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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은 수정란 하나가 수많은 세포분열을 거쳐 만들어졌습니다. 덕분에 모든 세포는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체에 존재하는 세포는 200여 종류로 다양하며 모두 각기 다른 모습과 기능을 가집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비밀은 ‘유전자 발현 조절’에 있습니다. 각 세포가 가진 30억 염기쌍의 DNA 염기서열은 모두 같지만, 그중 실제 발현되는 유전자의 종류와 양은 다릅니다. 그 덕분에 신경세포, 근육세포 등 다른 종류의 세포가 될 수 있습니다.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기작은 다양합니다. 이달에는 그중 하나인 ‘인핸서’의 작동 원리를 밝혀낸 2018년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의 논문을 소개합니다. 인핸서는 유전자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유전자 발현을 돕기 위해 존재하는 DNA 염기서열입니다. 이번 논문은 기존에 제시되던 인핸서의 작동 원리를 뒤집고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세포 속 단백질의 움직임을 분석하는 새로운 분자생물학 기법을 제안해 주목 받았습니다.
DNA를 접어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인핸서’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시작한 1990년대만 해도 과학자들은 사람의 DNA 염기서열을 알아내면 생명의 모든 비밀을 파헤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DNA 염기서열과는 상관없는 다양한 요인이 유전자 발현을 조절한다는 후성유전학 개념이 등장하면서 생명이 보다 복잡하게 조절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DNA가 이루고 있는 3차원 접힘 구조가 유전자 발현을 조절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DNA의 1차원 서열 분석 연구(1D)보다는 시간에 따른 3차원 구조 변화 연구(4D)에 시선이 쏠리고 있습니다. DNA나 단백질을 하나씩 따로 들여다보지 않고, 세포핵 전체를 하나의 유전자 발현을 위한 단위로 연구하는 ‘4D 뉴클레옴(Nucleome)’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유전자 발현은 DNA에서 RNA가 만들어지는 전사 과정에서 시작됩니다. 이때 RNA를 만들지 말지, 만든다면 얼마나 많이 어떤 속도로 만들어낼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유전자 발현 조절의 핵심입니다. 전사 과정은 RNA 중합효소라는 단백질과 다양한 전사인자 단백질들이 DNA에 달라붙으며 시작되는데, RNA 중합효소와 전사인자들이 얼마나 자주, 많이 DNA에 붙는지에 따라 발현 속도와 발현량이 조절됩니다.
간세포에서 만들어지는 알부민처럼 발현량이 매우 중요한 몇몇 유전자들은 인핸서에 의해서도 발현이 조절됩니다. 인핸서가 표적 유전자와 상호작용하며 발현량을 높여주죠. 인핸서 발견 초기에는 인핸서가 어떤 방식으로 표적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하는지 베일에 싸여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여러 연구를 통해 인핸서가 DNA ‘접힘’ 현상을 통해 유전자 발현을 조절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일직선상에서 멀리 떨어진 인핸서와 유전자는 DNA가 접히면서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워집니다. 이때 인핸서와 유전자는 매개체 단백질(Mediator)과 각종 전사인자로 구성된 공동활성체(Coactivator)라는 거대한 단백질 복합체에 의해 연결됩니다. 여기에 RNA 중합효소와 전사인자들이 모이며 RNA가 생성됩니다.
인핸서의 작동 원리를 규명하다
리처드 영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생물학과 교수팀은 매개체가 인핸서와 유전자에 동시에 결합한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연구팀은 매개체 단백질을 분석한 결과 일부분이 특별한 구조 없이 유동적으로 모양이 변할 수 있는 ‘비구조 영역(Intrinsically Disordered Region)’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비구조 영역을 가진 단백질들은 세포 안에서 상분리 집합체를 이룰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분리 집합체는 올리브 오일 안의 발사믹 소스 방울처럼, 외부 물질과 구분된 채 비슷한 물질들끼리 뭉친 상태를 말합니다. 단백질이나 RNA 분자들이 상분리 집합체를 이뤄 똘똘 뭉치면 그 공간 안의 분자 농도가 높아지며 화학 반응이 일어나기 쉬워집니다. 상분리 집합체를 구성하는 분자들은 매우 빠르고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세포 안에서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화학 반응이 일어나야 하는 곳에서 상분리 집합체가 많이 관찰됩니다.
영 교수는 비구조 영역을 가진 매개체 단백질이 ‘상분리 집합체’를 이루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매개체 단백질의 물리적 특성을 관찰했습니다. 이때 단일 세포 이미징(single cell imaging) 기법을 활용했습니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기술로 매개체 단백질에 녹색형광단백질(GFP)을 삽입한 뒤, 살아있는 세포 안에서 매개체 단백질이 띠는 초록빛을 추적해 실시간으로 단백질의 움직임을 관찰했습니다. 이를 통해 연구팀은 살아있는 세포 안에서 단백질이 어떻게 움직이고 작동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매개체 단백질도 세포핵 안에서 상분리 집합체를 이룬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매개체 단백질들은 인핸서와 유전자 주변의 공간에서 매우 역동적으로 움직임을 만들어냈습니다. 매개체 단백질이 인핸서와 유전자에 안정적으로 결합해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쉴 새 없이 둘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화학 반응을 조절하기 쉬운 미세 환경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다만 이런 매개체 단백질에서 관찰되는 특징이 실제 어떤 분자적 움직임을 유도해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고, 최근 이와 관련해 많은 후속 연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여기에도 세포를 실시간으로 추적하는 기술이 활용되고 있습니다.
4D 뉴클레옴의 대표 기술 중 하나인 단일 세포 이미징은 분자생물학 기법의 해상도를 높였다고 평가받습니다. 기존의 분자생물학적 기법은 죽은 세포에서 단백질이나 핵산을 추출해 이들의 존재 유무나 생화학적 특성을 분석했습니다. 단백질의 특성을 평균적인 경향성 정도로 유추할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단일 세포 이미징이 도입되면서 DNA, RNA, 단백질 등의 시공간적 움직임을 두 눈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됐습니다.
생명과학이 발전하면서 실험 기법도 함께 발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유전자 분석에 빅데이터를 활용하거나, 약물재창출에 딥러닝을 적용하는 등 다양한 분야가 접목되고 있습니다. 단일 세포 이미징도 물리와 화학, 공학이 접목돼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DNA와 단백질 분자의 물리적 움직임에 의해 화학 반응이 조절되고, 이를 현미경을 통해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죠. 어쩌면 4D 뉴클레옴 분야의 최종 종착지는 다양한 과학 분야를 관통하는 교차점에 존재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박건희
KAIST 생명과학과에서 석·박사통합과정으로 재학 중이다. 현재 살아있는 세포에서 염색질의 운동과 유전자 발현 조절의 상관관계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toonivas@ka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