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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혹은 거짓, 멘델은 완두콩으로 무슨 일을 했을까?

이지 사이언스

‘그레고어 멘델’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최초의 유전학자? 완두콩? 동시대인에게 잊혀진 천재? 2022년, 멘델 탄생 200주년을 맞아 멘델의 생애를 다시 돌아봤다. 멘델에 관해 우리가 오해하던 사실은 없을까?

 

의혹1. 멘델은 유전법칙을 찾기 위해 실험했다?

 

교과서는 멘델이 유전 현상을 연구하기 위해 체코 브르노의 수도원에서 완두콩을 키우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완두콩에서 쉽게 구분되는 콩의 색깔(초록과 노랑), 콩 껍질의 생김새(매끄러운 형태와 주름 잡힌 형태) 등 7가지의 특성을 선택한 후, 이 특성들이 어떻게 유전되는지 교배 실험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우열의 법칙’ ‘분리의 법칙’ ‘독립의 법칙’이라는 세 가지 유전법칙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멘델은 ‘유전법칙’을 직접 발표한 적이 없다. 우선, 1866년에 멘델이 완두콩 실험의 결과를 발표한 논문 ‘식물 잡종에 관한 실험’에는 유전법칙에 관한 언급이 없다. 부산대 교양교육원에서 과학사를 연구하는 현재환 교수는 “멘델을 유전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만든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멘델이 완두콩을 키운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의 과학사학자들은 멘델이 이종교배를 연구하기 위해 완두콩을 키웠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종교배는 서로 다른 종을 교배하는 것으로, 신품종을 만드는 육종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오래부터 중요한 연구 대상이었다. 수컷 당나귀와 암컷 말의 잡종인 노새처럼, 두 종의 장점만 모은 훌륭한 잡종을 만들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체코의 역사학자이자 유전학자인 비체슬라프 오렐은 멘델이 살던 모라바 지방은 산업이 융성하던 곳이었고, 멘델의 수도원에서도 산업에 도움이 되 는 응용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멘델은 여러 육종학자에게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그는 완두콩 실험 이전 작물 병해충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으며, 지역신문에는 멘델의 육종 연구 이야기가 실리기도 했다. doi.org/10.1038/s41588-022-01109-9 즉 멘델은 육종 전문가로서 더 훌륭한 품종을 만들고 이종교배의 법칙을 찾기 위해 완두콩 실험을 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멘델의 유전법칙’은 육종학자 멘델의 연구 결과를 현대인이 재구성한 결과에 가까운 것이다.

 

 

의혹2.멘델의 완두콩 실험은 조작된 것이다?

 

멘델을 둘러싼 또 한 가지 논란은 멘델의 완두콩 실험 자료가 조작되었다는 의혹이다. 멘델은 두 식물이 가지고 있는 형질이 잡종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서로 다른 형질을 가진 두 개체를 교배했다. 이 중 하나가 초록 콩과 노랑콩을 교배하여 태어난 잡종 1세대의 콩이 모두 노란색임을 확인한 후, 잡종 1세대 식물끼리 다시 교배하여 잡종 2세대 식물을 만는 실험이다. 멘델은 이어 잡종 2세대 식물에서 열린 완두콩의 색깔을 구분한 다 음 노란 콩과 초록 콩의 갯수를 세 그 비율이 3:1임을 확인했다.

 

멘델은 약 8년 동안 2만 8000포기에 달 하는 완두콩을 재배하며 나온 자료를 ‘식물 잡종에 관한 실험’에 실었다. 그러나 멘델의 실험 자료가 조작된 것이라는 의혹은 이미 20세기 초부터 꾸준히 등장했다. 의혹의 요지는 멘델이 완두콩을 세어 정리한 수치가 멘델의 이론과 너무 잘 맞아떨어진다는 것.

 

이를 주장한 가장 유명한 과학자는 영국의 통계학자인 로널드 피셔다. 그는 멘델의 실험을 통계학적으로 조사한 후 멘델이 구한 숫자에 도달할 확률은 3만 분의 1에 불과하다고 결론 내렸다. 1936년 피셔의 의견이 한 잡지에 실린 이후 멘델의 데이터 조작은 유전학자와 통계학자들 사이에서 잊을 만하면 끊임없이 나오는 논쟁 주제로 떠올랐다.

 

심지어 멘델의 실험 결과는 그 이전부터 실험으로 반증되기도 했다. 1902년 영국의 생물학자인 월터 프랭크 라파엘 웰던은 멘델의 잡종 완두콩 연구를 다시 실험한 결과, 결과가멘델이 예측한 대로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했다. 녹색과 황색이 섞인 완두콩이나, 껍데기가 조금만 주름잡힌 완두콩이 발견된 것이다.

 

현대의 과학사학자들은 충분한 사료와 증거가 남아 있지않아 데이터 조작의 고의성은 알 수 없지만, 멘델의 이론은 맞았다고 결론짓는다. 웰던은 멘델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실험 결과를 해석하면서 완두콩을 두 가지로만 분류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 썼다. 피셔 본인도 멘델의 결과가 행운이거나 무의식적으로 오차 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했을 것이라 여겼다. 결국 멘델이 의도적으로 데이터를 조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는(그리고 아마 아닐 거라는) 뜻이다.

의혹3. 멘델은 재발견된 유전학의 선구자다?

 

멘델의 논문은 거의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은 채 묻혔고, 수도원장으로 일하던 멘델은 188 4년에 신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약 20년이 지난 20세기 초, 네덜란드의 휘호 더프리스, 독일의 카를 빌헬름 코렌스, 오스트리아의 에리히 폰 체르마크가 각각 멘델의 업적을 재발견하며 유전학의 선구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과연 얼마나 정확할까?

 

우선 멘델의 연구는 잊히지 않았다. 멘델은 당대 이종교배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 인사였으며, 카를 네겔리 같은 저명한 과학자 를 포함한 많은 연구자가 멘델과 서신을 교환했다. 멘델 본인도 자신의 논문을 다른 연구자들에게 보내면서 자신의 연구를 홍보했다. 그 결과, 1902년이 되기 전까지 최소 20명의 연구자가 자신의 연구에 멘델을 인용했다.

 

현대 유전학이라는 학문은 20세기 초 멘델을 재발견한 연구자 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타당하다. 이들은 실제로 유전 현상을 연구하던 사람이었으며, 그래서 멘델의 연구에서 유전법칙을 읽어낼 수 있었다. 즉 더프리스, 코렌스, 체르마크는 멘델의 육종학 연구의 의미를 유전학적으로 새롭게 해석할 수 있었고, 이들이 (멘델도 모르는 사이에) 멘델을 유전학의 시작으로 선언한 셈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유전학 에서 멘델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우선 멘델은 유전 연구에 통계학이라는 수학적 방법을 도입해 유전을 체계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현상으로 만들었다. 실험 대상으로 선택한 완두콩도 후배 유전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초파리로 유전을 실험한 토머스 헌트 모건, 옥수수에서 이동 유전자를 발견한 바바라 매클린톡 등, 멘델 이후 거의 모든 후배 유전학자들은 하나의 모델 생물을 정한 후 실험을 통해 유전 현상을 검증하는 멘델의 방법을 따랐다.

 

현 교수는 “멘델은 유전이라는 현상을 측정하고 탐구할 수 있는 실험 문화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멘델이 유전학의 시대를 열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실험을 한 것은 아니었으나, 결국은 이후의 유전학자들이 사용하는 실험 방법을 정의하며 유전학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만들었다는 의미다.

 

육종학자 멘델, 많은 연구자와 활발히 교류한 멘델, 의도치않게 현대 유전학의 실험 방법을 만든 멘델…. 아르헨티나의 작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영광이란 일종의 몰이해에 불과하며, 아마 최악의 몰이해일는지도 모른다”라는 문장을 남긴 바 있다. 지금도 과학사학자들은 역사적 증거를 분석하며 교과서나 위인전과는 다른 모습의 멘델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어쩌면 이때까지 덧씌워진 영광의 도금 칠을 벗겨내고 멘델의 생각과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탄생 200주년을 기리기에 적절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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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이창욱 기자
  • 일러스트

    김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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