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장내미생물 연구는 배양 배지로 단일 미생물을 분리하거나 현미경으로 미생물을 직접 관찰하는 식으로 이뤄졌습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차세대 염기서열분석법(NGS)이 발전하면서, 장 속 모든 미생물의 유전체 염기서열 정보를 한 번에 해독해 생물정보학(Bioinformatics)적 방법으로 분석하는 방식이 장내미생물 연구의 주류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를 메타지노믹스(metagenomics)라고 부릅니다.
몸속 존재하는 장내미생물 최대 3000종
장내미생물은 위, 소장 대장 등 인체의 장관에 서식하는 미생물을 총칭하며 장내미생물에는 세균, 고세균, 곰팡이류, 바이러스 등이 포함됩니다. 사람 한 명의 몸속에 존재하는 장내미생물은 약 300~3000종으로 추정되며, 건조된 인간 분변의 약 약 60%가 장내미생물일 정도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때문에 한 명의 인간은 10만 개의 개인 유전자와 60만~500만 개의 장내미생물 유전자가 통합된 유기체라고 볼 수 있죠.
지난 수만 년간 몸속 장내미생물은 숙주인 인류와 함께 진화해왔습니다. 인간은 장내미생물에게 정착할 수 있는 환경(숙주 자신의 장관)과 먹이(숙주가 섭취하는 음식)를 제공하고, 장내미생물은 인간의 면역 발달과 병원균 방어, 생체 항상성(질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에 도움을 주는 공생관계를 유지해왔죠.
뿐만 아니라 장내미생물은 인체가 분해하지 못하는 여러 물질을 분해해 흡수 가능한 형태로 제공함으로써 인간의 에너지 활용을 돕습니다. 인체는 채소, 과일, 곡물 등에 포함된 펙틴, 베타글루칸 등의 식이섬유를 분해할 수 없고 에너지원으로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장내미생물은 식이섬유 같은 미생물 접근가능 탄수화물(MACs)들을 분해, 대사시켜서 숙주가 이용할 수 있는 단쇄지방산(SCFAs)으로 만듭니다. 수만 년 동안 원시인류는 수렵 채집 생활로 자연에서 얻는 다양한 식물들을 날것으로 섭취했기에 이를 에너지로 바꾸는 장내미생물은 꼭 필요한 공생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장내미생물 균형 깨지면 질병 발생해
단쇄지방산은 인체 내에서 에너지원으로 직접 쓰이기도 하지만, 그 밖에도 장점막세포의 발달과 분화, 면역 조절 T세포 생산, 염증 조절, 세로토닌 등 호르몬 생산과 같은 여러 생명 현상에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문제는 수만 년간 지속된 인류의 식생활이 산업화를 거치며 불과 200년 만에 급변했다는 점입니다. 정제, 가공된 식품(설탕, 밀가루 등) 위주의 식단과 항생제 과용은 단쇄지방산을 생산하는 미생물의 불균형을 초래했으며 오늘날 당뇨병, 비만 같은 만성대사질환이나 뇌질환이 증가하는 현상은 이런 불균형과 관련이 깊습니다. 장내미생물 균형이 깨지면 염증성 장질환(IBD), 과민성장증후군 등의 장관질환뿐만 아니라 알레르기, 아토피 등의 면역질환이 발생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때문에 다양한 바이오 기업에서 장내미생물로 질병을 진단, 치료하는 방법을 개발 중입니다. 개인의 장내미생물 정보를 제공하는 마이비옴(myBiome), 장내미생물을 이용해 건강 점수를 매겨주는 비옴(VIOME) 등이 대표적입니다.
미국에 본사를 둔 장내미생물 신약개발사 베단타 바이오사이언스와 세컨드 게놈은 염증성 장질환, 대사면역질환의 치료제나 치료법을 개발 중입니다. 또한 미국의 장내미생물 전문기업인 세레스 테라퓨틱스는 클로스트리디움 디피실 감염증(CDI) 치료제 개발에 집중해, 2023년 4월엔 CDI 치료제인 보우스트가 장내미생물 신약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획득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장내미생물을 이용한 치료제 개발이 더욱 가속화되면서 한국에서도 CJ 바이오사이언스, 유한양행 등 여러 제약사와 전문기업들이 장내미생물을 이용한 의약품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장내미생물 기반 맞춤형 의료 가능하려면
2015년 이스라엘 와이즈만연구소의 에란 세갈 박사팀은 당뇨병 환자의 건강정보, 식생활 설문정보 등을 장내미생물 정보와 통합 분석하고, 이를 기준으로 식단 추천을 할 때 혈당 개선율이 70%에 이른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는 일반적인 당뇨 환자식을 추천할 때의 수치인 40%를 크게 상회합니다.
또한 2018년엔 면역세포가 암세포를 인지하게 만들어서 면역 반응으로 암을 치료하는 약물인 면역관문억제제의 항암 효과가 장내미생물 구성에 따라 바뀐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습니다. 장내미생물과 면역관문억제제를 혼합해 투여하는 것이 흑색종의 크기를 유의미하게 축소했음을 증명한 논문이 ‘사이언스’에 실렸습니다. doi: 10.1126/science.aan4236
이 두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장내미생물 연구는 기존의 진단이나 치료제 개발에서 개인의 건강을 위한 맞춤형 식단 추천이나 항암 치료의 효과 예측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런 추세는 정밀의료 트렌드와 결합해 더 정확한 맞춤 치료 및 맞춤 건강 관리 기술을 가능케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러려면 장내미생물 데이터베이스 구축이 급선무입니다. 장내미생물 구성은 인간의 유전자, 사는 곳, 나이, 식습관 등 여러 요소의 영향을 받습니다. 즉 유의미한 결과를 얻으려면 인구 집단에서 다수의 표본을 뽑아 각 개인의 의료 정보, 식습관 정보와 장내미생물 정보를 연계 분석해야 합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선 최대 수만 명에 이르는 자국민의 장내미생물-건강 정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인공지능(AI)과 머신러닝으로 분석하고, 그 결과를 적용해 개인별 혹은 장내미생물 유형별 맞춤 활용 기술을 개발 중입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장내미생물 데이터베이스의 양적 확대가 시급합니다.
제가 속한 한국식품연구원은 한국인의 장내미생물이 어떻게 구성됐고, 한국인의 식습관 및 건강 상태와 장내미생물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2025년까지 한국인 약 1만 명의 장내미생물-건강 정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이를 머신러닝으로 분석하는 연구를 진행 중입니다. 또 최근엔 장내미생물과 구강미생물 정보를 이용해 사망률이 높은 비소세포폐암을 정밀하게 진단하는 기술을 개발해 국가과학기술 우수성과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장내미생물을 활용한 정밀의료와 맞춤 헬스케어 분야는 앞으로 더 커질 전망입니다. 일반 연구자뿐만 아니라 정부 부처와 의약계의 관심도 더욱 커지고 있음을 연구 현장에서 체감 중이며, 새로운 연구들도 매일 발표되고 있습니다. AI와 머신러닝 기술이 발전하며 양질의 데이터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해진 때입니다. 한국인의 건강을 위한 장내미생물 정보 확보와 이를 활용한 기술 개발을 위해 계속해서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