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컴퓨터는 기존 컴퓨터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메커니즘으로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으로 주목받는 기술이다. 10월 6일, 안드레아스 하인리히 기초과학연구원(IBS) 양자나노과학 연구단장이 이끈 연구팀은 표면 위 단일 원자의 전자스핀을 이용해 여러 개의 큐비트를 원격으로 조절하는 새로운 양자 플랫폼을 제시했다. 이 양자 플랫폼은 새로운 양자컴퓨터 개발에 쓰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 연구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게재됐다. doi: 10.1126/science.ade5050
기존의 컴퓨터는 0과 1, 두 가지 상태를 표현하는 ‘비트’ 계산을 수행한다. 단순하지만 사칙연산부터 논리연산까지 다양한 계산을 수행할 수 있다. 그에 반해 양자컴퓨터는 ‘큐비트’라는 단위로 연산을 수행한다. 큐비트는 0과 1이 동시에 존재하는 ‘양자중첩 상태’가 가능한 비트이다. 기존 컴퓨터에서 사용하는 연산 과정과 달리 양자컴퓨터는 이러한 양자중첩 상태와 큐비트 간의 정보가 연결되어 있는 ‘양자얽힘’을 함께 사용한다. 따라서 양자컴퓨터에 적합한 연산과정을 사용하면 한 개의 처리 장치에서 여러 계산을 동시에 할 수 있어, 기존의 컴퓨터로는 오래 걸리는 계산을 훨씬 빠르게 할 수 있다.
양자컴퓨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양자컴퓨터의 기본단위인 큐비트를 구현하고 여러 개의 큐비트를 원하는대로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큐비트는 외부 환경에 매우 예민해 제어하는 것이 어렵다. 지금까지는 매우 낮은 온도에서 큐비트를 만드는 ‘초전도’, 인공적으로 양자점을 만들어 마이크로파로 제어하는 ‘반도체양자점’, 원자의 이온을 레이저로 포획해 제어하는 ‘이온 트랩’ 방식 등을 사용했다. 현재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식은 초전도 방식으로 구글과 IBM에서 만든 양자컴퓨터에 쓰인다. 하지만 초전도 방식은 극저온 환경을 유지해야 하고, 양자컴퓨터가 연산하기 위해 중요한 현상인 결맞음 시간(큐비트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양자얽힘과 중첩을 유지하는 능력)이 짧다는 단점이 있다. 때문에 더 효율적인 큐비트 구현 방식을 개발하는 것이 양자컴퓨터 학계의 핵심 과제 중 하나다.
연구단이 개발한 ‘단일 원자 전자스핀’ 플랫폼은 원자의 전자스핀을 큐비트로 활용한 방식이다. 연구에 참여한 박수현 연구위원은 전자의 스핀과 큐비트의 유사성을 막대자석에 빗대어 설명했다. “전자의 스핀은 방향을 갖는데, 이 방향을 막대자석 N극이라 여기는 겁니다. 하나의 막대자석이 어떤 방향을 향하면, 다른 막대 자석은 그 자석에 영향을 받아 방향이 결정되죠.” 즉, 전자 하나의 스핀 방향이 정해지면 다른 전자들의 스핀 방향이 자동으로 정해지는 성질을 이용해 큐비트를 구현했다는 의미다.
연구팀은 단일 원자 전자스핀 플랫폼을 활용해 큐비트를 원격으로 조정하는 데도 성공했다. 산화마그네슘 표면 위 여러 타이타늄 원자들을 주사터널링현미경(STM)의 탐침을 사용해 서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 특수한 원자 구조로 만들었다.
그리고 원자들끼리 스핀 상태가 상호작용하는 성질을 활용해, 탐침으로 하나의 타이타늄 원자 스핀을 조종함으로써 나머지 두 큐비트를 원격으로 제어하고 측정했다. 이 큐비트 플랫폼으로 양자정보처리에서 핵심적인 기본 연산인 ‘CNOT’와 ‘Toffolo’ 게이트를 구현하기도 했다.
단일 원자 전자스핀 플랫폼은 큐비트 간 정보 교환을 원자 단위에서 정밀하게 제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개별 큐비트의 크기가 1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 이하인 가장 작은 크기의 큐비트를 이용해 양자집적회로를 구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 큐비트 플랫폼과 차별화된다. 연구를 이끈 하인리히 연구단장은 “큐비트 플랫폼 중 초전도와 위상물질을 활용한 방식은 이미 해외에서 충분히 연구가 이뤄졌다”며 “단일 원자 전자스핀 플랫폼은 IBS 양자나노과학 연구단에서 최초로 개발한 독자적 기술”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상용화까지는 아직 갈 길이 남았다. 현재 개발한 기술로는 5~6개의 큐비트만 원격 조정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140큐비트까지 제작한 구글과 IBM의 초전도 방식에 비하면 매우 작은 양이다. 연구에 참여한 홍 부이 양자나노과학 연구단 박사과정 학생 연구원은 “개수를 늘리기 위한 여러 방법을 연구 중”이라며 “핵스핀을 제어하는 방법, 완전히 새로운 분자를 사용하는 방법 등을 고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현재는 각 큐비트의 수명이라 불리는 완화시간과 결맞음 시간을 10배 이상 늘리기 위해 산화마그네슘 절연 박막의 두께를 늘려 큐비트의 제어 성능을 개선하는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며 “이를 통해 충분히 긴 연산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