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콘텐츠는 과학기술진흥기금 및 복권기금의 재원으로 운영되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과학창의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성과물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발전과 저소득소외계층의 복지 증진에도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해 여름은 나를 재건하는 시간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가고, 시간은 가며, 시간은 간다. 식물은 자라고, 식물은 자라며, 식물은 자란다. 내 방 창가에는 이름 모를 식물이 있고 나는 침대에 누워 식물이 자라는 것을 지켜봤다. 그해 여름에 한 일은 그뿐이었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식물이 언제 죽을지 가늠하기. 이름 모를 식물이 죽길 바랐다. 알아서 잘. 자연의 섭리대로 말라비틀어지길. 그래서 일부러 뙤약볕에 놔두고 물도 한 방울 주지 않았다. 식물은 내 마음도 모르고 건강하게 자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열대식물이었다. 식물을 받을 땐 몰랐던 사실이다. 선생님은 식물을 주시며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을 뿐이다.
“키워봐, 예선아.”
2년 만에 만난 제자에게 할 말로는 적절치 않았다. 아니, 내게 할 말로는 적절치 않았다. 선생님은 늘 그런 식이었다. 언제나 자기 마음대로였다. 하지만 그런 선생님에겐 기묘한 매력이 있어서, 순진한 사람들은 휘둘리고 만다. 선생님은 내 중학교 1학년 담임이었고 내게 육상을 권했다. 그의 꼬임에 넘어가 3년을 허비했다. 지금은 그때처럼 순진하지 않다. 그때만큼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어째선지 학교를 나오는 내 손에는 화분이 들려있었다.
나는 식물이 죽길 바랐다.
여름 내내 태양은 뜨거웠다. 커튼을 치지 않으면 방이 온통 밝았다. 암막 커튼을 쳐도 빛이 샜다. 햇빛이 싫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창밖은 제멋대로 밝아졌다 다시 어두워지길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에 식물은 한 뼘씩 자랐다. 여름은 그렇게 갔다. 그리고 장마가 시작됐다.
식물의 상태가 안 좋아진 것도 그때쯤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거센 빗발로 변했다. 식물을 보는 일에 질려서 화분을 베란다에 내놨다. 어느 날 새벽에 잠에서 깼더니 창문이 열려 있었고 베란다는 엉망이었다. 화분은 쓰러졌고 바닥은 흙범벅이었다.
급한 대로 흙을 주워 담았다. 식물은 뿌리가 살짝 드러난 채였다. 축축한 이파리를 수건으로 닦고 뿌리를 다시 심어줬다. 정리를 마치고 쭈그려 앉아 한동안 식물을 바라봤다. 물을 잔뜩 먹은 식물은 초라하고 볼품없었다. 여름 내내 햇빛을 받으며 싱싱하게 자라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축 늘어진 청록색 이파리를 보니 어쩐지 마음이 안 좋았다.
화분을 다시 내 방에 들여놓았지만 식물의 상태는 계속 나빠졌다. 이파리가 노랗게 변하더니 줄기도 시들시들해졌다. 장마 동안 침대에 누운 채로 식물이 시드는 과정을 지켜봤다. 식물은 느리지만 확실히 죽음으로 향하고 있었다. 엄마가 아니었다면 식물은 정말로 죽었을 것이다.
“병원 예약해뒀다.”
방문이 벌컥 열렸다. 엄마는 노크도 없이 방에 들어왔다. 이불을 뒤집어쓰려다 말고 물었다.
“무슨 병원?” “식물 병원. 오늘 오후 3시로 예약해뒀어.”
엄마가 암막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어두운 방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식물 병원을 왜?” “저거 니가 기르는 식물 아니니?”
엄마의 손끝을 따라가니 그곳엔 죽어가는 식물이 있었다. 시든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초라했다.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끼는데 엄마가 결정타를 날렸다.
“선아, 밖에도 좀 나가야지.”
*
식물 병원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태양이 뜨거웠고 발목이 아팠다. 다리를 절며 걸었다. 의사는 분명히 내 다리가 멀쩡하다고 했다. 뛸 수 없을 뿐 걷는 덴 문제가 없다고, 고통도 없고 불편하지도 않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아직도 걸을 때마다 발목이 아팠다. 아픈 채로 햇빛을 맞으며 걸으니 더 아팠다. 예전엔 볕을 받으며 걷는 게 그렇게 좋았다. 이젠 아니다. 이제 태양은 나를 지치게 한다. 길바닥에 화분을 쏟아버리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병원에 갔다.
식물 병원은 상상했던 모습과 달랐다. 식물원을 상상했건만 실제로는 현대적인 전문 병원에 더 가까워 보였다. 흰색으로 깔끔하게 도배된 벽에서는 뭐라 설명하기 힘든 냄새가 났다. 숲 같기도 허브 같기도 한 식물성의 향이었다.
카운터에서 접수를 마치고 잠시 기다리자 차례가 왔다. 흰색 가운을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린 의사가 차트를 들고 다가왔다. 그녀를 따라가자 진료실이 나왔다. 의사가 식물을 잠시 살펴보더니 물었다.
“3시 예약자 맞지?” “네.” “학생 이름은?” “예선이요. 성이 예고 이름이 선이에요.”
의사가 네임스티커에 ‘선’이라고 적어 화분에 붙였다. 그녀는 진료 전에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내가 기르던 식물에 대해 잘 몰랐으니 거의 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식물의 품종이 ‘플로리다’라는 사실과 그게 열대식물임을 알려줬다. 지금 플로리다가 아픈 건 물을 너무 많이 줘서 그렇다고도 했다. 그녀는 차트에 무언가를 쓰더니 내게 손짓했다.
“이리 오렴. 치료를 시작하기 전에 검사를 해보자꾸나.”
의사를 따라 도착한 곳에는 커다란 기계가 있었다. 화분을 끌어안은 채로 그녀를 따라갔다.
“식물의 마음을 읽는 기계란다.”
의사는 내게 넘겨받은 플로리다를 기계 위에 놓으며 말했다. 갑자기 이 병원이 의심스러워졌다. 이 사람이 나를 놀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식물의 ‘마음’을 읽어주는 기계라니. 그런 건 듣도 보도 못했다.
“식물도 마음이 있나요?”
약간 비꼬는 투로 물었다.
“그럼.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란다.”
의사는 비꼬려는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 다정한 말투로 답했다. 그녀가 기계의 작동원리를 간단히 설명해줬지만 눈앞의 기계는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주파수를 분석해 식물의 상태를 알아낼 수 있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손을 대 보렴.”
의사가 기계 위의 플로리다를 가리켰다.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 손끝에 마르고 연약한 잎사귀가 닿았다. 플로리다는 작고 약했다. 손을 대면 부서질 것 같았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천천히 플로리다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기계와 연결된 모니터에 숫자들이 떠올랐다. 잠시 뒤에 조명이 빨간색에서 은은한 주황색으로 변했다.
“이건 무슨 뜻인가요?”
의사가 모니터를 확인하더니 엷게 웃었다.
“플로리다가 주인을 알아보는구나.”
왠지 김이 샜다. 아까부터 그녀는 나를 어린애로 보는 것 같았다.
“그런 게 어딨어요.”
난 퉁명스레 대꾸했다. 의사는 진지한 어투로 답했다.
“식물도 충분히 느낄 수 있어.”
이젠 그녀가 나를 놀리는 것 같았다.
“거짓말하지 마요.” “식물은 사랑을 돌려준단다.”
의사가 전과는 다르게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전 한 번도 사랑을 준 적이 없어요. 단 한 번도요.”
나는 의사를 노려보며 말했다.
“저런 식물 같은 건, 죽든 말든 상관없어요. 엄마가 아니었으면 여기 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전 저 애가 죽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떠들어댔다.
“저게 죽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죽어버리면, 돌이킬 수 없게 망가져 버리면 좋겠다고 매일 생각했어요.”
어느새 숨을 헐떡였다. 말을 마치자 사위는 아주 조용했다. 몇 초가 지나고 의사가 입을 열었다.
“지금은 어떠니?”
예상과 다르게 의사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기울여 다정하게 눈을 맞췄다. 어쩐지 몸에 힘이 탁 풀렸다. 힘없이 중얼거렸다.
“모르겠어요” “지금도 플로리다가 죽었으면 좋겠니?”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무언가를 억누르며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거면 됐단다.”
의사가 플로리다를 기계에서 꺼냈다. 그녀가 화분을 갈고 약재를 처방하는 동안 나는 기계에 기대있었다. 무언가의 ‘마음’을 읽어주는 이 기계가 새삼 아주 낯설었다. 식물도 느낄 수 있을까. 식물에도 마음이 있을까. 그런 생각에 빠져있자니 어쩔 수 없이 선생님 생각이 났다. 육상을 권유한 사람도 선생님이었고, 육상을 그만두던 날에 내 옆에 있었던 사람도 그였다. 선생님은 내게 왜 플로리다를 주셨나. 내가 그에게 그렇게 나쁘게 굴었는데도.
발목이 회복될 수 없을 거란 말을 들었을 때, 내 인생도 회복될 수 없으리라 여겼다. 그건 허리가 잘려 나간 나무가 다시 자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플로리다, 플로리다. 머나먼 미국의 뜨거운 땅. 플로리다, 플로리다. 태양을 연상시키는 이름. 계속 중얼거렸다. 플로리다, 플로리다. 왜 사랑은 돌려받을 수 없는 걸까.
처방을 마친 의사가 플로리다를 ‘큐어링 존’이라는 라벨이 붙은 유리 상자에 집어넣고 진료실을 나갔다. 조명에서 나오는 파란빛이 플로리다 위로 쏟아졌다.
유리판에 이마를 댔다. 얇은 유리 너머로 옅은 빛이 일렁였다. ‘선’이라는 네임스티커가 붙은 화분이 보였다. 플로리다는 유리 안에서 편안해 보였다. 여전히 시들고 볼품없는 모양새였지만, 어쩐지 안심이 됐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고등학교의 일도, 선생님과의 관계도, 발목의 부상도. 왜인지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