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인 제네바에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가 위치하고 있다. 우주 연구기관을 언급할 때 미국항공우주국(NASA)을 가장 먼저 꼽듯 입자나 핵 등 미시세계의 물리를 연구하는 기관으로는 첫 번째로 언급되는 연구소다.
겉보기에는 몇 개의 큰 건물이 모여있는 일반적인 연구소 같지만, 100여m 지하에는 거대한 터널이 자리하고 있다. CERN 아래에서 시작된 터널은 스위스 국경을 넘어 프랑스 남동부 오베르뉴론알프 지역으로 뻗는다. 그리고 큰 원을 그리며 돌아 다시 출발점에 도착한다. 둘레만 무려 27km에 달한다. 터널 안에는 두꺼운 금속관이 터널을 따라 이어져있다. 수많은 입자가 세상에서 가장 빠른 빛과 거의 같은 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실험장치인 거대강입자충돌기(LHC·Large Hadron Collider)다.
빅뱅 직후의 입자 움직임 재현
LHC가 건설된 가장 큰 이유는 ‘빅뱅 발생 직후의 우주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약 138억 년 전 하나의 특이점에서 시작돼 지금과 같은 광활한 우주가 만들어졌다는 빅뱅(대폭발) 이론은 지금까지 우주의 탄생을 설명하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인류는 빅뱅 이후 38만 년이 흐른 시점부터 지금까지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는 비교적 잘 알고 있다. 이때부터 자유로이 우주 공간을 이동하기 시작한 빛을 추적하면 과거의 일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전에 특이점이 왜 형성됐는지, 그리고 빅뱅 이후 38만 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여러 상상력과 계산을 통해 가늠하고 있을 뿐이다.
이 사이에 일어난 일을 명확히 알기 위해서는 증거가 필요하다. 빅뱅 직후를 재현하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빅뱅 직후는 굉장한 고온·고압의 환경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빅뱅 직후 우주는 급격히 팽창하며 온도가 떨어졌는데 이 팽창이 있기 전의 온도는 1032K로 추정된다. 만-억-조-경-해-자-양을 넘어 1구K다. 급팽창으로 온도가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1027K에 이르렀다. 그 뒤로 우주는 계속 팽창했고, 빅뱅 38만 년 뒤에야 3000K까지 식었다.
이 뜨거운 공간을 재현하는 것은 물리학자들에게 큰 숙제였다. 고심하던 물리학자들이 내놓은 답이 바로 입자충돌기다. 원자핵이나 원자, 이온 등의 입자를 빠르게 가속해 충돌시키는 장치다. 고온의 환경일수록 물질의 움직임은 빨라진다. 빅뱅 직후와 같이 고온·고압의 환경에서 물질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면 충돌하는 횟수나 충돌 뒤 발생하는 물리적 현상 모두 현재 상태와 크게 다를 것이다.
현재까지 우주의 구성과 움직임을 설명하는 가장 정교한 물리학 이론으로 꼽히는 표준모형에서는 우주를 지배하는 네 가지 기본 힘이 존재한다고 본다. 이 가운데 물질을 이루는 기본입자인 6종의 쿼크를 서로 결합시키는 힘을 ‘강력(강한 상호작용)’이라고 하고, 하나의 입자를 다른 입자로 변화시키는(이를 붕괴라고 한다) 힘을 ‘약력(약한 상호작용)’이라고 한다. 강력과 약력은 입자 간의 거리가 매우 가까울 때 작용하는 힘이다. 이 힘을 실험하려면 입자 사이의 거리를 매우 좁혀야 하는데, 실제로 매우 큰 에너지가 필요하다. 물리학자들은 입자가속기로 입자를 매우 빠르게 가속해 에너지를 높이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80개국 600개 기관, 체계적인 거대공동연구
LHC에서는 가속된 입자들이 끊임없이 충돌한다. 양성자와 양성자, 양성자와 원자핵, 또는 원자핵과 원자핵끼리 충돌해 다양한 입자를 연쇄적으로 만들어 낸다. 주요 충돌 지점 4곳에는 각각 대형 검출기가 있어 충돌 뒤 발생하는 다양한 입자를 정교하게 검출해 낸다. 무거운 이온 충돌을 검출하는 데 특화된 ‘앨리스(ALICE)’, 기본 입자 중 바닥 쿼크(bottom quark)를 포함하는 강입자(기본입자 중 쿼크와 글루온으로 이뤄진 합성입자)를 검출하는 능력이 뛰어난 ‘LHCb’, 양성자 및 중이온 충돌 실험에서 중요한 기본입자 뮤온 검출에 탁월한 ‘뮤온압축솔레노이드(CMS)’, 그리고 CMS 정반대 편에서 모든 입자를 고르게 검출하는 ‘아틀라스(ATLAS)’다. 검출기는 입자의 충돌 결과를 기록하고, 그 기록을 연구진이 분석한다.
검출되는 데이터 양이 상당해서 이를 분석할 연구원도 매우 많이 필요하다. LHC가 본격 가동된 2010년부터 2020년까지 약 278페타바이트(PB)의 데이터가 기록됐는데, 이는 넷플릭스에서 한 명이 1만 5000년 동안 쉬지 않고 스트리밍으로 시청했을 때 사용하는 용량이다. 단순히 용량만 클 뿐만이 아니라, 각 데이터를 해석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검출기에는 입자 충돌 결과 나온 입자들이 명확히 표시되지 않기 떄문이다. 단지 입자들이 지나간 흔적이 군데군데 남을 뿐인데, 이 흔적만을 가지고 입자의 운동량과 에너지, 전하 등의 입자 특성을 재구성해야 한다.
그래서 현재 약 80개국, 600여 개의 기관이 LHC 실험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 한국도 2006년부터 정부와 CERN이 협력관계를 맺으면서 지금까지 연구를 함께 하고 있다. LHC 연구는 각 검출기별로 나눠 진행되는 특성상 한국에는 앨리스팀과 CMS팀이 구성돼 있다.
전 세계 많은 기관, 많은 연구원이 참여하는 만큼 보통의 협력 연구와는 차이가 있다. 2016년부터 CMS팀 한국 대표를 맡고 있는 양운기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는 “팀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4개 검출기 연구팀 모두 굉장히 체계적으로 진행된다는 공통점이 있다”며 “그중 CMS팀은 마치 하나의 기업과도 같다”고 말했다.
CMS팀의 경우 55개국, 3000여 명의 과학자로 이뤄져 있다. 이들은 연구 목적에 따라 36개 팀으로 나뉘며, 36개 팀은 다시 크게 5개의 부서로 묶인다. 이 5개의 부서를 총괄하는 그룹 리더, 그리고 또 그 위에 전체 검출기를 총괄하는 총책임자(coordinator)가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LHC에는 4개의 검출기 연구팀 외에도 가속기 연구팀, 이론물리 연구팀, 컴퓨팅 사이언스 연구팀이 따로 있고, 재정, 인사 등을 관리할 행정부서도 별개로 있다.
양 교수는 “의사결정이 체계적으로 진행된다는 장점도 있지만 소규모로 진행되는 협력 연구에 비해 진행 속도가 느리다는 단점도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검출기 시스템 중 작은 부분을 수정하더라도 몇 단계에 걸쳐 검출기 총괄 책임자까지 결재를 마쳐야 하고, 그것이 또 다른 3000명의 연구원들에게 수정해도 괜찮은지 확인을 받아야 한다. 검출기 데이터를 해석해 나온 연구 결과 역시 그 검출기에 관여하는 다른 연구원들의 숱한 검토를 거쳐야 비로소 발표될 수 있다. 그래서 LHC의 공동연구결과를 담은 논문에는 주도한 사람이 누구든 그 검출기팀에서 정식 구성원으로 인정 받은 수백, 수천 명의 연구원이 함께 저자로 등재된다.
암흑물질 정체 밝힐 3단계 가동 기대
이처럼 LHC는 더디지만 확실한 검증을 밟아가며 빅뱅에 다가가고 있다. 2008년부터 2020년까지 LHC 공동연구결과가 실린 정식 논문만 2852개에 이른다. LHC 실험결과를 기반으로 한 논문만 수만 개가 넘으며, 고에너지물리학 분야에서 2010년대에 가장 많이 인용된 두 개의 논문 역시 LHC 공동연구결과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연구 결과는 단연 힉스 입자의 발견이다. 힉스 입자는 표준모형을 구성하는 17개 기본 입자 중 하나로, 물질이 질량을 갖는 과정에 관여한다. 1964년 영국의 이론물리학자인 피터 힉스, 벨기에의 프랑수아 앙글레르 등이 처음으로 이론을 제시한 뒤 50년 넘게 관측을 통해 증명되지 않다가, 2012년 7월 LHC에서 처음으로 발견했다. 2016년부터 앨리스팀의 한국 대표를 맡은 윤진희 인하대 물리학과 교수는 “수십 년 동안 이론상으로만 존재했던 힉스 입자를 발견해 비로소 표준모형을 완성한 공로가 크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LHC의 또 다른 큰 업적으로 지난해 12월 앨리스팀이 발표한 연구결과를 꼽았다. 윤 교수는 “1펨토미터(1000조분의 1미터)의 초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입자 간 상호작용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술을 완성했다”며 “LHC의 연구결과 중 CMS팀과 LHCb팀 연합으로 발표한 논문을 제외하고 단독팀으로는 최초로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실린 논문”이라고 소개했다.
한국에서 8개 기관 40명의 연구원이 참여하고 있는 앨리스팀은 입자 간에 벌어지는 상호작용에 관심이 크다. 그중에서도 기본입자인 쿼크와 글루온 사이에 작용하는 강력의 특성을 알아내기 위한 탐구를 지속하고 있다.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힘(전자기력이나 중력)은 멀어질수록 그 작용이 약해지는데, 기본입자인 쿼크와 글루온 사이에 작용하는 힘(강력)은 오히려 멀어지면 더 세게 작용해서 쿼크나 글루온만을 따로 분리할 수가 없다. 이런 특이한 강력의 성질을 연구하기 위해 앨리스팀은 입자를 충돌시켜 쿼크와 글루온이 모두 녹아내린 상태인 ‘쿼크-글루온 플라스마’를 만들어 강력을 추적했다. 하지만 양성자나 중성자를 구성하는 위, 아래 쿼크를 제외한 나머지 4종의 쿼크를 포함하는 강입자들은 붕괴 속도가 너무 빨라 강력의 특성을 파악할 시간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이에 연구팀은 양성자와 양성자의 충돌에서 생성된 입자 간의 운동량 차이를 측정하는 방법을 이용해 기묘 쿼크(strange quark)를 포함하는 입자와 핵자(양성자와 중성자) 사이의 강력 상관관계를 밝힐 수 있는 펨토스코피 기술을 개발했다. 윤 교수는 “LHC가 건설되고 지난 10년간 충돌 에너지도 7TeV에서 13TeV로 크게 높아지며 다양한 충돌 현상이 더 많이 발생했고, 검출기 역시 입자를 식별하고 운동량을 측정하는 성능 역시 크게 향상된 점이 이번 연구결과에도 큰 도움이 됐다”며 “더 작은 공간, 더 짧은 시간에 벌어지는 물리 현상이 점차 밝혀지는 셈”이라고 말했다.
현재 LHC는 업그레이드를 위해 휴식 중이다. 2010년 본격적으로 가동된 뒤 2013~2015년에 이어 2018년부터 두 번째 업그레이드가 진행되고 있다. LHC는 잠시 멈췄지만 그간 쌓아놓은 데이터 분석 결과는 쉬지 않고 나오고 있다
(35쪽 참고 ☞ 바로가기 '지 프라임? 렙토쿼크?새 입자가 LHC 실험결과 설명할까').
재가동은 2022년 3월로 예정돼 있다. 본래 올해 초까지 업그레이드를 마치고 재가동될 계획이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1년가량 연기됐다. 이번 업그레이드를 마치면 LHC에서는 이전보다 10배 많은 입자 충돌이 발생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양 교수는 “재가동 뒤 암흑물질 발견과 중성미자의 본질을 탐구한 결과를 가장 기대하고 있다”며 “LHC에서 발견될 새로운 사실들은 인류의 지평을 계속해서 넓혀줄 것”이라고 말했다.
[인포그래픽] LHC 발견한 가입자 59종
올해 3월 CERN은 LHC의 지난 10년 성과를 훑으며 최근 새로 관측한 테트라쿼크 4종을 포함해 총 59종의 강입자를 정리했다. 강입자는 표준모형 상 기본입자인 쿼크와 글루온으로 구성되며 강력과 연관된 입자다. 이 중 2개 또는 3개의 쿼크로 이뤄진 중간자와 중입자는 비교적 우주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표준형 강입자’이며, 4개 또는 5개의 쿼크로 이뤄진 테트라쿼크와 펜타쿼크는 우주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실험적 강입자’다. 또한 입자의 질량이 클수록 빨리 붕괴해 관측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