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중학교 때 학급 문고에 있는 과학동아를 즐겨보는 학생이었지만 과학자, 과학도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던 적은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뚜렷한 계획은 없이 부모님의 권유로 과학고에 진학했죠. 과학고와 이후의 KAIST 생활을 하면서, (똑똑한 친구들과 공부하는 것은 정말 즐거웠지만) 더더욱 ‘나는 과학자를 할 사람이 아니구나’ 생각하게 됐습니다. 타고난 지적 능력은 물론 진리에 대한 갈망, 진리를 얻기 위한 도전 정신 등이 제겐 부족하다고 여겼습니다. 이에 더해 연구자로서의 삶도 제가 바란 삶의 방식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과학 속에서 익힌 나의 원천 역량
이후 대학원의 재무 전공 석사과정을 거쳐 진로를 변경해 현재는 금융보험 분야가 전문인 전략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금 제 영역은 과학과 다소 멀어졌습니다. 하지만 수학을 전공하며 훈련한 분석적비판적 사고와 문제 해결 능력, 다양한 ‘지적 도전’에 대한 유연한 수용 능력이 전략 컨설턴트로서 저를 차별화하는 ‘원천 역량’이 됐음을 여전히 자주 느낍니다.
독자분들 중엔 ‘전략 컨설턴트’라는 직업이 생소한 분들도 계실 듯합니다. 전략 컨설턴트는 ‘기업이 가진 경영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하는데요. 예를 들면 신시장 진출 전략의 수립, 비용 절감 기회 발굴, 중장기 성장 전략의 개발 등을 목표로 3~4개월간 팀을 구성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이 결과를 의뢰인인 기업의 경영진에게 보고하고 설득합니다. 기업이 이 프로젝트 결과를 수용하는 의사 결정을 하면, 그 제안 내용의 실행과 적용 과정까지 기업 내에서 장기간 지원하는 경우도 있죠. 요약하면 전략 컨설턴트란 기업의 경영전략기획 기능에 대한 ‘외주 R&D’의 역할을 한다고 보시면 적절합니다.
제가 이 일을 시작한 2013년엔 외국계 컨설팅 회사의 전략 컨설턴트 대부분이 경영경제 전공자였습니다. KAIST나 과학고 출신은 물론, 특히 수학 전공은 찾기 어려웠죠. 컨설팅 회사의 인턴, 대학교 컨설팅 학회나 동아리 활동 경험은 당연하다고 여겨졌는데, 저는 그렇지도 않았고요. 전공도 경험도 특수한 상황이었기에, 회사 생활에 적응하기가 처음엔 꽤 어려웠습니다.
수학자와 전략 컨설턴트가 공유하는 도구
컨설팅 업계는 개개인의 성과 평가가 상당히 냉정하고 잦은 편이며, 역할을 해내지 못하면 가차없이 이직해야하는 분위기입니다. 이걸 ‘업 오어 아웃’이라고 표현하죠. 그렇기에 첫 1년 반 정도는 컨설턴트의 기본 소양을 익히며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때는 특히 ‘첫 직장을 타의로 그만둘 수는 없다’는 자존심으로 버텼던 것 같아요.
이 시기를 지나 ‘기술적 안정화’가 어느 정도 이뤄진 후엔 상황이 좀 달라졌습니다. 1~2년차는 담당 프로젝트의 조사분석과 지원 업무를 맡고, 2~3년차부터는 ‘모듈’이라는 독립적 업무가 주어지는데요. 전체 프로젝트 내에서 특정 문제를 담당해, 가설 수립-보고서 구조 설계-결론 도출의 전체 과정을 담당 컨설턴트가 주도합니다. 이때부터 컨설턴트로서 제 몫을 한다고 말할 수 있죠. 과학고와 KAIST에서 받았던 이공계 학생으로서의 ‘훈련’이 이 시기부터 업무적으로 빠르게 성장한 결정적인 힘이 됐습니다.
컨설팅의 ‘경영문제 해결’과 수학의 ‘정의의 증명’은 닮은 면이 있습니다. ❶주어진 상황을 가장 명료하게 설명하는 전제와 틀, 즉 프레임워크부터 정의합니다. ❷이 프레임워크 안에서 내 주장을 논리적인 단계로 세분화합니다. ❸이 각 단계를 증명, 설득하는 과정을 거쳐 최종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❹이 결론이 받을 수 있는 비판, 반례를 상정해 전체 과정을 재점검하고 보강합니다. 이 일련의 과정은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키우고 발휘한다는 면에서 경영문제 해결과 정의의 증명 간의 유사성을 보여줍니다.
대학교 때 수학을 전공하며 다양한 정리의 ‘증명법’을 익히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을 들였습니다. 이런 과정을 4년 내내 반복한 것이 논리적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근육’으로 남았고, 컨설팅의 문제 해결에 직접 활용됐습니다. 탄탄한 구조와 근거 위에서 내 주장을 모두에게 설득한다는 본질이 같았으니까요. 일을 하며 특히 어려운 사안을 만났을 땐, 해석학의 증명 하나를 이해하려 며칠 밤 고민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그때에 비하면 이건 훨씬 쉬워’ 라고 스스로를 다잡았습니다.
“맞는 말이 중요하다”는 큰 함정
물론 이후에도 커리어의 굴곡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업무에 숙달되고 저 자신의 콘텐츠에도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던 무렵이 특히 기억에 남아요. 의뢰인과 일하면서 ‘내 말이 정답인 것 같은데 상대는 쉽게 인정하지 않는’ 순간이 잦아졌습니다. 분명히 난 정확한 팩트를 제시했고 분석 과정도 논리적으로 문제가 없는데, 상대방들은 납득하지 못하더군요.
감히 말하자면 이것도 컨설턴트와 과학도가 공통적으로 빠질 수 있는 ‘함정’인 듯합니다. 상대방의 상황, 의도에 대한 이해는 없이 ‘맞는 말을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지’라는 태도가 과학고와 KAIST에선 정말 흔했으니까요. 물론 저도 예외는 아니었고요.
이런 한계를 극복하는 여러 과정이 있었고 시간도 걸렸는데, 책 한 권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한 괴짜 수학자의 삶을 다룬 ‘골드바흐의 추측’(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지음)이란 소설입니다. 이 책은 세계적인 수학 교양서 중 하나로 수학 연구자의 삶을 따라가며 소수에 대한 흥미를 얻게 되는 구성이 인상적입니다.
이 소설의 제목인 골드바흐의 추측은 수학계의 대표 난제입니다. 제시된 지 28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페트로스는 이 추측의 증명에 평생을 바쳤죠. 그러던 중 쿠르트 괴델이 ‘참인 명제라도 증명이 불가능할 수 있다’라는 요지의 ‘불완전성 정리’를 발표하자 그는 절망에 빠집니다. 불완전성 정리는 라틴어로 ‘Ignoramus et ignorabimus(우리는 모르고 모를 것이다).’라는 격언으로도 유명합니다. 이 정리가 페트로스에겐, 자신의 증명이 성공할 수 없다는 저주였습니다.
불완전성 정리가 인간 지성의 본질적 한계를 경고하는 철학적 의미로도 차용된다는 점과 그 라틴어 격언이 당시의 제 마음에 깊이 와닿았습니다. 업무상의 ‘한 단계 진화’를 고민하던 제게, 이 말은 ‘따져서 이기는 게 전부가 아니야’라는 의미로도 들렸죠.
좋은 컨설턴트는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상대의 입장에 맞는 설득 방법을 유연하게 고민하는 역량이 필요함을 그때쯤 깨달았습니다. 제게 필요한 역량은 상대방을 내 논리로 찍어 누르는 것이 아니었죠. 컨설턴트로서의 문제 해결력과 사고력도 상대의 입장부터 이해하는 접근이 전제될 때 비로소 빛났습니다.
과학도의 경쟁력으로 여러 분야에 도전하길
전략 컨설턴트로 일한 11년은 이른바 이과적 소양이 대학이나 연구소가 아닌, 컨설팅이란 분야에서도 고유한 경쟁력이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과적’이란 표현이 다소 피상적이란 점은 아쉽지만요. 그동안 저희 회사에서도 KAIST를 포함한 ‘과학도’ 출신 직원 비중이 꾸준히 증가한 점을 보면 이 경쟁력의 가치가 조직에도 공유된 듯해 보람을 느낍니다. 중간관리자가 된 지금은 저 나름의 방법으로, 보다 다양한 배경의 본질적인 사고력을 가진 인재 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학창 시절에 과학도였더라도 꼭 과학자, 연구자가 돼야하는 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과학을 공부하며 체득하는 문제 해결력, 비판적분석적 사고는 현대 사회의 어느 분야에서나 꼭 필요한 ‘원천 역량’임을 현장에서 느낀 까닭입니다. 과학동아의 학생 독자들께서도 과학도의 ‘기술적 경쟁력’에 자신감을 갖고 다양한 진로, 분야에 도전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