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오타쿠(덕후)라서 하는 말입니다만 ‘오타쿠’의 사전적 정의는 조금 속상한 데가 있습니다. 우리말샘에 따르면 오타쿠는 ‘한 분야에 지나치게 집중하거나 집착하는 사람 또는 특정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지닌 사람’을 뜻합니다.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이라뇨. 뭔가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하지만 두 번째 뜻은 마음에 듭니다. 특정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지닌 사람. 이게 맞죠. 여러분이 살면서 어떤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예를 들어 컴퓨터를 사야 하거나, 집에서 키우는 화분이 시들할 때 누구를 찾으실 건가요. 당연히 덕후입니다. 컴덕(컴퓨터 덕후)과 식덕(식물 덕후)이 기다렸다는 듯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겁니다. 그러니까 오타쿠, 덕후란 호칭은 박사나 석사 같은 어떤 학위로 여겨도 좋겠습니다.
각 분야의 덕력이 높은 덕후를 만나 덕질 이야기를 나누는 연재를 시작하려 합니다. 입덕을 망설이는 여러분을 위해 어차피 덕질할 거 행복하게 덕질할 ‘어덕행덕’의 방법도 물어보겠습니다. 시작은 개미 덕후입니다.
카페 ‘‘개미’ 알면 사랑한다’의 매니저, 숲곰개미
네이버 카페 ‘‘개미’ 알면 사랑한다’는 국내 최대 개미 사육 커뮤니티로 꼽힙니다. 7월 12일 기준 회원 수 1만 9330명, 전체 글 8만 4181개를 자랑합니다. 개미 무료분양, 개미 사육 정보 공유 등 소통도 활발합니다.
7월 8일 오후, 이 카페의 운영을 맡은 매니저 숲곰개미 님을 자택에서 만났습니다. 그의 유튜브 채널인 ‘알면 사랑한다 ANTopia’를 살펴보면 덕력을 체감할 수 있죠. 알면 사랑한다 ANTopia에는 숲곰개미 님이 개미를 채집하기 위해 강원도, 거제도 등 한국 곳곳을 돌아다니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심지어 개미를 보기 위해 말레이시아의 보르네오 섬 정글로 떠난 정글 탐험기도 다큐멘터리에 버금가는 퀄리티의 영상으로 남아있습니다. 보르네오 섬 외에도 개미를 보러 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등지의 정글과 유럽, 호주 등 세계를 누볐죠.
그런 그에게 본업을 물었습니다. 숲곰개미 님은 “물류회사를 다니는 평범한 직장인”이라며 머쓱하게 웃었습니다. 숲곰개미 님의 본명은 황인우. 하지만 함께 길을 걸을 때의 그는 숲곰개미란 이름이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장마철인 이맘때에 개미를 시작했어요. 고등학교 1학년일 때예요. 원래도 살아있는 생물을 다 좋아해서 배경 지식은 있던 상태였지만 그날은 달랐죠. 우면산 생태공원에 갔는데, 개미 700~800마리가 우르르 줄지어 가는 광경을 봤습니다. 사무라이개미가 곰개미 유충을 훔쳐 노예로 삼기 위해 노예사냥을 떠나는 행렬이었어요. 책에서 본 개미들의 노예사냥을 관찰해 기뻤죠. 그런데 제가 관찰한 사무라이개미의 경우, 기존에 국내관찰 사례가 적었던 종이었어요. 제가 이 이야기를 인터넷에 올리니까 개미 연구자들이 우르르 연락해왔죠.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이후로 개미에 관심을 두게 됐는데, 책에서 본 개미들이 일상 속에서 속속 드러났죠.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는 개미가 많아요.”
우리 주변에서 가장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곤충이 바로 개미죠. 숲곰개미 님에게 이 점은 큰 매력이었습니다. 그는 “언제,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 가든 개미를 만날 수 있다”며 “게다가 땅속에서 주로 사는 녀석들이라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생활사도 많다”고 했습니다.
개미를 키우는 모두가 아마추어 연구자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다는 점은 갓 개미에 입덕한 뉴비들에겐 장벽이 되기도 합니다. 숲곰개미 님이 활동을 시작한 17년 전은 아직 국내에 개미 관련 커뮤니티가 형성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일본 사이트를 번역해가며 정보를 찾거나 개미를 연구하는 대학원생 형들에게 문자로 질문해 궁금증을 풀었다”며 “그때 연락하던 사람들 중에서 지금은 조교수나 선생님이 된 사람도 있다”고 했습니다.
개미 연구자와 개미덕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입니다. 연구자들이 덕후에게 개미 채집을 부탁하는 등 일반인과 함께 연구하는 경우도 많죠. 숲곰개미 님이 직접 찍은 사진이 연구자의 논문에 활용된 적도 있습니다.
그는 “부전나비라고 해서 개미집에서 유충생활을 하는 나비가 있다”며 “이 나비가 숙주로 이용하는 개미는 일본왕개미 뿐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산에서 한국홍가슴개미를 숙주로 이용하는 부전나비를 발견해 연구자들에게 제보했다”고 했습니다.
숲곰개미 님은 “개미덕질을 계속하면 개미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시로 든 이야기가 조금 웃픕니다. 그는 “흑색패인왕개미라고 생나무에 사는 개미를 사육한 적이 있다”며 “어느 날 자다 일어났는데, 이 개미들 200여 마리가 입에 쌀알처럼 생긴 고치를 물고 이사 중인 광경을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흑색패인왕개미 군체의 새집은 바로 나무로 된 아파트 붙박이장이었죠. 숲곰개미 님은 “이미 이사를 끝낸 개미를 다시 빼내기가 힘들어 원치 않는 동거를 3년 가까이 했다”며 “예상치 못한 상황이 이루어지기도 하니 인간의 관점으로 보면 안되고, 개미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개미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연습
개미를 사랑하는 눈으로 보는 세상은 다릅니다. 그의 별명인 ‘숲곰개미’만 해도 그렇습니다. 숲곰개미 님은 “숲곰개미는 길가에서 흔히 보이는 곰개미와 친척이지만, 숲에서 살아서 막상 찾으려면 잘 보이지 않는 개미”라며 “개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세히 보면 은은한 광택이 아름답게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귀여운 어감 덕에 10년째 별명으로 쓰고 있죠.
요즘 들어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개미가 점차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죠. 숲곰개미 님은 “자주 가는 산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개미가 등산로 데크 공사나 제방 공사를 하고 나면 한 종씩 보이지 않게 된다”며 “개미는 종 다양성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했습니다. 이어 “개미를 키우면서 개미가 흔하지만 다양하고, 가치 있는 생명체란 걸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무책임하게 잡고, 무책임하게 죽이지 말고, 개미를 키우면서 환경에 더욱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여름은 개미들이 결혼비행을 하는 시기입니다. 숲곰개미 님은 8월 중 비가 온 다음 날을 노려보라는 귀띔도 잊지 않았습니다.
“습해야 대기 중에 페로몬이 오래 머물거든요. 바람이 안부는 습한 날 편의점 근처를 보면 불빛에 모인 여왕개미가 보일 겁니다. 저는 언제든지 채집할 수 있도록 작은 약통을 항상 들고다녀요. 노하우가 많이 쌓이면 밤에 실루엣만 보고도 여왕개미를 구분할 수 있게 되죠.”
인터뷰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 길가에 걸어가는 개미가 유독 눈에 띄었습니다. 아직 쓱 보고 여왕개미를 찾기엔 멀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