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할 나이가 지난 A 가족 장남 아모레가 가족들과 점점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가족들로부터 빨리 떠나라는 재촉이라도 받은 걸까. 밤에는 잠도 혼자 잔다. 나도 장녀로서 그가 느낄 설움(?)이 남의 일 같지 않다. 너의 독립을 응원해, 아모레!”
-2020년 2월 17일, 필드에서 작성한 일기 중 발췌-
인간이 부모에게서 독립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나라마다 다르지만 한국의 경우엔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나이가 40대 초반까지 늦춰졌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그렇다면 비인간 영장류에서도 이와 유사한 경우가 있지 않을까? 내 연구 장소인 인도네시아 할리문 국립공원에 바로 그런 사례가 있었다. 야생 자바긴팔원숭이 A 가족 장남 아모레가 그 주인공이다.
관찰 당시 10살 정도로 추정되던 아모레는 통상 학계에 보고된 긴팔원숭이 독립 나이(8살 이후)가 지났음에도 태어난 가족 그룹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족과 하루를 함께 보내는 것은 또 아니었다. 하루에 19시간 이상 혼자서 숲을 누비며 먹고 쉬었다. 나와 우리 야생 자바긴팔원숭이 연구팀원들은 아모레의 독립이 지연되는 이유를 다양하게 생각해봤다. 독립한 후 이민을 갈 적당한 주변 그룹을 못 찾은 걸까? 이민을 시도했지만 적응을 못하고 그 그룹에서 거절당한 걸까? 기존 그룹의 경쟁이 심하지 않아서 독립하지 않아도 생존에 큰 지장이 없는 걸까? 여러 가능성이 제기됐다.
아직 명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독립이 지연되는 현상이 아모레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 태국 카오야이 국립공원에 서식하는 흰손긴팔원숭이 중 수컷 세 마리는 각각 8.5살, 9.8살, 14.9살에 독립을 했다. 인간의 독립 시기가 늦어지는 데 다양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긴팔원숭이의 독립이 지연되는 비밀을 파헤치려면 좀 더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눈치보는 게 아니라 배우는 중입니다
영장류는 일반적으로 청소년기를 거쳐 성체가 되면 독립한다. 수컷과 암컷의 독립 양상이 종마다 다를 수 있으나, 근친 교배 위험을 낮추고 먹이 경쟁의 과열을 피하기 위해 대체로 다른 그룹으로 이민을 간다.
영장류의 독립과 이민은 큰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자신이 태어난 그룹에서 얻은 정보, 서열, 사회적 관계들을 포기하고 새 그룹에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민을 단행한 개체는 새 그룹의 개체들에게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마치 전학생이 새로운 학교의 분위기와 앞으로 친하게 지낼 친구에 대해 알아가기 바쁜 것처럼, 새로운 그룹에서 어떤 개체가 사회적 서열이 높은지, 누구와 친해져야 할지 등 생존을 위한 정보를 민감하게 습득한다. 이를 순응 학습이라고 한다.
순응학습에 관한 대표적인 연구는 2013년 4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게재된 남아프리카 야생 버빗원숭이 연구다. 야생 영장류를 대상으로 하는 실험에서 순응 학습의 역할을 보여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2022년에 이 논문의 제1저자인 에리카 반 드발 교수의 연구실에서 연구하며 당시의 현장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반 드발 교수팀은 네 그룹의 야생 버빗원숭이, 총 109 개체를 대상으로 사회적 학습과 문화 전파 실험을 진행했다. 먼저 사전 설정으로 두 그룹(앵커스, 바이당키)에게는 맛있는 분홍 팝콘과 알로에 잎에 적셔 쓴 맛을 더한 파랑 팝콘을 3개월 동안 주고, 다른 두 그룹(레몬트리, 노하)에게는 반대로 맛있는 파랑 팝콘과 쓴 맛이 나는 분홍 팝콘을 3개월 동안 제공했다. 그 결과, 앵커스와 바이당키 그룹은 분홍 팝콘만, 레몬트리와 노하 그룹은 파랑 팝콘만 먹는 확고한 선호를 갖게 됐다. 이런 상태에서 연구진은 네 그룹에 맛있는 분홍 팝콘과 맛있는 파랑 팝콘을 제공했다. 두 색깔 모두 맛있기 때문에 굳이 특정 색의 팝콘을 고를 필요가 없는데도 각 그룹은 선호하는 팝콘 색을 바꾸지 않았다. 서열이 낮은 일부 개체들만이, 그것도 기존에 선호했던 색깔의 팝콘에 접근하기 어려울 때만 선호를 바꿨다.
이후 연구팀은 두 가지 실험을 진행했다. 첫 번째 실험은 두 가지 색깔의 팝콘맛을 모르는 미성숙 개체들이 누구를 따라 어떤 팝콘을 먹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미성숙한 야생 버빗원숭이 27개체에게 두 가지 팝콘을 제공한 결과, 26개체는 엄마가 먹는 팝콘을 똑같이 따라서 먹었다. 다른 색 팝콘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이다. 엄마가 주변에 없을 때도 결과는 같았다. 여기서 연구팀은 불확실한 정보를 가진 미성숙한 개체들이 사회적인 학습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엄마가 분홍색 팝콘을 먹더라도, 호기심으로 파랑색 팝콘을 한번쯤은 먹을 법하지만 이는 위험부담이 따른다. 이럴 땐 ‘분홍색 팝콘은 먹는 데 문제가 없고 선호되는 음식이다’라는 사회적 정보를 이용하는 쪽이 생존에 훨씬 유리함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미 팝콘에 대한 정보를 가진 성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연구팀은 두 번째 실험으로 분홍색 팝콘을 선호한 앵커스와 바이당키 그룹의 수컷 성체들을 파랑색 팝콘을 선호하는 레몬트리와 노하 그룹으로 이민시켰다. 그리고 반대로 레몬트리와 노하 그룹에서도 앵커스와 바이당키 그룹으로 이동하게 했다. 그렇게 총 10마리의 수컷 성체를 관찰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이민을 떠난 10마리 중 7마리가 출신 그룹이 선호하던 것과 정반대 색깔의 팝콘을 거리낌없이 먹었다. 새로운 환경에 맞춰 선호하는 팝콘 색을 바꾼 것이다. 이 실험 결과는 앞선 미성숙 개체들의 실험 결과보다 더 중요하다. 이민을 간 수컷 성체들이 그동안 보유했던 정보를 버리고 새로운 그룹 내 다수의 선택을 따랐으므로, 개인적인 정보보다 사회적으로 학습한 정보의 영향이 더 강력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순응 vs. 전파, 당신의 선택은?
순응 학습은 우리 인간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하다못해 순대를 어떤 양념에 찍어 먹는가도 지역별 순응 학습의 결과물일 수 있다. 나는 인천과 서울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순대를 고춧가루와 후추가 섞인 소금에 찍어 드시는 부모님을 보며 자랐다. 고추장이나 쌈장 같은 다른 양념도 있었지만 부모님이 아무 고민 없이 소금을 택하셔서 맛있다는 보장이 있었기에 바로 학습했다. 지난 2월호에서 소개한 청소년기의 사회적 학습과도 연결되는 내용이다. 당시엔 소금 외에 순대와 어울리는 양념을 잘 몰랐던 탓에 나보다 많은 정보를 가졌을 확률이 높은 부모님을 그대로 따라하는, 관찰을 통한 사회적 학습 전략을 택한 것이다.
그런데 성인이 된 후 부산에 놀러갔다가 그곳 사람들이 순대를 소금이 아닌 쌈장에 찍어 먹는 모습을 봤다. 그때부터 나는 부산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계속 순대를 쌈장과 먹었다. 부산에선 부산 사람들에게 얻은 정보를 사용해 먹는 것이 더 맛있다고 예측했기 때문이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새로운 환경에 놓였을 때 그 환경에 적응한 다수의 선택에 순응하는 사회적 학습을 하는 것이 위험은 줄이고 생존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물론 순응 학습을 하지 않고 부산에 있는 친구들에게 순대를 소금에 찍어 먹는 것이 더 맛있다는 걸 전파할 수도 있다. 실제로 비인간 영장류에서도 그런 사례가 있다. 가령 새 그룹으로 이민 온 야생 암컷 침팬지가 견과류를 부수는 자신만의 기술을 새 그룹에 전파한 사례가 있고, 또 다른 사례에서는 이민 온 암컷 침팬지가 새 그룹의 개체들이 처음 보는 개미 낚시 기술을 전파한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새로운 그룹의 개체들이 적대적일 수 있기 때문에 위험부담이 상대적으로 크다. 그런 탓에 인기 있는 방법은 아니다. 하지만 야생 비인간 영장류의 순응 학습 연구는 이제 막 시작이다. 어떤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지 모른다. 독자 여러분들도 마음껏 추측하고 상상해보시라.
※ 이세인
이화여대 행동생태연구실 영장류 연구팀 소속으로 현재 스위스 로잔대 방문 연구원으로 머물며 영장류 인지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seinlee2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