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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후, 과학은] 인체의 면역을 이용해 암까지 치료하는 면역관문억제제

내 몸의 면역력으로 암을 치료한다는 개념의 시작은 18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미국 뉴욕의 외과의사 윌리엄 콜리는 육종이라는 암을 앓던 환자들 중 급성 세균감염을 겪은 이들의 암 덩어리가 서서히 줄어드는 현상을 관찰합니다. 이후 콜리는 세균 혼합물로 ‘콜리 톡신’을 만들어서 암환자를 치료했죠. 이것이 최초의 면역기반 항암치료입니다. 하지만 이후 방사선 치료, 세포독성 항암치료제 등이 개발되면서 면역을 이용한 항암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면역항암이란 발상이 겪어온 시행착오들

 

그렇게 잊힌 면역항암제 개념을 미국 국립암연구소의 스티븐 로젠버그 박사가 다시 꺼냈습니다. 1980년경 로젠버그 박사팀은 환자의 피에서 면역세포인 T세포를 빼낸 다음, 이 세포를 활성화시켜 다시 환자 본인에게 주입하는 치료를 고안했습니다. 이렇게 몸 밖에서 활성화된 면역세포가 LAK세포(Lymphokine-Activated Killer cell)입니다. 1985년엔 이 치료법이 일부 피부암, 신장암 환자에게 유효함이 보고됐습니다. 활성화된 면역세포가 암세포를 죽인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죠.

 

하지만 당시엔 B세포, T세포의 개념 같은 면역학의 기본 원리도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 탓에 LAK세포를 쓴 암 면역치료는 부작용이 컸고 효과가 없는 환자도 많았습니다.

 

돌파구는 비슷한 때에 미국 텍사스와 일본 교토에서 우연히 열렸습니다. 앨리슨 교수는 CTLA-4라는 면역물질을 없애면 갑자기 T세포가 활성화돼 내 몸을 공격하며 자가면역질환이 생기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혼조 교수는 PD-1 면역물질을 찾았는데, 이 물질을 없애면 역시 자가면역질환이 생겼습니다. 이들은 두 물질이 면역세포 활동을 조절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처음에 이 면역물질들은 자가면역질환의 치료에 이용될 뻔했습니다. 하지만 혼조 교수는 PD-1 기능을 차단한 생쥐에서 종양 성장이 정상 생쥐보다 느려지는 현상을 관찰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이 면역물질이 암 치료에 이용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면역항암제의 탄생 가능성을 확인한 순간이었죠.

 

암세포의 속임수를 분쇄한 면역관문억제제

암은 기본적으로 DNA의 변화나 돌연변이 때문에 세포가 비정상적으로 성장하거나 분열해서 생기는 유전적 질병입니다. 암유전자에 이상이 생기면, 정상세포가 암세포로 돌변합니다. 그러면 암세포는 정상세포와 달리 조절 인자들과 무관하게 스스로 자라서 죽어야 할 때가 돼도 죽지 않고, 혈관을 만들어 영양분을 빨아들이며 계속 분열합니다. 완전히 다른 세포가 되죠.

 

면역세포 활성화를 제어하는 ‘브레이크’인 CTLA-4와 PD-1을 지금은 면역관문(immune checkpoint)이라고 부릅니다. 이 물질은 암의 진행에서 중요합니다. 암세포는 본래의 세포, 즉 나 자신과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에, 면역세포가 암세포를 비자기(non-self)로 인지해서 제거해야합니다. 하지만 암세포는 면역세포를 속이는 수단이 있습니다. 암세포가 면역회피물질인 PD-L1을 내보내면 T세포의 PD-1과 반응해서, T세포가 암세포를 인지하지 못합니다. 원래는 면역세포가 활성화돼야하는데, T세포의 PD-1이 브레이크를 겁니다. 결국 T세포는 암세포를 보고도 제거하지 않습니다. 도둑을 보고도 지나치는 경찰 같죠.

 

면역치료의 일종인 면역관문억제제는 면역세포가 암세포를 인지하게 만드는 약입니다. 면역관문억제제를 쓰면 면역억제물질 PD-1이 차단됩니다. 따라서 T세포가 다시 활성화돼 암세포를 인지, 제거하죠. 말 그대로 ‘면역관문’을 ‘억제’하는 약입니다.

 

지금은 이 면역관문억제제의 개념이 아주 당연합니다. 하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CTLA-4나 PD-1을 억제해 암을 치료하는 개념은 철저히 외면당했습니다. 2000년대 초 학회의 종양면역학 발표장은 썰렁했습니다. 텅 빈 발표장에서 발표자와 좌장 몇 명만 돌아가며 발표하거나 들었죠. 당시 주목받던 분자표적항암제 발표장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LAK세포치료마저 벽에 부딪히자 면역항암제는 성공할 수 없다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혼조 교수는 PD-1을 차단하는 약을 개발하고자 특허 출원을 요청했지만 대학, 동료들, 제약회사 등이 모두 거부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오노약품이라는 작은 제약회사가 그와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특허 출원을 도왔는데, 이 특허를 바이오기업인 메다렉스와 제약기업인 BMS가 인수해 본격적으로 신약개발에 착수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지금의 니볼루맙(nivolumab, 상품명 옵디보)이라는 약이 등장했죠.

 

이후 CTLA-4 억제제 이필리무맙(ipilimumab, 상품명 여보이), PD-1 억제제 펨브롤리주맙(pembrolizumab, 상품명 키트루다), PD-L1 억제제 아테졸리주맙(atezolizumab, 상품명 티쎈트릭) 등 수많은 면역관문억제제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젠 면역항암제를 다루지 않는 학회가 없을 정도입니다.

 

암도 만성질환처럼 관리하며 살 수 있는 미래 올 것

면역관문억제제는 기존 세포독성항암제보다 장점이 많습니다. 우선 부작용이 현저히 적습니다. 간혹 면역력이 너무 올라가 자가면역질환이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기존 항암제의 부작용에 비하면 매우 적습니다. 면역관문억제제 치료를 받는 분들은 직장을 다니고 여행도 하며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약이 한번 잘 들으면 내성이 생길 가능성도 낮습니다. 암세포를 제거하도록 학습된 메모리 면역세포들이 수년 간 몸속에 남아 효과가 지속됩니다. 면역관문억제제로 치료받으며 발병 이후에도 5년, 10년 이상 사는 환자들이 나오는 중입니다.

 

물론 면역관문억제제도 어두운 면이 있습니다. 효과를 보이는 환자가 전체의 20~30%입니다. 어떤 암은 이 약이 전혀 효과가 없습니다. 또한 면역관문억제제의 효과가 좋은 환자의 특성이 정확히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가격도 문제입니다. 1회 투약 비용이 수백만 원이어서 치료받지 못하는 환자들도 있습니다.

 

이런 한계에도 면역관문억제제는 암 치료의 역사를 바꾼 단연 획기적인 항암제입니다. 실험실에서 기초의학 소견을 토대로 후보 물질을 찾아내고, 임상시험을 거쳐 상용화까지 성공한 대표 사례죠. 입원하지 않고서도 면역관문억제제 치료를 받으며 문제 없이 일상 생활을 하는 암 환자 분들을 자주 봅니다.

 

한국의 연구와 임상시험의 수준은 세계적인 수준까지 높아졌습니다. 앞으로 종양학, 면역학, 의료정보학 등의 다양한 분야가 융합돼 새로운 면역항암제와 맞춤형 치료 기술이 개발될 것이라는 희망도 현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페니실린 발명 이후 여러 항생제가 등장하면서 인류는 많은 감염병을 정복했죠. 면역관문억제제로 대표되는 면역항암제도 이런 발전 과정을 거치며 앞으로 더 많은 생명을 살릴 겁니다. 암을 효과적으로 제어하는 면역항암제로 암도 당뇨나 고혈압처럼 관리하며 살아가는 만성질환에 더 가까워지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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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김범석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임상교수
  • 도움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글로벌R&D분석센터
  • 에디터

    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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