 발전소는 발전에 필요한 석탄이나 물이 있기만 하면 아무데나 만들 수 있었다.

이처럼 웨스팅하우스사는 전기를 보다 쉽고 싸게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점점 에디슨사의 시장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의 가장 큰 시장인 뉴욕은 웨스팅하우스사를 외면했다. 에디슨이 이미 뉴욕 전체를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웨스팅하우스사는 한가지 중요한 약점을 갖고 있었다. 교류 전기모터를 아직 만들지 못했다는 점이다. 에디슨사는 이미 직류 전기모터를 만들어 다양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웨스팅하우스사는 전등을 밝히는 정도의 일에만 관여했을 뿐이다.

하지만 교류가 서서히 세력을 확장하자 에디슨은 흠집내기 공작으로 반격을 시도했다. 그는 ‘에디슨사가 경고합니다’ 라는 책에서 웨스팅하우스를 살인자로 몰아세웠다. 이 책은 고전압 교류선에 가까이 갔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경고하면서 고압 교류에 감전돼 ‘전기구이’ 가 된 사람들의 명단을 실었다(에디슨사의 전선은 땅 속에 묻혀 있었다). 당시 뉴욕 하늘은 고압선과 전화선으로 검게 뒤덮혀 있었고 매년 수십명의 사람들이 고압선에 감전돼 죽었다. 에디슨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무서운 교류를 가정에서 사용하시겠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아니오” 라고 대답했다.

사태가 인간의 생명과 관련된 문제로 확대되자 과학자들이 심판으로 나섰다. 시카고 전기 클럽은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직류와 교류를 비교하는 토론회를 열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이미 에디슨의 로비에 매수당한 상태였다. 이들은 직류가 사용 범위가 넓고 안전성이 뛰어나므로 직류를 전기 시스템의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시카고 토론 직후의 상황은 웨스팅하우스에 유리하게 벌어졌다. 프랑스 기업이 구리 시장을 장악한 후 구리 가격을 3배나 인상했기 때문이었다. 직류 방식은 전류를 굵은 구리선을 통해 보낸 반면 교류는 가는 구리선을 사용하고 있었다.

전기사형 작전 실패
 

교류를 이용한 동물 감전사 실험. 188년 12월 5일 뉴저지주 오렌지에 있는 에디슨의 실험실에서 실시했다. 왼쪽 상담 그림은 교류 발전기 모습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테슬러라는 기술자가 교류 모터를 발명했다는 점이다. 그는 처음에 에디슨의 일을 도왔지만 전기 시스템을 교류로 전환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자 에디슨과 결별했다. 웨스팅하우스는 테슬러의 특허를 사들이는 것은 물론 그를 기술 고문으로 고용해 뉴욕같은 대도시에 적합한 교류 전력망을 설계하도록 지시했다.

궁지에 몰린 에디슨은 교류를 불법화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경제적인 면이나 과학적인 논리로 교류의 팽창을 막을 수 없다면 교류의 위험성을 다시 강조해 사람의 감정을 흔들어놓자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에디슨은 자기 대신 ‘추악한’ 임무를 수행할 사람을 찾았는데, 그는 자칭 교수인 브라운이라는 인물이었다. 브라운은 한 잡지사에 “교류는 저주받은 위험한 것이므로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 는 서한을 보냈다. 반응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에디슨은 자기 회사의 최고 기술자를 브라운의 조수로 임명해 교류의 치명성을 입증하도록 부추켰다. 브라운은 ‘뉴욕 타임스’ 에 공개적으로 결투 신청서를 냈다. “내 몸에 직류를 흘러 보내는 동안 웨스팅하우스씨의 몸에는 교류를 흘려 보내 누가 오래 견디나를 알아 봅시다. 1백V에서 시작해 50V씩 올릴 것을 제안합니다. 둘 중 한명이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러워한다면 그는 자신의 결점을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웨스팅하우스가 이 도전을 무시해 버리자 브라운은 다른 방법을 찾았다. 공개적인 사형집행장에서 사형수에게 시험을 해보는 것이었다.

때마침 뉴욕주는 교수형을 대신할 ‘인도적인’ 사형집행 방법을 찾고 있었다. 당시 뉴욕주 정부는 교수형 집행에서 몇차례 심각한 실수를 범했다. 교수용 올가미가 너무 느슨해 사형수가 천천히 고통스럽게 질식사하는 경우가 있었고, 때로는 올가미가 너무 꽉 조여 사형수가 교수형이 아닌 참수형을 당하는 끔직한 경우도 있었다. 주지사는 다양한 사형집행 방법들을 검토한 후 전기를 이용한 사형집행을 위해 연구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전기 방면의 대가로 공인된 에디슨에게 자문을 구했다. 에디슨은 웨스팅하우스에게 치명타를 줄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에디슨은 전기가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최소한의 고통으로 사형을 집행시켜 줄 최선의 방책”이라고 주장하면서, 웨스팅하우스의 교류 발전기를 사형집행에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브라운은 송아지와 말을 에디슨의 실험실로 끌고 와 교류에 감전시키는 실험을 했다. 각 신문은 “15초만에 송아지는 쇠고기 덩어리로 변했다”고 보도하면서, “보라! 인간보다 더 큰 포유동물을 죽이는 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은가? 인간도 이들 동물만큼 빠르게 처형될 수 있다”는 브라운의 주장을 일제히 실었다.

물론 웨스팅하우스는 에디슨에게 발전기를 팔지 않았다. 그러자 브라운은 다른 방법으로 발전기를 구입해 전기 사형이 집행될 형무소로 보냈다. 에디슨은 직접 전기의자를 설계해 사형집행을 도왔다.

17초 동안 전류를 사형수의 몸에 흘렸다. 그러나 사형수는 비명만 지른 채 살아 있었다. 이번에는 72초 동안 전류를 보냈지만 연기만 솟아 오른 후 전기는 끊어졌다.

전기사형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에디슨의 방식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에디슨은 사형수의 손을 소금물 그릇에 담근 후 그 그릇으로 전류를 보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치명적인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후 사형수의 머리에서 종아리로 전류를 보내는 방식이 채택됐다.
 

노동자들이 뉴욕의 거리에 직류 전선을 묻고 있는 광경. 직류 방식은 수많은 발전소와 전선 설치 공사를 필요로 했다.


나이가 들면…

에디슨의 전기사형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웨스팅하우스는 시장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마침내 웨스팅하우스사는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서 에디슨사를 제치고 전기시설 독점권을 따냈다. 곧이어 웨스팅하우스는 직류를 교류로 변환할 수 있는 모터까지 선보였다.

웨스팅하우스의 승리를 결정적으로 마무리지은 일은 나이아가라 폭포에 세계 최초의 수력 발전소를 건설하는 공사를 맡은 사건이었다. 하지만 에디슨이 완전히 패한 것은 아니었다. 나이아가라 발전소에서 버펄로시로 전기를 공급하는 전선을 만든 회사는 제너럴 일렉트릭사였는데, 이 회사는 교류 업계에서 웨스팅하우스사 다음 가는 토머스 휴스턴사와 에디슨사가 합병해서 탄생한 회사였다. 에디슨의 사업 수완은 여전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에디슨은 왜 끝까지 직류를 고집했을까. 정말 에디슨은 교류를 '악의 전류' 로 믿었을까. 아니면 나이가 들면서 매사에 조심스러워졌기 때문일까. 천재 발명가 에디슨도 늙어가면서 새로운 기술 혁신에 대해 보수적인 사람으로 변했을 것이다. 백열전등을 완성하기 위해 뚜렷한 결과가 없어도 수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었던 청년 에디슨은 점점 사업 수단에만 관심을 갖는 늙은 사업가로 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고압 송전선이 연결된 모습. 교류 전류의 경우 변압기를 이용해 전압을 대폭 높여 송전할 수 있다.


직류와 교류

전류를 송신하는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가능한한 손실을 없애는 일이다. 전류를 파이프 안에 흐르는 물이라고 생각하자. 물이 많이 흐를수록 그 흐름을 막는 저항이 강해져 물의 흐름은 더뎌진다. 만일 물의 양을 줄이고 압력을 높인다면 물은 보다 효율적으로 이동될 수 있다.

직류는 기술적으로 전압을 변화시키기가 힘들다. 그래서 낮은 전압 상태에서 많은 전류를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교류는 변압기를 이용해 전압을 조절할 수 있다. 변압기는 1초에 몇십회씩 진동하는 교류 전류를 한쪽 코일에서 받아들여 다른쪽 코일에 유도 전류를 발생시켜 결국 새로운 전압을 얻을 수 있도록 돼 있다. 따라서 변압기를 이용해 전압을 높여 송전함으로써 적은 전류로도 충분한 전력을 보낼 수 있다. 또 적은 전류를 보낼 때 굵은 전선이 필요하지 않으므로 직류에 비해 경제적이다.

현재 가정이나 대부분의 공장에서 사용하는 방식은 교류 전압이다. 가정용 전압이 110V에서 220V로 바뀐 것은 그만큼 전기 손실이 적어져 사용자들이 전기세를 덜 내게 됐음을 의미한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1996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송성수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 진로 추천

  • 전기공학
  • 전자공학
  • 역사·고고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