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케임브리지를 뜨겁게 달궜던 지난 며칠 간의 주제 토론회를 마친 후라 그런지 공개강연과 종합토론이 열릴 오늘은 오히려 마음이 다소 가벼워졌다. 그간의 토론회가 BBC를 통해 전세계에 생중계된 덕에 BBC 인터넷 게시판은 지난 며칠 동안 전세계 네티즌들로 시끌벅적했다.
강연 원고를 미리 받아보게 해달라는 요청 메일부터 종합토론 시간에 이건 꼭 질문해달라는 부탁 메일까지, 과학자들간의 논쟁이 전세계적으로 이렇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사건은 역사상 별로 없을 것이다. 리플이 1백개 이상 달린 글도 여럿 있었으니 네티즌들 간에 벌어진 열띤(때로는 무시무시한) 대리전도 정말 대단했다. 어쨌든 오늘로써 이 역사적인 다윈의 식탁은 아쉽게도 막을 내린다.
1천석 정도의 강당은 한시간 전에 이미 꽉 찼고 계단에도 많은 사람들이 빼곡이 앉아있다. 입장을 못해 항의하며 되돌아간 사람도 족히 1백명이 넘는다. 여러 매체의 기자들은 노트북을 켜놓은 채 맨앞줄에 일렬로 앉아 강연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오늘의 주인공, 리처드 도킨스와 스티븐 제이 굴드는 사회자인 킴 스티렐니 박사의 좌우에 앉아있다. 누가 다윈의 진정한 후예일지…. 사회자가 먼저 강단에 올라선다.
사회자(스티렐니): 오늘은 런던에서 인사를 드립니다. 혹시 왜 하필 이곳 런던정경대학(LSE)의 강당에서 다윈의 식탁 마지막 날을 진행하는지 궁금해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다윈의 식탁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를 한번 떠올려봅시다. 다윈 이후 최고 진화생물학자라고 칭송 받던 윌리엄 해밀턴 박사님이 말라리아로 돌아가셨고, 그 장례식에 참석하신 몇몇 진화생물학자들이 다윈의 식탁을 여기까지 이끌어오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해밀턴 박사님이 대학원 시절을 이곳 런던정경대학에서 보내면서 현대 진화생물학의 기념비적인 논문인 ‘사회적 행동의 유전적 진화’(1964년)를 집필했다는 사실을 아시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사실 더 큰 규모의 강당도 있었지만 굳이 이곳을 다윈의 식탁 마지막 장소로 선택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혹시 자리가 비좁아 불편하시더라도 이런 뜻이 있었다는 점을 널리 이해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예고된대로 오늘은 두 연사가 30분씩 차례로 강연을 하고 남은 1시간 동안 종합토론을 하는 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강연 주제에 대해서는 연사들의 결정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간의 토론 주제들과 어떤 식으로 연결되면서 좋은 마무리가 될지 자못 기대됩니다. 먼저 도킨스 교수님께서 ‘종교는 왜 바이러스인가?’라는 제목으로 강연해주시겠습니다.
도킨스: 아시다시피 저는 다윈의 식탁 첫날부터 줄곧 유전자의 눈높이를 강조했습니다. 즉 이기적 유전자의 관점에서 자연과 인간, 그리고 문화를 재조명해보자는 주장이었습니다. 마지막 날인 오늘, 제 관심은 유전자를 포괄하는 좀더 넓은 개념인 ‘복제자’를 향해 있습니다.
복제자는 쉽게 말해 자기 자신을 거의 틀림없이 그대로 복사하는 주체입니다. 사실 유전자는 여러 유형의 복제자 중 A·C·G·T와 같은 염기들로 구성된 특정한 복제자일 뿐이죠. 유전자가 아닌 복제자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예컨대 사람들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사상, 관습, 또는 어떤 책, 심지어 그 책 속의 몇 구절 등도 얼마든지 복제자로서 기능할 수 있죠. 지난 며칠동안 유전자 중심으로 세상을 보자고 말했다면, 오늘 저는 유전자를 포괄하는 상위 개념인 복제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고 제안합니다.
‘이기적 유전자’의 초판(1976년) 맨 마지막 장에서 저는 이미 ‘모방자’(meme)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적이 있습니다. 그 이후에 어떤 분들은 모방자와 비슷한 뜻을 담은 용어, 예컨대 ‘문화유전자’ 등을 쓰기도 하셨죠. 어쨌든 저는 거기서 유전자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경우에는 모방자가 더 중요한 복제자일 수 있다는 점을 언급했습니다. 예를 들어 감미로운 멜로디, 축구에 대한 광적인 집착, 인종 편견, 요리법 등은 한 인간에서 다른 인간에게로 복사되는 복제자의 사례입니다.
더 실감나는 예를 들어볼까요. 10년 전까지만 해도 야구 모자의 앞뒤를 바꿔 쓰고 다니거나 청바지를 찢어서 입고 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런 풍경이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모방자는 특히 아이들의 행동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아이를 키우는 집치고 킥보드 한대 없는 곳은 거의 없을걸요. 최근에는 아바타 열풍이 온 학교를 휩쓸고 지나갔다죠. 이런 모방자는 인간에게서 인간에게로 전달되는 복제자입니다.
제가 둘째날 이기적 유전자에서 어떻게 이타적인 개체가 진화할 수 있는지를 논의하면서 인간이 유전자의 운반자라고 말씀드린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동물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유전자뿐만 아니라 모방자도 운반하고 전달하는 존재입니다. 때로는 유전자의 명령과 모방자의 명령이 상충하기도 합니다. 제가 ‘이기적 유전자’ 초판의 맨 마지막 문장을, ‘우리만이 이기적 유전자의 독재에 항거할 수 있다’라고 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제 이론을 이기적 유전자 이론이라고 하지말고, 모방자까지를 포괄한 이론으로서 ‘이기적 복제자 이론’으로 부르자고 제안하기도 합니다.
좋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가보십시다. 그렇다면 이기적 복제자 이론의 관점에서 인간의 종교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저는 감히 종교가 ‘기생 모방자’라고 주장하고자 합니다.
갑자기 청중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사회자의 헛기침 소리에 도킨스의 설명이 다시 이어진다.
이 용어가 낯설다면 대신 ‘정신 바이러스’라는 용어를 사용하겠습니다. 바이러스가 어떤 놈인지는 대개 잘 아실 겁니다. 생물계에서 바이러스는 자신을 복제하는데 필요한 핵산(DNA 또는 RNA)과 같은 유전물질을 제외하고는 세포로서 어떤 특징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때문에 바이러스는 살아있는 세포에 기생하지 않고는 대사활동도 할 수 없고 증식도 할 수 없습니다. 겨울철에 유행하는 독감은 바로 이런 바이러스가 세포에 기생하면서 자신을 마구 복제하기 때문에 생기는 병입니다.
그런데 세포를 매개로 하지 않는 바이러스도 있습니다. 트로이목마니 웜이니 하는 컴퓨터 바이러스가 그것입니다. 이것들은 세포 대신에 컴퓨터 운영체계나 프로그램, 또는 메모리 내부에 기생해 감염된 파일에 접촉하는 다른 파일에까지 자신을 복제합니다.
그렇다면 정신 바이러스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의 정신을 숙주로 삼아 자신의 정보를 복제하는 기생자입니다. 인간의 정신은 세포와 컴퓨터만큼이나 바이러스에 쉽게 감염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와 컴퓨터가 본래의 작동을 멈추고 그 바이러스의 명령에 따라 작동하듯이, 정신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간은 그 바이러스를 더 많이 퍼뜨리는 방식으로 자신의 행동을 수정하게 됩니다. 왜 종교가 일종의 정신 바이러스일까요.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말이면 대개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진화론적으로는 다 이해가 가는 행동입니다. 아이들은 언어를 배워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적 관습을 배워야 하죠. 또 그러려면 여러 규칙들을 배울 필요가 생깁니다. 예컨대 “뜨거운 데에 손을 얹지 말라”라든가, “뱀을 집어들지 말라”라든가, “이상한 냄새가 나는 음식은 먹지 말라”라든가…. 생존을 위해 아이들이 배워야 할 것들은 상당히 많습니다.
자연선택은 아이들의 뇌 속에 “어른들이 하는 말은 무엇이든 믿어라”라는 어림규칙을 장착했을 것입니다. 물론 좋은 규칙입니다! 잘 작동하기도 하구요. 하지만 “네가 들은 모든 것을 믿어라”고 말하는 규칙은 정신 바이러스의 공격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모든 입력을 올바른 것으로 받아들이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바이러스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뇌에는 “뜨거운 불이 이글거리는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아무개를 믿어야 한다”라든지, “무릎을 꿇고 동쪽을 바라보며 하루에 다섯 번 절을 해야 한다”와 같은 코드들이 쉽게 기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코드들은 대개 부모의 가르침에 의해 전달됩니다.
2000년 9월 11일 뉴욕의 국제무역센터가 주저앉는 모습을 여기 앉아계신 모든 분들이 생생하게 기억하실 겁니다. 도대체 왜 그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자살 테러가 자행됐을까요. 저는 감히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점을 가르치는 종교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9.11테러가 발생했을 때 많은 전문가들이 여러 측면에서 분석을 했지만 제가 보기에는 모두 핵심에 벗어난 이야기들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디언’지에 ‘종교의 오발탄’이라는 제목의 글로 제 생각을 알렸죠. 만일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믿고 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자살 테러 같은 것은 지금보다 훨씬 줄어들 것이고 어떻게든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들것입니다. 사후세계에 집착하는 종교는 사람들을 언제든 살인무기로 만들 수 있는 정신 바이러스의 일종입니다! 감사합니다.
충격과 공포 때문이었을까. 보통은 강연이 끝나자마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오는데 오늘은 찬물을 끼얹은 듯 침묵이 잠시 흐르다 산발적으로만 박수가 이어졌다. 기자들과 함께 맨 앞줄에 앉아있던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려 주변을 살폈다. 런던이라 그런지 아랍계통의 얼굴을 한 사람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는 도킨스의 용기에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지만 이러다 정말로 칼 맞는 건 아닌지 내심 걱정스러웠다.
사회자: 도킨스 교수님 감사합니다. 강연 제목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도발적인 내용의 강연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도발에 관해 둘째가라면 서러워하실 분이 한 분 더 계시죠. (모두 웃음) 바로 굴드 교수님입니다. 오늘 강연 제목은 ‘다윈의 이론이 왜 불완전한가?’입니다.
굴드: 종교에 대한 도킨스 교수의 강연을 듣고 있자니 저도 입이 근질거리는군요. 저도 종교에 대해 몇마디만 하고 본론으로 가겠습니다. 예정에 없던 거라 그림이 미처 준비 안됐으니 칠판에 그려보기로 하죠.
칠판 쪽으로 간 굴드는 동그라미 두개를 그리기 시작한다.
종교는 정신 바이러스이기 때문에 치료하고 제거해야 한다는 도킨스 교수의 생각에는 종교에 대한 그의 무지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또한 죄송한 말씀이지만 과학의 역사에 대한 공부도 더 필요하신 것 같습니다. 흔히들 과학과 종교, 예컨대 진화론과 기독교는 양립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즉 진화론이 맞으면 기독교는 잘못된 종교이고 기독교가 진리이면 진화론은 거짓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종교와 과학은 각자 자기만의 탐구 영역과 방법론, 그리고 해답을 갖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과학은 사실에 대한 경험적 탐구인 반면 종교는 의미와 가치, 그리고 도덕에 관한 담론입니다.
여기 칠판에 그린 두 원처럼 두 세계는 서로 만나는 지점이 없습니다.(앉아있는 도킨스 교수를 바라보며)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바로 이런 견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갈릴레이, 아인슈타인, 심지어 다윈 자신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인간성을 충분히 경험하기 위해서는 과학만큼이나 종교도 필요합니다. 9.11테러가 종교 바이러스 때문에 발생했다는 발상은 참으로 유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도킨스 교수 같은 영향력 있는 학자가 역사적 사건을 그렇게 단순한 인과관계로 본다는 사실에서 우려를 금할 수 없네요.
몇몇 청중들의 박수소리가 이어졌다.
박수받자고 한 말은 아닌데요. 어쨌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종합토론 시간에 도킨스 교수와 토론을 벌이면 좋겠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가겠습니다. 저는 몇달 전에 제 생애에 가장 두꺼운 책을 출간한 바 있습니다. ‘진화론의 구조’(2002년)라는 제목이 붙은 책인데 무려 1천4백33페이지나 됩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주책을 좀 부린 셈이죠. 이 책을 내준 하버드대 출판부가 저 때문에 큰 타격을 입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모두 웃음)
무거운 듯 두손으로 책을 들어올려 보이는 굴드의 모습이 익살스럽다.
저는 이 책에서 다윈 진화론의 핵심을 정리하고 그 진화론이 왜 불완전하며 어떻게 하면 더 완전해질 수 있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전통적인 다윈주의가 세가지 토대 위에 세워졌다고 봅니다. 하나는 자연선택이 다양한 조직 수준에서 작동하기보다는 주로 개체 수준에서 작동한다는 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선택이 진화적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는 생각이며, 나머지 하나는 개체군 수준에서 벌어지는 점진적 변화를 단순히 확장하기만 하면 생명의 전 역사를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전제입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20세기 초반에 헤게모니를 쥐게 된 ‘근대적종합’이 일어난 이후에 다윈주의의 이 세가지 토대는 의심없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방금 전에 강연해주신 도킨스 교수의 탁월한 언변에 힘입어 근대적 종합은 좀더 단단해진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자연선택이 유전자 수준에서만 작용하고 진화적 변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나며 그런 변화가 누적돼 지구상의 생명체들이 이렇게 다양하게 진화해왔다는 견해는 명백히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견해는 한마디로 ‘울트라 슈퍼 다윈주의’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만일 다윈이 부활해서 도킨스 교수를 만나게 된다면 틀림없이 “내가 바로 찰스 다윈인데 댁은 누굴 찾으시는지….”라고 의아해할 겁니다. 근대적 종합 이후의 진화론은 너무 협소하게 흘러갔어요.
다윈의 식탁이 진행되는 동안 다소 방어적이었던 굴드가 막판에 도킨스에게 발톱을 세우고 있는 듯하다. 도킨스의 표정이 울그락불그락, 난리다.
우선 자연선택은 유전자 수준부터 개체, 개체군, 종, 심지어 종 이상의 분류군 수준에서도 작용합니다. 이건 단지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라 자연계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예컨대 종이 갖고 있는 특성들 중 어떤 특성들은 그 종을 망하는 길로 인도하지만 다른 특성들은 오히려 그 종을 더욱 번성케 합니다.
만약 어떤 종이 풍부한 변이성을 지닌 유전자 풀로 구성돼 있다면, 그 종은 그런 특성 때문에 그렇지 않은 종보다 환경 변화에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죠. 또 구성원들이 넓게 분포돼 있는 종들은 좁은 서식지만을 갖는 종들에 비해 변화에 대한 완충능력이 더 뛰어나기 때문에 쉽게 멸종되지 않습니다. 즉 어느 지역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지역에서만 서식하는 종은 멸종될 위험이 큰 반면, 다른 지역에서도 서식하는 종은 전체적으로 멸종되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종선택은 이런 이유 때문에 실제로 일어납니다. 이 점은 다윈과 도킨스 모두가 간과한 부분입니다.
도킨스 교수를 비롯한 진화론자들은 자연선택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저도 자연선택의 힘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연선택이 일어나기 위해 필요한 변이의 본성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은 변이가 거의 모든 방향으로 일어날 수 있으며 매우 작은 변화로만 발생한다고 전제합니다.
하지만 제 책 ‘개체발생과 계통발생’(1977년)에서 영감을 받은 학자들이 최근에 ‘이보디보’라는 이름을 내걸고 연구하는 내용을 보면, 발생적 제약이 진화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죠. 돼지에게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이 이득이 된다고 해도 그에게 갑자가 날개가 생길 수 없는 이유는 바로 발생 과정에서 날개가 생기는 과정이 이미 차단됐기 때문입니다. 즉 발생학적 메커니즘에서는 정해진 방향 이외의 다른 방향으로 변이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다윈은 발생학을 자신의 이론 틀 내로 편입시키려고 애쓴 사람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근대적 종합을 이끌어냈던 진화생물학자들은 발생학을 문전박대했습니다. 과학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말이죠. 그 결과 도킨스 교수처럼 발생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진화생물학자들이 양산됐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윈과 도킨스가 의존하고 있는 이른바 ‘외삽론’에 대해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이 외삽론은 한 종 내에서 발생하는 진화 과정이 큰 규모로 일어나는 진화 과정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입장인데, 이것이야말로 다윈 진화론의 한계를 보여주는 가장 극명한 예입니다. 지난번 다윈의 식탁에서 공룡 멸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6천5백만년 전에 운석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생명의 역사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를 상상해보자고 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 우리 인간들이 이렇게 런던에 모일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거대 규모의 진화는 소규모 진화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습니다. 생명의 역사에서 ‘우발성’은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감사합니다.
사회자: 강연 잘 들었습니다. 두분 모두 베테랑답게 강연 시간을 정확히 지켜주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종합토론이 진행될텐데 앞줄에 앉아계신 기자님들께 먼저 질문할 기회를 드리고 그 후에 방청객 여러분께 마이크를 넘기겠습니다. 어떤 분부터 먼저 하시겠습니까?
BBC기자: 도킨스 교수님께 질문 드리겠습니다. 교수님 주장대로 종교가 정말 바이러스일 뿐이고 제거돼야 하는 것이라면 종교를 갖고 있는 수십억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이 됩니까? 그들은 종교에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꾸려나갑니다. 종교를 바이러스로 보는 당신은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인생의 의미를 어디서 찾습니까?
도킨스: 냉엄한 철학과의 단순한 접촉으로는 / 모든 매력적인 것들이 날아가지 않는다고? / 한때 하늘에는 장엄한 무지개가 떠 있었다. / 이제 우리는 그것의 요소와 구성을 안다. 그리하여 / 무지개는 지루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 철학은 천사의 날개를 묶어버리고, / 규칙과 정렬로 모든 신비를 정복하며, / 귀신이 나오는 분위기와 땅 신령의 보고(寶庫)를 없애고, / 무지개의 비밀을 푼다.
19세기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이었던 존 키이츠의 ‘레미아’(1820년)라는 장편시에 나오는 싯귀입니다. 여기서 그가 말한 ‘철학’은 과학을 지칭합니다. 과학적 발견들로 인해 자연과 인생의 의미가 점점 축소돼간다는 염려가 담긴 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키이츠는 뉴턴이 ‘무지개를 프리즘 색으로 축소시킴으로써 무지개에 관한 시를 모두 파괴해 버렸다’고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의 시에서 따온 ‘무지개의 신비를 풀며’라는 제목으로 정반대의 메시지가 담긴 책을 몇해 전에 출간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과학적 발견이 많아질수록 자연과 인생의 신비, 가치가 점점 퇴색될 것이라고 걱정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자연에 대한 비밀이 하나 풀리면 그 해답은 또 다른 비밀을 낳곤 하죠. 그렇기에 해답은 문제만큼이나 경이롭습니다. 저는 종교를 퇴치해야 할 바이러스라고 보며 그것에서 어떤 경이감도 느낄 수 없습니다만, 오히려 과학을 통해서는 인생과 자연에 대한 경이감을 충만히 느낍니다. 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은 다메섹이라는 지방의 길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눈이 멀게 됩니다. 그는 치료를 받으면서 눈을 뜨고 비로소 개종합니다. 일종의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난 셈이죠. 세상을 달리 보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저는 진화론을 통해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진화론은 신의 존재와 종교의 가치를 부정하지만 인생과 자연에 새로운 종류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는데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모두 웃음)
웃음이 다 가시기 전에 갑자기 큰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돌발사태다.
어떤청중: 당신은 사탄이야! 더이상 신을 조롱하지 말고 어서 꺼져버려! (우당탕탕…)
“어어어…, 안돼!”
“그런데 여기가 어디인가? 왜 내가 침대 옆에 누워있지? 꿈이었잖아, 이런….”
갑자기 3년전 이맘때 해밀턴 박사의 사망 소식을 듣고 하루종일 허탈감에 빠져있던 때가 떠올랐다. 정신을 차린 후 컴퓨터 앞에 앉았다. e메일을 열자 몇통의 편지에서 낯익은 이름이 눈에 띈다.
‘2002년 5월 20일, 61세 굴드 교수 폐암으로 사망.’
이럴 수가, 굴드 교수가 죽다니…. 꿈에서 펼쳐졌던 다윈의 식탁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또다른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 그토록 열정적이고 재기넘치며 박학다식한 과학자와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데….
라이벌이었던 도킨스 교수도 그의 사망 소식에 틀림없이 몹시 슬퍼했을 것이다. 진화 무림의 고수들 간 싸움은 굴드의 사망으로 어쩌면 새로운 국면으로 흘러갈지도 모르겠다. 누가 굴드의 역할을 대신해줄 것인가? 나는 쓸쓸히 내 컴퓨터 속에 저장돼 있는 굴드의 파일을 열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썼다.
‘암세포도 그의 열정과 재능을 가로막지 못했으니, 굴드, 멋진 인생을 살다 그토록 흠모하던 디마지오 곁으로 가다.’
근대적 종합
1900년대 초반 용불용설 등 진화에 관한 여러 이론들이 등장하면서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은 암흑기를 맞았다. 그 후 1920-30년대 집단유전학자들이 종 간의 작은 차이가 시간이 흐르면서 엄청난 차이가 된다는 것을 수학적 모델링으로 증명했다. 이런 움직임이 다시 자연선택 이론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보디보(evo-devo)
진화와 발생을 중심으로 생물학의 모든 분야들을 아우르려는 통합생물학.
외삽
관측된 값으로부터 미확인의 변수값을 추정하는 방법.
디마지오
뉴욕양키스팀 중견수(1936-1942년, 1946-1951년)로 56경기 연속 안타라는 메이저리그 대기록을 세운 야구 영웅. 굴드는 못말리는 양키즈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