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호기심을 버무린 SF소설을 쓰는 작가. 포근한 인상과 대비되는 큰 체격이 인상적인 작가. 곽재식 작가를 8월 1일 서울 북촌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곽 작가의 모습에서 따뜻한 이야기를 담는 그의 SF소설 속 화자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교수 겸 작가이자 최근에는 방송인으로도 활동하는 그는 몸이 3개인마냥 밀도 높은 삶을 산다.
다작 작가의 긴 무명시절
곽 작가는 16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며 책을 30권 이상 냈을 정도로 하루를 열흘처럼 바쁘게 산다. SF소설계에서, 6개월에 단편 4개를 쓰는 것을 ‘곽재식 속도’라는 단위로 만들어 표현할 정도이니.
그를 유명하게 만든 건 SF소설이다. 직원 넷에 우주선 하나짜리 작은 회사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다룬 ‘은하수 풍경의 효과적 공유’, 기발한 발상으로 첨단 과학 기술에 상상을 더한 SF 단편모음집 ‘토끼의 아리아’ 등 숱한 소설집을 발표했다.
논픽션 작품도 많다. 달나라 여행 가이드북인 ‘그래서 우리는 달에 간다’, 인공지능의 역사와 신기술의 쟁점을 다룬 ‘로봇 공화국에서 살아남는 법’, 현대 과학을 이끈 여성 과학자들의 이야기 ‘우리가 과학을 사랑하는 법’ 등이 대표적이다. 곽 작가는 진지하고 정교한 글을 쓰면서, 그의 독특한 개성이 돋보이는 책도 내 왔다. 한반도 괴물 282종의 목록과 활약상을 정리한 ‘한국 괴물 백과’는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든다.
그의 본업은 연구자다. KAIST 원자력및양자공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화학을 전공한 뒤 연세대에서 기술정책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LG화학, 사우디아라비아 기초산업공사 등 화학 회사에서 일하던 곽 작가는 2022년부터 숭실사이버대 환경안전공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곽 작가는 2006년부터 ‘제2의 직업이다’라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소설을 써왔다. 회사를 마치고 집에 온 저녁에는 적어도 한두 시간씩 매일 소설을 썼다. ‘여기까지 끝내야지’라는 마음이 멈추지 못하고 이어져 밤을 샌 적도 있다. 그렇게 열심히 했지만, 원고료 몇십만 원 수준의 단편 소설 1~2편이 1년 일감의 전부였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2012년 무렵에는 ‘문학계를 떠나자’라는 생각도 했다.
그는 “작가로 활동하다 보면 ‘세상이 내 글을 몰라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며 털털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갑자기 이걸 쓰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떠오르면 어떻게 할 거야’ 하는 마음에 글쓰기를 놓지 않았다.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글을 쓴 게 오히려 글쓰기를 그만두지 않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안전장치가 하나 있으니까 계속 (글쓰기를) 오래 끌고 갈 수가 있었어요.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일이라면, 생계를 유지할 방편을 들고 가면서 꾸준히, 틈틈이 준비하면서 기회를 노려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곽 작가는 “물론 모든 사람한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어 그는 “뭐든지 오래 버티면 크게 성공은 못 해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는 것 같다”고 말했다.
논문 검색하던 습관으로 소설 소재 찾아
연구자라는 ‘본캐’는 의의로 소설가라는 ‘부캐’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소설의 소재를 찾을 때 그는 “참신한 답이 나올 때까지 깊게 검색한다”고 말했다. 곽 작가는 “과학 쪽 일을 해오면서, 논문을 찾아본다는 데에 두려움은 딱히 없었다. 전혀 다른 분야에도 두려움 없이 접근했다”고 했다. 처음 읽어본 논문의 30%만 이해해도 그 안에서 재밌는 이야깃거리를 찾을 수 있다면서.
“예를 들어 ‘모기가 어떤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물까?’하는 생각은 해볼 만하잖아요. 그런데 혈액형하고 별 상관이 없다는 실험 결과를 쉽게 찾아볼 수 있어요. 한 발 더 나아가서 일반적인 모기의 습성을 찾아보는 거예요.”
곽 작가는 지하에 사는 모기와 지상에 사는 모기가 서로 다른 종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내용의 논문을 찾았다. 논문을 보니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지상 생태계와는 다른 희한한 모기들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 땅속에서 진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잖아요. 이런 게 소설의 소재가 될 수도 있는 거죠.”
곽 작가는 최근까지도 탄탄한 과학적 토대를 기반으로 ‘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 등 단편 SF 소설집을 냈다. 연구하듯 소설의 소재를 찾는 곽 작가는 SF소설로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걸까. 그는 “나와 아무 상관없는 상상 속의 인물 이야기라도, 읽고 나면 ‘주인공이 잘 돼서 정말 다행이다’와 같은 마음이 들게 하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밝혔다. 소설을 읽고 자기 일처럼 응원하게 되는 것, 독자의 좋은 마음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이 소설이 해낼 수 있는 귀한 가치라는 생각에서다.
교수이자 SF소설가이자 방송인으로 몸이 3개인 현대 괴물(?)의 삶을 사는 곽재식 작가. 그는 다양한 도전을 즐겨 왔다. 2016년에는 ‘140자 소설’이라는 아주 짧은 단편소설집을 냈다. 트위터에 부계정을 만들어서 소설을 올렸는데, 그중 가장 많은 리트윗을 기록한 99편을 소설집으로 만들었다. 이 소설은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다양한 매체 발전의 예시로 실렸다. 그는 청소년 SF소설 지망생들에게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것, 보여주고 싶은 것이 뭘까 생각하면서 과감하게 도전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신라 시대 해적들이 펼치는 모험담
그의 새로운 도전은 모험처럼 또 시작됐다. 곽 작가는 SF와는 또 다른 매력의 해적 모험담을 쓰고 싶다고 했다. “한반도에 해적들이 많았던 시기가 있었어요. 바로 신라 시대 말인데요. 우리나라가 ‘왜구’라고 했던 것처럼, 일본에서는 ‘한구가 침입해서 난리 났다’라는 일본 기록이 있어요.”
이런 발상이 이어진 끝에 그는 정은경 작가와 협업해 청소년 판타지 소설을 쓰게 됐다. 이번 8월을 시작으로 신라시대 해적과 역사서 속에 등장하는 괴물을 소재로 한 모험극인 ‘곽재식 크리처스, 신라괴물해적전’ 시리즈를 출간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