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유니폼을 입은 선수가 썰매를 타고 빙판 위를 가른다. 스케이트 대신 썰매를 타고 승부를 겨루는 2022 베이징 동계패럴림픽 공식 종목, 파라아이스하키다.
동계 스포츠는 대부분의 종목이 맨몸이 아니라 썰매, 스케이트 등 장비를 착용한 채 경쟁한다는 점이 특색이다. 장비의 성능에 따라 선수가 기량을 얼마나 발휘할 수 있는지가 결정되기에, 동계올림픽과 동계패럴림픽은 스포츠과학의 정수를 볼 수 있는 무대로 평가받는다. 경기에 ‘장비매니저’라는 독특한 직업이 함께 하는 이유다.
1월 5일, 강원도 강릉시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한 강릉올림픽파크 하키센터에 들어서자 ‘위~잉’ 하는 용접 소리가 먼저 기자를 맞았다. 소리가 들리는 곳은 최영철 대한장애인체육회 장비매니저의 작업실이었다. 흡사 철물점을 방불케 한 그곳에서 숯돌에 썰매 날을 갈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벽에는 망치, 몽키스패너, 랜치 드라이버 등 공구가 빼곡했다. 동계패럴림픽 파라아이스하키 국가대표 선수들의 장비를 책임지고 있는 최 장비매니저는 “선수들이 훈련을 시작하기 전 썰매의 날을 점검하고 있다”고 말했다.
단 한 명의 선수를 위한 리미티드 에디션
“매일 아침 9시 빙질과 선수들의 컨디션을 체크하고 있어요. 그날그날 상황에 맞게 썰매 날을 조율해야 합니다.”
최 장비매니저는 선수들이 충분한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아이스하키 썰매를 만들고, 고쳐주는 일을 한다. 아이스하키는 경기 중에도 몸싸움으로 장비가 고장 나는 경우가 많아 실시간으로 선수의 상태를 살피고 즉각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 장비를 수리하고 조율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그는 매일 아침 가장 먼저 아이스링크로 달려가 빙질을 확인한다. 선수들의 몸무게, 빙질에 따라 썰매 날을 다르게 샤프닝(가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빙질이 단단하다면 마찰력을 줄일 수 있도록 더 날카롭게 갈아야 하고, 물렁하다면 무디게 갈아서 날이 빙판에 박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나의 썰매 날은 마치 오목렌즈처럼 안쪽에 홈이 패여 있는 구조다. 홈의 깊이 또한 허리를 쓸 수 있는 선수는 깊게, 아닌 선수는 얕게 가공한다.
바스켓을 손보는 일도 그의 주된 업무다. 동계패럴림픽 파라아이스하키는 두 개의 날이 달린 썰매를 타고 겨루는데, 선수들이 앉는 부위를 바스켓이라고 한다. 장애인 선수들은 장애 부위에 따라 바스켓 모양이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다리 절단장애를 가지고 있다면 정도에 따라 바스켓을 별도로 제작해야 하고, 척수장애는 앉는 자세에 따라 바스켓의 각도와 길이가 달라진다.
사실 장비매니저는 국내에서 비교적 최근에 생긴 직업이다. 이전에는 대부분 장비를 선수 본인과 트레이너가 챙겼고, 한번 조율한 기성품 장비를 조금씩 손 보는 게 전부였다. 설상 종목에서 왁스 테크니션을 따로 두는 정도였다. 하지만 기성품 장비를 사용할 수 있는 비장애인 선수들과 달리, 패럴림픽 선수들은 맞춤형 장비와 관리자가 절실하다는 요청에 2016년부터 최 장비매니저가 국가대표 파라아이스하키팀에 합류하게 됐다.
파라아이스하키 국가대표인 최광혁 선수(강원도청 소속)는 “이전에는 불편해도 기성품을 그대로 사용해야 했고, 썰매 날이 망가질 경우엔 택배로 보내 수리해야 했다”며 “지금은 경기를 하면서 즉각 대처가 가능해져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휠체어도 고치고 고민 들어주는 선배 역할
최 장비매니저가 선수들의 고충을 이해하고 한 명 한 명에게 맞춤형 썰매를 제공할 수 있던 배경에는 그 자신이 장애인 선수로 파라아이스하키를 비롯해 여러 종목에서 활약했던 경험이 있다. 그는 어릴적 소아마비를 앓아 왼쪽 다리가 불편하지만, 한쪽 다리로 사이클 페달을 밟아 인천 영종도에서 부산까지 갈 정도로 한계에 도전하는 스포츠를 좋아했다. 골프 실력도 출중해서, 2년간 장애인골프 선수로 활약하며 전국 우승을 두 번 했다.
썰매와의 운명적 만남은 2014년 처음 이뤄졌다. 대학 선배였던 한민수 파라아이스하키 국가대표 감독의 추천으로 파라아이스하키를 처음 접했다. 골프나 사이클과는 완전히 다른 운동이었지만, 탁월한 운동신경으로 금세 준수한 실력을 드러내며 2년간 서울팀 선수로 뛰었다. 골프를 치던 그에게 격렬한 몸싸움이 더해진 파라아이스하키 종목은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왔다.
이후 2016년부터는 각 시도단체가 운영하는 파라아이스하키팀을 돌며 선수들의 썰매를 수리하고 피팅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지난해에만 전남팀, 전북팀, 부산팀, 인천팀, 경기팀 등 전국각지를 다녔다. 최 장비매니저는 “파라아이스하키 선수로 활동하던 때, 선수들이 쉬는 시간이나 체력을 단련해야 할 시간에 썰매를 정비하는 것이 안타까웠다”며 “선수들이 운동할 시간을 확보해줄 수 있어 선수 시절보다 더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장비를 돌보는 일 외에 선수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생활을 조언해주는 선배의 역할도 그의 몫이다. 썰매 속도에 영향을 미치는 체중 관리를 돕기도 하고(콜라와 고칼로리 음식을 먹지 못하도록 잔소리를 한다고), 경기가 아닌 일상에서 쓰는 휠체어를 고쳐줄 때도 있다.
장기적으로 선수들이 사용하는 장비를 개선하는 작업도 계속하고 있다. 기존에 파라아이스하키팀은 대부분 캐나다업체 유니크의 썰매를 썼다. 수익 창출이 어렵다 보니 장애인 썰매를 제작하는 회사는 이곳이 유일했다. 선수들은 모두 비슷한 기성품 썰매를 바탕으로 바스켓, 벨트 등을 다시 손봐 쓸 수밖에 없었다.
이에 불편함을 느낀 최 장비매니저는 2017년부터 국내 스케이트날 제작업체 ‘매시브 블레이드’와 협력해 새롭게 장애인 썰매를 제작하고 있다. 이들이 만든 썰매는 알루미늄 합금 대신 마그네슘 합금을 이용해 무게가 35%가량 가볍다. 1차 모듈만 공통으로 만든 뒤 나머지는 선수별로 맞춤 제작도 가능하다. 최 장비매니저는 “평창 동계패럴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신의현 노르딕스키 국가대표의 썰매를 제작하고 연구하는 일도 함께하고 있다”고 말했다.
50세 선수가 뛰는 파라아이스하키의 미래는
동계패럴림픽에서 파라아이스하키는 꾸준히 좋은 성과를 낸 효자종목이다. 2017년 국제패럴림픽위원회(IPC) 아이스하키 세계선수권대회에서 3위, 2018년 평창 동계패럴림픽에서 동메달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뒀다. 최 장비매니저는 “지난 평창 동계패럴림픽 때 모든 경기를 참관한 김정숙 여사를 비롯해 수많은 관객들의 응원을 받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걱정스러운 부분도 있다. 그는 “파라아이스하키 은메달권에 있던 일본은 국가 지원이 끊기며 지금 최하위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며 “한국은 아직 성적을 유지하고 있지만, 현재 평균 연령이 40대인 선수들을 대체할 인력이 부족한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현재 파라아이스하키팀 최고령 선수는 50세, 막내가 26세다. 장애인 선수들이 비장애인에 비해 운동에 늦게 입문한다는 사실을 감안해도 파라아이스하키 종주국인 캐나다, 미국에 비하면 나이가 굉장히 많은 편이다.
파라아이스하키 선수들은 대부분 하지마비 장애를 갖고 있는데 이 중 80%가량은 교통사고 등 후천적으로 장애를 얻은 경우다. 최 장비매니저는 “중도에 장애를 얻게 된 사람들은 선천적 장애보다 마음을 열기 힘들어 한다”며 “장애를 받아들이는 데만 5~6년이 걸리고, 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기까지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고 말했다.
이에 최 장비매니저와 한 감독은 2018년부터 스포츠 마케팅 업체인 올댓스포츠와 함께 파라아이스하키 썰매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장애 여부를 불문하고 선수들에게 파라아이스하키라는 종목을 소개하고,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서다.
장애 인구 자체가 줄어든 것도 선수 부족의 원인 중 하나다. 소아마비 등의 장애는 어릴 때 치료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지난해부터는 한국체육대와 함께 비장애인 선수로만 구성된 파라아이스하키팀을 창단했다. 최 장비매니저는 “파라아이스하키가 꼭 장애를 갖고 있어야만 참여할 수 있는 종목은 아니다”라며 “비장애인 선수들도 똑같이 장비를 착용하고 훈련을 한다. 다만 아직은 연륜이 있는 장애인 선수들이 훨씬 실력이 좋다”고 말했다.
동계올림픽이 끝나고 연이어 개최되는 동계패럴림픽까지 두 달여 남은 지금, 파라아이스하키팀은 2월 초로 예정된 캐나다 전지훈련을 비롯해 마지막 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22 베이징 동계패럴림픽은 그들의 열정이 빛을 발할 또 한 번의 무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