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현상은 세포분열, 물질대사, 항상성 유지, 환경적응 등 우리가 살며 겪는 모든 체내 현상을 뜻합니다. 생명현상은 DNA에서 유전정보가 전달되며 시작합니다. 이 첫 단계는 DNA가 자기 스스로를 복제하는 DNA의 자기 복제(DNA replication)입니다. 이어서 DNA의 복제된 정보를 DNA가 없는 세포 핵 외부로 이동시키는 전사(Transcription) 과정에서는 RNA가 이용되고, 이렇게 만든 RNA의 유전정보로 단백질을 생산하는 번역(Translation)이 진행됩니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틀어 유전자 발현(Gene expression)이라고도 부르죠. 생명현상은 유전자 발현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형태의 단백질이 상호작용하는 덕분에 가능합니다.
생명현상의 끈질긴 오류, 암
현대사회에 여전히 큰 과제로 남아있는 질병인 암의 원인은, 이 일반적인 생명현상에서 발생하는 오류입니다. 암세포는 생명현상 중 세포분열에 이상이 발생해 무한 증식을 일으키기 때문이죠. 본래 세포분열은 염색체에 있는 텔로미어의 길이로 조절됩니다. 텔로미어는 염색체 말단에서 염색체를 보호해주는데, 세포분열이 진행됨에 따라 길이가 점점 줄어듭니다. 텔로미어가 사라지면 보호받지 못한 염색체는 손상되고, 손상된 염색체를 가진 세포는 분열을 멈추고 사멸합니다. 하지만 암세포는 텔로미어가 줄어들지 않는 탓에 무한히 증식합니다. 암세포에선 텔로미어가 줄어드는 것을 방지하는 텔로머레이즈 단백질을 번역하는 유전자가 과발현되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텔로머레이즈 단백질을 억제하면 암을 치료할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생명현상은 워낙 복잡해서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텔로머레이즈 단백질과 같은 효소를 조절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탓에, 단백질을 조절해 암세포를 치료한 성공 사례는 찾기가 힘든 실정입니다.
현재는 암세포를 억제, 사멸시키는 약물을 환자에게 투여하는 방식으로 항암 치료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 방식은 한계가 명확합니다. 암세포도 적응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암세포도 유전자 발현을 조절해 세포분열, 항상성 유지, 환경적응 등의 생명현상을 일으킵니다. 그 결과 항암제가 일으키는 염색체 손상을 암세포가 자체적으로 치료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 과학계에선 항암 치료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환자 맞춤형 암 치료’를 활발히 연구 중입니다. 이 치료법은 환자별 암세포 간의 생물학적 차이, 암세포 내부의 생물학적 차이를 모두 고려해 각각의 특성에 가장 잘 맞는 치료법을 적용하는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환자 A의 암세포는 전이성과 면역세포에 대한 반응성이 큰 반면에, 환자 B의 암세포는 전이성이 작고 면역세포에 대한 반응성이 작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이런 경우에 A 환자에게는 암세포가 다른 세포로 전이되지 않도록 막는 항암 치료 방식이 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B 환자에게는 세포 증식을 막는 데 초점을 둔 항암제를 투여하면 환자의 예후가 보다 좋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
환자 맞춤형 치료의 실행 조건
그렇다면 환자 맞춤형 암 치료라는 훌륭한 전략이 있는데 어째서 암은 여전히 난치성 질환일까요. 그 원인엔 물론 암의 끈질긴 생명력과 생명활동도 있지만, 암세포를 치료해온 역사 자체가 아직 짧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맞춤형 치료는 ‘오믹스(~omics·~체학)’ 데이터에 근거해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믹스는 ‘전체를 다루다’라는 뜻의 접미사죠. 현대 생명과학에선 많은 분자나 세포 등의 집합체에 관한 복합적, 총체적인 데이터를 활용해 대량의 생물정보와 이 정보들 간의 상호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통합니다. 세포 내부의 모든 유전자, 유전체를 다루는 학문을 유전체학, 존재하는 모든 mRNA를 다루는 전사체학, 세포 내에서 발현된 모든 단백질인 단백질체를 다루는 단백체학 등 다양한 분야가 있습니다.
그동안 유전체학 연구자들은 암 유발 유전자(oncogene), 암 억제 유전자(tumor suppressor gene) 등을 발굴했고, 이 성과는 환자 맞춤형 암 치료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유전체학 연구 결과만으로 암 환자들을 분류, 치료했을 때의 효과는 크지 않았습니다. 생명현상은 암 유발 혹은 억제 유전자뿐만 아니라 mRNA, 단백질 등 다양한 생체분자도 함께 일으키는 과정이기 때문이죠. 환자들의 암 억제 유전자가 서로 같아도 각자 보이는 생명현상은 다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현재 환자 맞춤형 암 치료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유전체, 전사체, 단백체 등을 연계한 다중체학 분석, 즉 생물정보학(바이오 인포매틱스) 연구를 적용해 치료법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다중체학이 풀어낸 조기발병위암 수수께끼
이번 논문은 다중체학을 활용해, 현대 사회에서 발병률이 지속적으로 상승 중인 40대 이하의 위암(조기발병위암) 환자의 암세포가 생명현상에서 갖는 특이점을 밝혀냈습니다. 조기발병위암은 유전적 요인의 영향이 크며, 여성의 발병률이 더 높습니다. 젊은 나이에 발생하는 이 위암은 암 유형 중 치료가 어려운 미만형(diffuse type)에 속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위점막 아래에 넓게 퍼져서 발병하는 탓에 징후가 없고 다른 부위로 전이되기 쉬우며, 내시경으로 진단이 어렵습니다.
조기발병위암의 원인은 그간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이 논문은 유전체학, 전사체학, 단백체학을 연계한 다중체학 분석을 활용해 조기발병위암의 발병과 상관관계가 있는 변이 유전자의 존재와, 이 유전자들이 실제로 조기발병위암의 발병과 관련된 중요한 신호전달경로에 관여한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또한 세포 생명현상을 기준으로 위암을 4개의 하위 유형으로 세분함으로써 보다 정밀한 위암 원인 규명과 맞춤형 치료법 개발에 구체적으로 기여했습니다.
이 연구에선 먼저 유전체와 단백체를 분석해 조기발병위암 환자의 유전자에서 질병과 관련된 유전자 변이가 있는지 살펴봤습니다. 약 7000개의 체세포 변이 유전자 중에서 조기발병위암의 발병과 상관관계가 있는 변이 유전자들인 CDH1, ARID1A, RHOA를 찾았고, 이 유전자들이 조기발병위암 발병과 관련된 중요한 생명현상에 관여한다는 사실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위 두 가지의 연계 분석만 활용해 환자들을 하위 유형으로 분류하면 치료 후의 상태가 개선되지 않습니다. 본 연구에선 단백질 활성과 연관된 인산화 단백체, RNA 같은 전사체 정보를 활용해 조기발병위암에 대한 추가적 정보를 확보해서 환자를 분류했습니다.
또한 암 환자별로 유전체, mRNA, 단백체의 변화가 각각 증식, 면역, 대사, 침윤의 특성을 보이는 과정을 거친다는 것과, 이에 따라 조기발병위암 환자들을 4개의 하위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조기발병위암의 유전적 원인을 정밀하게 규명함으로써 향후 위암 환자의 정밀한 진단 및 항암 치료법 개선에 기여한 연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학과 의학이 발전하고, 환자별 특성에 따른 최적의 치료가 요구되면서 유전체, 전사체, 단백질체를 함께 활용한 다중체학과 임상 의학을 결합한 맞춤형 치료의 연구도 더욱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관련 과학 기술과 정보기술(IT)의 데이터 처리 능력이 지속적으로 향상되고 있어서, 앞으로 환자 맞춤형 치료는 더 크게 발전하리라 기대합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 사회가 오랜 숙원이었던 암 정복에 성공하길 바랍니다.
❋필자소개
채수연. 충남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환자 맞춤형 치료법과 전임상 모델의 개발 및 이 분야에서의 정량분석법을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다. 2018010908@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