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도 과학자를 양성하는 대학이 있습니다. 북한의 KAIST라고 불리는 리과대학과 포스텍 격인 김책공업종합대학입니다. 잘 알려진 김일성종합대학과 함께 삼 대장이죠. 실제 이 대학에 다녔고, 북한의 과학기술계 현장에 있었던 이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Q. 두 분 모두 수재였다고 들었습니다. 북한에도 수재들을 위한 특목고가 있다면서요?
장. 북한에는 도별로 제1중학교(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포괄하는 6년제 특목고)가 하나씩 있습니다. 남한의 과학고에 해당합니다. 저는 함경북도 제1중학교를 나왔습니다. 총 6학년 중 4학년 때까지 기초과학을 모두 섭렵했고, 불필요한 과목을 빼는 대신 수학이나 컴퓨터수학 등은 대학 수준으로 교육받았습니다.
제1중학교를 나온 친구들은 대부분 입대 대신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 리과대학 등에서는 제1중학교 학생을 특별전형으로 뽑기도 합니다.
제가 다닌 함경북도 제1중학교에서는 수재반을 따로 운영하는데 생물수재반과 수학수재반이 나뉘어 있었습니다. 저는 수학수재반을 선택했습니다. 대부분 북한 학생들은 이 때 정한 분야를 계속 공부하기 때문에, 중학교 때 전공이 정해지는 셈입니다.
김. 저도 제1중학교 출신입니다. 교육열이 높은 부모님과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피복학(의류학)을 공부한 뒤 장사를 하셨고, 외할머니는 당시 드문 여성 과학자였습니다. 유기화학을 전공하시고 종이 공장에서 오랜 기간 일하셨습니다.
주로 외할머니가 공부를 시키셨는데,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질 틈도 없이 따라야 했습니다(웃음). 북한에서는 사회적으로 여자들은 빨리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실제 친구들도 23~25살 사이에 결혼했죠. 지방은 평양보다 더 빨라요.
반면 외할머니는 항상 ‘결혼은 늦게 하고, 자녀도 많이 낳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외할머니도 38살에 결혼하셨는데, 남들은 손주 볼 나이라고 했습니다. 커리어에 지장 받지 않기 위해 엄마 하나만 낳으셨다고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외할머니의 인생관에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장. 저는 공부를 좋아하는 학생은 아니었습니다(웃음). 부모님이 2000년대 초반 일본 무역으로 돈을 많이 버셨습니다. 당시 북한 민간에 돈이 많이 들어오던 시절입니다. 덕분에 저도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교사 출신인 부모님은 일명 ‘불도간’처럼 공부해야 한다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초를 가열해서 두드린다는 뜻인데, 시험을 앞두고 단기간에 집중해 공부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영어, 물리 전문가 등을 찾아가 한 달간 집중적으로 배우거나, 경시대회를 통해 실력을 향상시키도록 했습니다.
합숙 과외도 받았습니다. 북한에도 과외가 있습니다. 실력 있는 선생님들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과외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친구 한 명과 함께 1년 가까이 과외 선생님 집에서 합숙하면서 공부했습니다. 저는 조기교육을 찬성하는 편인데, 어렸을 때 머리를 쓰는 방법을 배워 이후에도 사고가 넓어지는 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12살 때 중3 과정을 공부할 정도로 빠르게 습득했습니다.
Q.북한의 캠퍼스 라이프가 궁금합니다. 대학생활은 어땠나요?
김.북한에서 대학 진학에 실패하면 5년 정도 군대 경력을 쌓고 ‘제대군인’ 신분으로 다시 대학에 지원할 수 있습니다. 이때는 ‘글만 쓸 줄 알면 붙는다’는 얘기가 돌 정도로 입학이 쉬워집니다. 김일성종합대학 등 명문대일수록 한 번에 대학에 진학한 ‘직통생’보다 제대군인의 숫자가 더 많습니다.
직통생들은 대학 생활이 제대군인에게 시달리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본인들보다 나이가 훨씬 많고, 소대장이나 연대참모 등 관직을 가지고 있습니다. 직통생들을 심부름꾼으로 삼거나 왕따를 시키기도 합니다.
다행히 제가 나온 리과대학은 소수정예인 탓에 제대군인이 적고, 제1중학교의 수학수재반 출신 친구들이 많아서 꽤 민주적인 분위기였습니다. 다만 학사 일정이 빠듯하고, 공부량이 많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북한 대학의 특징은 원하든 원치 않든 무리지어 다닐 수밖에 없는 분위기입니다. 파벌을 가지고, 사회 활동을 해야만 합니다. 북한은 대학생도 조직적으로 관리합니다. 일례로 제 대학 생활을 관리하는 상사가 7명이었습니다. 사실 이들의 관리 감독을 받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습니다. 그 때문인지 북한에는 ‘우울증’이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김. 조금 덧붙이자면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대 군인들은 직통생들과 거의 10년씩 차이가 납니다. 가끔은 직통생들이 앞가림을 못할 때 훈계해 주기도 하는데, 배우는 점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책임감을 갖고 대학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Q.북한이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애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과학기술자에 대한 대우는 어떤가요?
장. 말로는 과학기술 인재를 집중 양성한다고 광고하지만 실상은 조금 다릅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한 북한에서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하려면 과학기술이 돈이 되는 시장이 형성돼야 합니다. 그런데 북한 사회는 굳이 비싼 돈을 들여 인공지능이나 자동화를 도입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력이 가장 저렴하니까요. 결과적으로 과학기술도 첨단보다는 이론적인 부분에 치우쳐 있습니다.
김. 과학도로서 취업을 해도 생계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탈북을 하게 됐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을 해도 분야를 막론하고 월급이 1000~2000원 수준입니다. 이걸로는 쌀 1kg도 살 수 없습니다.
Q.인공지능이 도입되고, 모든 일이 스마트폰 안에서 이뤄지며, 전 세계적으로 개발자 모셔가기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북한은 어떤가요?
김. 컴퓨터, 특히 코딩 교육은 남한보다 앞섰다고도 생각합니다. 남한은 이제 코딩이 필수과목으로 자리잡은 반면, 북한에서는 저희 때도 공대는 물론 고등학교 때부터 코딩이 의무교육이었습니다.
장. 북한에서도 정보기술(IT) 업계에 고급 인력이 모이고 있습니다. 독재 국가인 북한은 어렸을 때부터 인재를 키워 필요한 인력으로 사용하는 데 익숙합니다. 컴퓨터 분야의 특목고에 해당하는 금성학원, 금성 제1중학교 등에서 컴퓨터를 집중적으로 가르칩니다. 3대 명문대에 이 친구들을 위한 특화대학을 설치해 2년만에 졸업할 수 있는 시스템도 도입됐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북한 대학생들은 졸업해도 딱히 큰돈을 벌 수 없습니다. 그런데 IT 업계의 경우 최근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내수시장도 생겼고, 프로그래밍에 한해 상업적인 부분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돈을 벌 길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북한 개발자들은 앱 하나 잘 만들면 5만 달러를 벌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평생 먹고 살 수도 있는 금액이죠. 자연스럽게 IT 업계에 고급인력이 모이고 있습니다.
Q.그런데 장혁 씨는 남한에 와서 개발자가 아닌 다른 일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장. 현재 건설회사에서 전산 업무 처리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프로그래밍 기초는 북한이나 남한이나 똑같아 개발자 취업도 생각했지만, 북한에서 프로그래밍을 열심히 할수록 삶이 피폐해졌던 경험이 있습니다. 대학에서도 밤새기 일쑤였고, 부스스한 머리로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개발에만 몰두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영애 기자: 남한도 다르지 않아요!) 남한에 와서 새로운 사회·문화에 적응해야 하는 입장에서 전공과는 다르더라도, 남들과 소통하는 일을 선택했습니다.
다만 나중에는 게임 업계에 종사하고 싶은 바람이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도타’가 남한의 ‘리그오브레전드’ 만큼 유행입니다. 저도 5년 정도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전설 메달을 받을 정도로 잘했죠(웃음). 남한에 와서 프로게이머를 잠깐 생각했는데 피지컬(?) 문제로 접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게임 업계에서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Q. 김지연 씨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하실 계획인가요?
김. 연구소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남한에 오자마자 주말에는 치킨집 아르바이트, 평일에는 학원과 EBS 인터넷 강의를 병행하며 입시를 준비했고, 다행히 수시에 합격했습니다. 일단은 대학에 다시 진학했으니 전공을 많이 들어 학점을 빨리 채우고 싶습니다. 실험실에 가서 인턴도 하고 싶고, 나중에는 생물학과 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입니다. 아직은 특별히 잘할 수 있는 일을 찾기보다는 현재에 감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