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ILL BE BACK” 영화 터미네이터의 명대사입니다. 2023년 이 명대사가 전세계에 울려 퍼졌습니다. 주인공은 싹 잡아 죽인 줄 알았던 흡혈 곤충 빈대. 다시 돌아온 빈대가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는지 살펴봤습니다.
“빈대 물려본 적 있어요?” (아뇨.) “2017년에 로마 여행을 갔는데, 침대 시트에 새끼 손톱 크기만큼 작은 핏방울이 묻어 있는 거예요. 그 때까지도 몰랐어요. 빈대의 식사 자국이란 걸. 그 뒤로 일주일 동안 너무 가려워서 자다가도 깨서 온몸을 벅벅 긁을 정도였어요.”
이 대화는 2023년 9월, 프랑스 파리가 빈대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보도가 쏟아졌던 때 이뤄졌습니다. 빈대에 물려본 적이 없었던 기자에게 동료 이창욱 기자의 경험은 놀라웠습니다. 모기와 같은 흡혈 곤충에 물려도 간지럽긴 하지만, 자다가 벌떡 일어날 정도는 아녔으니까요. 그런데 상황은 한 달 만에 달라졌습니다. 2023년 10월, 인천에서 빈대가 발견된 것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빈대가 출몰했습니다. 1970년대 이후 ‘빈대청정국가’인 줄 알았던 한국에 빈대가 다시 돌아온 겁니다. 그것도 더 강해져서요.
빈대 많아졌다
“교미한 암컷 빈대 한 마리가 집 안에 들어가면, 반 년 뒤 빈대 성충은 1만 3316마리가 됩니다.”
2023년 12월 5일, 서울 강동구 세스코 터치센터. 이날 해충방제업체 세스코는 기자 간담회의 일환으로 ‘베드버그 제로(BEDBUG ZERO)’ 세미나를 개최했습니다. 빈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워낙 컸기에 세스코가 설립 이래 처음으로 연구시설을 공개한 날이었습니다. 세미나는 빈대의 기본 습성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해 국내외 빈대 현황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날 세미나에서 가장 자주 언급된 말은 ‘빈대는 강하다’였습니다. 빈대 성충은 18~20℃ 조건에서 최대 48개월 간 생존할 수 있으며 흡혈을 하지 않고도 1년 간 살 수 있습니다. 빈대가 영어로 ‘Bed bug’인 이유는 이들이 침대 주변에 서식하기 때문입니다. 푹신하고 따듯하게 자고 싶어서는 아닙니다. 오직 그곳에 흡혈의 대상, 인간이 밤마다 무방비 상태로 누워있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2023년 가을부터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빈대는 무시무시한 번식의 결과가 아니란 겁니다. 세스코는 2010년부터 빈대가 발생한 곳에 방제 서비스를 진행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빈대 모니터링 지수’를 정리했습니다. 2010년 빈대가 발생한 장소의 수를 100으로 기준 삼은 이 지수는 2014년에 544, 2019년에 1531로 크게 늘어납니다. 그러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이동 제한이 걸렸던 2021년엔 1209로 주춤했습니다. 그리고 2023년, 1621로 대폭 상승했습니다. 즉 빈대는 팬데믹이 풀리면서 한국으로 몰래 온 불청객이란 겁니다.
빈대 달라졌다
빈대가 바다를 건너왔다는 증거는 또 있습니다. 2023년 12월 7일 서울대에서 만난 빈대 연구 권위자, 이시혁 서울대 농생명공학부 교수는 “10월부터 한국에서 보고된 총 13개의 빈대 발생 현장에서 빈대의 DNA 분석을 한 결과, 그 중 12곳의 빈대가 반날개빈대였다”고 설명했습니다.
빈대라고 총칭하고 있지만, 노린재목 빈대과의 곤충은 전 세계적으로 24개 속, 110여 종이나 있습니다. 이 중 사람을 흡혈하는 빈대는 총 2종입니다. 빈대(Cimex lectularius, Bed bug)와 반날개빈대(Cimex hemipterus, Tropical bedbug)입니다. 1934년 일제강점기 당시 발행된 조선박물학회잡지 17호에 ‘한국에 2종의 빈대가 조선 각지에 분포한다’고 기록된 바 있지만, 그 이후에도 주로 보고된 것은 빈대종이었습니다. 반날개빈대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이 2021년 12월 경기도 오산에서 채집된 기록입니다. 무려 90년 만이었습니다. 반면 2023년 발견되는 빈대들은 대부분 반날개빈대입니다.
반날개빈대와 빈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 교수는 “형태상으로는 다리 구조가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빈대는 다른 곤충처럼 다리에 갈고리 모양의 발톱과 접착성 분비물을 만들어내는 접착 패드를 갖고 있지만, 미끄러운 표면을 기어다닐 정도로 마찰력이 크지 않습니다. 이 교수는 “만약 빈대를 잡아서 유리병이나 매끄러운 플라스틱 병에 넣어둔다면, 절대로 탈출하지 못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반날개빈대는 다릅니다. 반날개빈대는 곤충의 다리 네 번째 부분을 이르는 경절 끝부분에 털이 나 있습니다. 이 털이 표면과 접촉 면적을 늘려 반날개빈대는 빈대보다 타고 오르는 능력이 훨씬 우월합니다. doi: 10.1093/jee/tox039 컵 모양의 매끄러운 플라스틱 통을 침대 다리에 끼워 놓는 걸로 물리적인 방제가 가능했던 빈대보다, 반날개빈대는 좀 더 골치 아픈 존재입니다.
빈대 강해졌다
인류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빈대를 대대적으로 방제하는 데 처음으로 성공했습니다. 1939년 스위스의 화학자 파울 헤르만 뮐러가 DDT의 살충력을 발견한 덕분이었습니다.
DDT는 곤충 뉴런의 나트륨 이온 채널을 엽니다. 나트륨 채널은 세포막에 존재하면서 신경세포에 전달되는 전기신호에 따라 열리고 닫히며 나트륨 이온을 통과시키는 막 단백질입니다. DDT를 투여하면 나트륨 채널이 닫히지 않아 나트륨 이온이 계속 빠져나갑니다. 나트륨이 부족한 신경세포는 지속적으로 흥분해 빈대는 경련을 일으키며 죽죠. 뮐러는 세계 보건 위생에 공헌한 공로로 1948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습니다.
이후 DDT 저항성을 가진 빈대가 생겨났을 때도 인간은 여러 살충제를 개발하며 국소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나갔습니다. 덕분에 빈대는 오랫동안 구전설화처럼 내려오던 ‘역사 속 곤충’이었습니다. 마치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속담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부터 빈대가 다시 하나 둘 보고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2000년은 무려 ‘빈대의 해’로 지정됐죠. 이 빈대들은 기존 피레스로이드계 살충제를 써도 죽지 않았습니다. 피레스로이드는 DDT 이후 가장 인기있는 살충제였습니다. 피레스로이드계는 DDT와 동일한 방법으로 빈대를 죽입니다. 나트륨 채널을 열어 빈대를 마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과학자들은 왜 피레스로이드계 살충제를 써도 빈대가 죽지 않는지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빈대가 피레스로이드계 살충제에 저항성이 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졌습니다. 2006년 데이비드 무어 미국 버지니아공대 곤충학과 연구원팀의 연구에 따르면 빈대의 피레스로이드계 살충제 저항성은 해롤드 할런의 빈대와 비교해 340배에 달했습니다. 할런의 빈대를 죽이기 위해 필요한 살충제 양을 1로 둔다면, 연구팀이 버지니아주에서 잡은 빈대는 340배의 살충제를 뿌렸을 때나 죽었다는 뜻입니다. doi: 10.1603/0022-0493-99.6.2080 2007년 케네스 헤인즈 미국 캔터키대 곤충학과 교수팀은 빈대의 피레스로이드계 저항성이 1만 2765배에 달한다고 보고했습니다. doi: 10.1093/jmedent/44.2.175
빈대 살아남았다
빈대가 살충제에 대한 저항성을 획득한 방법은 돌연변이입니다. 일반 빈대와 다르게 살충제에 저항성을 가진 소수의 돌연변이가 번식해 자손을 퍼트린 거죠. 이 교수팀은 2008년, 존 마샬 클라크 미국 매사추세츠대 환경 독성학 및 화학과 교수팀과 함께 나트륨 채널에 돌연변이가 있는 빈대는 피레스로이드계 살충제에 저항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최초로 밝혀냈습니다. doi: 10.1093/jmedent/45.6.1092 나트륨 채널을 암호화하는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있으면 살충제가 신경세포로 들어오더라도 나트륨 채널을 계속 열어둘 만큼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겁니다. 이런 돌연변이 빈대가 우점하는 상황이 되면 피레스로이드계 살충제는 무용지물이 됩니다.
2023년은 다시 빈대의 해가 됐습니다. 11월 9일 한국 정부는 네오니코티노이드계 살충제를 긴급 승인했습니다.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물질은 신경전달물질 수용체인 니코틴성아세틸콜린수용체에 작용해 신경계를 과도하게 자극시켜 빈대를 과흥분상태로 만들어 죽입니다. 피레스로이드계와 작용기작이 다르기에 피레스로이드계 저항성을 가진 빈대를 죽이는 데 효과적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미 빈대가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물질에 저항성을 갖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doi: 10.3390/insects14020133
조수지 서울대 농생명공학부 연구원은 2023년 11월 미국곤충학회에서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물질, 이미다크로프리드와 페닐피라졸계의 피프로닐을 함께 활용한 살충제가 빈대 방제에 가장 효과적이라고 발표했습니다. 피프로닐은 가바(GABA) 수용체에 작용해 흥분된 신경을 무효화하는 저해성 신경을 마비시켜 곤충이 과도하게 흥분해 죽게 만듭니다. 억제 신경을 억제해 흥분시키는 방식입니다. 조 연구원의 연구를 지도한 이 교수는 “서로 다른 작용 기작을 가진 살충제를 같이 사용해야만 저항성이 발달할 가능성이 크게 준다”고 설명했습니다.
“해충을 박멸하려는 인간의 시도는 늘 실패할 수밖에 없다.”
_브룩 보렐, ‘빈대는 어떻게 침대와 세상을 정복했는가’ 중
새로운 연구가 지금 당장 전 세계 빈대를 박멸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이 언젠가 강해져 또다시 나타날 것을 압니다. 막을 방법은 전혀 없는 걸까요? 이 교수는 “빈대의 저항성이 살충제에 국한된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진공청소기로 열심히 청소하고, 뜨거운 물로 빨래하고, 빈대가 서식하는 지역에 다녀온다면 특별히 조심하는 것. 이런 사소하고 기본적인 행동이 빈대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