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나는 운동, 그중에서도 농구를 너무나 사랑하는 학생이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농구를 하느라 학원에 지각하기 일쑤였고,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 집 마당에 농구 골대를 설치해 주신 아버지 덕분에 집에 와서도 해가 질 때까지 농구 연습을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운동할 시간이 많지는 않았지만, 아침 수업 전이나, 점심, 저녁에 틈만 나면 농구를 했다. 고등학교 3학년 입시를 앞둔 시기에도 부모님 몰래 농구대회에 참가할 정도로 농구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취미로 시작한 농구는 지금까지도 내 인생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바쁘게 돌아가는 병원 생활 속에서 지역 농구 동호회에 가입해 매년 대회에 참가하고 있고, 전국 의료인 대회에서도 꾸준히 8강 이상의 성적을 낼 정도로 적극적으로 활동 중이다. 농구는 내 체력 유지에도 큰 도움이 됐다. 무난한 성적으로 의대 공부를 마치고, 힘들기로 악명 높은 정형외과 수련 과정도 큰 탈 없이 마칠 수 있었던 데는 농구로 얻은 체력이 한몫했다.
농구 ‘덕후’ , 정형외과를 선택하다
농구나 축구는 몸을 부딪치며 경기해야 하는 종목인 만큼 부상도 잦다. 상대 선수를 제치기 위해 급하게 스퍼트를 내거나 방향을 전환하다 보면 무릎을 다치거나 발목을 접질리는 것은 다반사고, 햄스트링 부상이나 골절상도 많다. 나 또한 의사 국가고시를 앞두고 농구를 하다 오른손 손가락이 골절돼 나머지 두 손가락으로 간신히 시험을 본 경험이 있다.
의사가 되고 나서 어떤 분야의 전문의가 될지 결정하는 시기에, 두말할 이유 없이 정형외과를 선택한 데엔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컸다. 부상을 당한 선수들을 가장 적극적으로 치료해줄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했다.
정형외과를 선택하고 보니 그 안에서도 세부 분야가 다양했다. 선배 의사들은 수술이 많은 정형외과의 특성상 수부(손), 척추, 무릎, 고관절 등 하나의 신체 부위를 선택해 집중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다양한 부위를 다루는 스포츠의학을 집중적으로 배우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국내에는 스포츠의학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았다. 대신 팀 닥터 시스템이 잘 갖춰진 미국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 스포츠의학 연수를 다녀왔다. 이후 대한스포츠의학회의 스포츠의학 인증전문의 자격증을 따, 국제대회에 팀 닥터로 지원할 수 있는 자격을 갖췄다.
국내에서는 팀 닥터가 하나의 직업군이 아니다. 대부분의 스포츠 종목은 큰 규모의 대회나 경기가 있을 때마다 협회나 연맹을 통해 팀 닥터 지원을 요청하고, 의사들이 자원해 도와주는 형태로 운영된다. 국제대회도 마찬가지다. 국제축구연맹(FIFA)처럼 팀 닥터 고용을 의무화한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국제대회에서 팀 닥터 동행은 권고사항 정도에 그친다. 따라서 의무위원회에서 지원자가 없으면 의사가 경기에 동행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럴 때는 트레이너가 비상약만 챙겨가고 정말 급한 일이 생기면 현지 병원에 가는 식으로 해결한다. 다행히 농구 종목에서는 나를 비롯해 같은 뜻을 가진 의사들이 의무위원회를 꾸려 번갈아 팀 닥터로 대회에 함께하고 있다.
코로나19에 골절상까지, 라트비아 원정기
올해 7월 초 19세 이하 농구월드컵(U-19) 팀 닥터로 동유럽의 라트비아 원정을 다녀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지난해 많은 대회들이 취소됐는데, 올해부터는 다시 국제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당시 라트비아는 인구당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한국보다 3~4배 많았다. 우리는 일정 내내 호텔에 갇혀 지내야 했다. 국가별로 호텔 한 층씩 배정이 됐는데, 완전히 동선이 제한된 상태로 경기장과 호텔만 오갈 수 있었다.
사실 한국은 농구 강팀이 아니다. 농구 강국과 치러지는 연속된 경기에서 우리 선수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신체적인 열세로 부상이 속출했다. 특히 주전 가드 선수는 스페인 선수와 부딪혀 십자인대가 붙은 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현지 병원 응급실에 가서 자기공명영상(MRI)을 촬영한 결과 수술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다만 수술 환경은 한국이 더 좋다고 판단돼 보조기만 착용하고 복귀해 수술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문제는 아직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받지 않은 선수들이 국내에 돌아오면 2주간 자가격리를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격리시설이 갖춰진 수술실이 필요했다. 많은 병원을 수소문했지만 가능한 곳이 없었다.
다행히 농구리그 의무위원장인 김진수 선생님이 본인의 개인병원 1인실을 제공하기로 했다. 하나의 병실을 통째로 격리실로 변경해 무사히 수술을 진행할 수 있었다.
라트비아에서 부상을 당한 뒤 현지 상황과 국내 상황을 국내 의무위원회와 실시간으로 주고받은 덕분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수술을 마친 선수는 잘 회복했고, 이제 본격적으로 재활을 준비하고 있다.
이번 원정경기는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처음 본 어린 선수들인데도 농구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보니 빠르게 친해졌다. 나중에는 연습할 때 패스도 도와주고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유명한 선수들은 구단 차원에서 관리해 주지만, 비인기 종목이나 아마추어 선수들은 체계적으로 관리받기가 쉽지 않다. 특히 U-19에 출전한 선수들은 대부분 국가대표로 선발될 정도로 유망주로 꼽힌다. 더욱 정확한 관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대회 기간 동안 최선을 다해 임했다.
요리사도 테니스엘보우… 일상 속 스포츠의학
팀 닥터를 하나의 단어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단순히 선수의 부상을 치료하는 사람만은 아니다. 팀 닥터는 감독, 코치 등 선수단 모두의 건강을 책임지며, 정확한 진단을 통해 시의적절한 처방을 내리고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다.
선수단과 해외 원정경기를 떠나보면 생각지도 못한 의학적인 사고들이 발생할 수 있다. 익숙하지 않은 해외에서 복통 및 설사, 알레르기성 두드러기, 불면증, 두통 등 다양한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기본적인 일차 진료에 대한 준비는 필수적이다.
게다가 경기 중 발생할 수 있는 골절, 뇌진탕, 실신 등 급박한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환자를 평가해 정확한 진료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로 인해 내 전공인 정형외과 외에도 재활의학과, 가정의학과, 응급의학과 등 다양한 분야의 의사들이 팀 닥터 역할을 함께 수행한다.
수술이 적극적으로 필요한 부상도 있지만, 수술 없이 재활치료만으로 회복이 가능한 부상도 있다. 팀 닥터는 환자 선수와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때로는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지금은 이런 운동을 하는 게 좋다’ 등 조언을 건네며 재활에 집중하도록 돕는다. 선수에 대한 이해심과 배려심이 필요한 순간이다. 같은 부상일지라도 정도가 모두 다르고, 부상을 당한 선수의 현재 상황 및 팀에서의 위치, 부상당한 시점, 팀과 감독의 요구 등 모든 사항을 고려해 적절한 처방과 조언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스포츠의학은 프로선수만을 위한 학문으로 생각되기 쉽지만 최근 들어 일반인들 중 관련 질환을 호소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평균 수명이 늘고 취미로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도 많아졌고, 반복적인 일을 하는 직업군에서도 만성손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일례로 무거운 냄비를 다루는 요리사는 테니스 선수에게 주로 나타나는 부상 중 하나인 ‘외측상과염(테니스엘보우)’이 자주 발생하고, 어깨 위로 팔을 드는 일이 잦은 과수원 운영자는 어깨를 많이 쓰는 수영이나 야구선수에게 빈번하게 발생하는 회전근개 질환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최근에는 스포츠의학의 범위가 전문 운동선수에서 일반인들에게까지 확대되고 있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스포츠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팀 닥터가 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대학교수로 병원 생활을 하다 보면 환자 진료와 수술도 해야 하고, 의대생 및 전공의 교육, 연구 등 업무에 쫓기다 보니 시간적, 체력적 여유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다만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U-19 대회는 앞으로도 계속 관리해주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프로가 된 선수들은 자신에게 맞는 주치의에게 진료를 받을 수 있지만, 청소년이나 유소년 선수들에게는 팀 닥터나 협회에서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올해부터는 빙상 종목에도 처음으로 팀 닥터 시스템을 도입하기로 결정됐다. 나는 반복적인 스핀, 점프 등이 많아 부상 위험이 높은 피겨 종목 담당이다. 내년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출전할 때까지 선수들의 건강을 책임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