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와 근육, 혈액, 뼈, 눈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는 세포입니다. 피부세포와 근육세포, 적혈구, 골세포, 망막세포 등은 모양과 기능이 모두 판이하게 다릅니다. 우리 몸에는 이렇게 천차만별의 특성을 지닌 세포가 200여 종 있습니다.
그런데 세포 안으로 들어가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모양과 역할이 모두 다른 세포 안에 담긴 유전물질은 모두 똑같거든요. 같은 유전물질을 지닌 세포가 천차만별로 다른 다양한 세포로 변하는 과정을 발생이라고 합니다. 난자와 정자가 만나 단일 세포인 수정란을 이루고, 이 수정란은 분열을 거듭하며 다양한 세포로 거듭나 복잡하고 정교한 조직과 기관을 형성합니다.
이런 신비로운 발생 과정이 차질 없이 일어나는 데에는 세포 사이의 소통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세포끼리 서로 다양한 조절 신호를 주고 받으며 각자 역할을 나눈 덕에 인체는 복잡하면서도 조화로운 하나의 개체가 될 수 있습니다. 뇌 속 신경세포(뉴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 소개할 논문은 신경세포가 다른 신경세포와 신호를 주고받으며 소통하는 원리를 밝혀낸 1992년 ‘사이언스’ 논문입니다.
눈에서 뇌까지, 망막 신경절 세포의 여정
신경세포는 두 신경세포 사이의 연결부위인 ‘시냅스(synapse)’라는 네트워크를 통해 소통합니다. 발생 과정 중 만들어지는 신경계 시냅스의 경우, 신경세포에서 길게 뻗어나온 일종의 가지인 ‘축삭(axon)’이 목적지를 향해 뻗어나가면서 형성됩니다. 신경신호를 전달하는 축삭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신의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길고 짧은 여행을 합니다. 어떤 축삭은 무려 1m나 이동하기도 합니다.
축삭은 이미 정해져 있는 자신의 목적지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시냅스를 형성합니다. 축삭의 길 찾기 여정을 가능하게 한 비결도 바로 세포의 소통입니다. 여러 가지 ‘안내 신호(guidance cue)’를 통해 축삭을 이끕니다. 어떤 안내 신호는 목적지로부터 점차 퍼져나가 축삭이 방향을 찾을 수 있는 등대 역할을 합니다. 축삭이 성장하는 부위 끝이나 축삭이 지나갈 길에 안내 신호를 표시해두기도 합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논문은 눈의 망막에 있는 ‘망막 신경절 세포’의 성장 원추가 목적지인 ‘시개(optic tectum)’까지 이어진 길에 분포한 안내 신호 변화를 감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마치 길에 위치한 표지판을 보고 길을 찾듯, 신경세포도 신호의 도움을 받아 경로를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세포막 카펫으로 신경세포 발생의 비밀 밝히다
우리가 어떤 물체를 보면 수정체를 통과하며 상하좌우가 바뀌어 망막에는 거꾸로 된 상이 맺힙니다. 망막에 있는 신경세포는 명암, 움직임, 모양, 색의 정보를 각각 받아들여 뇌까지 전달합니다. 이때 각각의 세포가 뇌에서는 다시 반대쪽 위치로 연결되기 때문에 우리는 상하좌우가 반대인 상이 아닌, 제대로 된 물체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코 쪽에 위치한 망막 신경절 세포는 시개의 뒤쪽 세포와 시냅스를 형성하고, 귀쪽 부위에 있는 망막 신경절 세포는 시개의 앞쪽 세포와 시냅스를 형성하는 식입니다. 등쪽 그리고 배쪽에 위치한 신경절 세포도 마찬가지로 교차됩니다. 이렇게 망막 신경절 세포들은 목적지인 시개에서 일종의 지형도를 만드는데, 이를 ‘망막 시개 지도’라고 합니다.
신경과학자들은 망막 신경절 세포와 시개의 세포에는 각각 고유한 화학적 라벨(표시)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81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로저 스페리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교수가 제시한 ‘화학친화력 가설’입니다. 망막 신경절 세포가 특정 화학적 라벨과 친화력을 가진 신경세포와 시냅스를 형성하고, 코와 귀 혹은 등과 배를 축으로 위치 정보를 주는 화학 라벨이 구역에 따라 각기 다른 농도 차이로 존재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실제로 축삭의 성장 원추는 싫어하는 안내 신호는 회피하고, 좋아하는 안내 신호가 있는 방향으로 이동하며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사실이 당시 밝혀졌습니다. 귀쪽 망막 신경절 세포가 싫어하는 물질(에프린A)은 시개 뒤쪽 부분에 많고, 시개 앞쪽에는 적습니다. 따라서 귀쪽 망막 신경절 세포의 축삭은 시개 뒤쪽을 향해 더 자라려 하지 않고, 앞쪽 부분에서 이동을 멈추고 시냅스를 형성합니다.
하지만 이번 논문의 저자인 헤르비히 바이어 독일 막스플랑크 신경과학연구소 교수는 스페리 교수의 가설보다 더 복잡한 형태의 회피기작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면 안내 신호의 유무뿐만 아니라 농도 변화까지 인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움직임이나 속도뿐만 아니라 속도가 변하는 정도인 가속도까지 감지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연구팀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줄무늬 카펫 분석’이라는 실험을 활용했습니다(아래 사진). 시개 앞쪽 세포와 뒤쪽 세포를 번갈아 두고 줄무늬 모양의 세포막 카펫을 만든 뒤 그 위에서 망막 신경절 세포가 어떻게 자라는지 관찰하는 방법입니다. 시개의 앞쪽 세포와 뒤쪽 세포는 각각 분비하는 안내 신호의 농도와 종류가 다르니 망막 신경절 세포가 어떤 신호에 반응해 자라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연구팀은 좀 더 세밀하게 망막 신경절 세포의 성장을 확인하기 위해 세포막 카펫에 농도가 연속적으로 변하는 ‘농도 기울기’라는 요소를 추가했습니다. 앞부분은 시개 뒤쪽 세포들의 밀도가 낮다가 점차 촘촘해지는 카펫을 제작한 뒤 망막 신경절 세포의 변화를 관찰했습니다.
실험 결과는 연구팀의 가설에 정확히 부합했습니다. 세포막 카펫에서 코쪽 망막 신경절 세포의 축삭은 끝부분까지 잘 자란 반면, 귀쪽 망막 신경절 세포의 축삭은 자라다가 중간에 멈추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세포가 자라는 속도는 일정하기 때문에 시개 세포의 농도차에 따라 세포의 길이가 달라진다는 것이 증명된 셈입니다.
또 연구팀은 망막 신경절 세포의 움직임을 좀 더 자세히 분석하기 위해 세포막 카펫의 농도 기울기를 다양하게 제작했습니다. 망막 신경절 세포는 완만한 농도 기울기(단위거리당 1%)의 세포막 카펫에서는 길게 자랐고, 가파른 농도 기울기(단위거리당 5%)에서는 자라다 멈췄습니다. 이를 통해 연구팀은 세포가 화학 라벨의 특정 농도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농도 기울기를 인식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신경세포의 삶과 죽음을 이해하다
이 논문에서는 망막 신경절 세포가 목적지인 시개까지 자라는 과정이, 싫어하는 물질을 회피하는 단순한 기작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했습니다. 특히 성장 원추가 세포막 표면에 있는 물질의 농도차를 인식해 그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준 첫 번째 연구라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또 성장 원추는 세포막에 위치한 안내 신호만으로도 긴 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습니다. 보통 목적지로부터 퍼져나오는 안내 신호에 따라 축삭의 성장 원추가 자랄 수 있는 거리는 300~500µm(마이크로미터·1µm는 100만분의 1m)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논문에서 성장 원추가 그 5배 이상인 2.5mm 넘게 이동하는 것이 관측됐습니다.
이 안내 신호의 정체는 에프린A이며, 귀쪽 망막 신경절 세포의 성장 원추에 이를 감지하는 에프린A 수용체가 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습니다. 이 연구 이후로 ‘축삭 유도’에 대한 비밀을 풀기 위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에프린A 이외에도 네트린이나 세마포린 등 다양한 신호 유도 물질이 밝혀졌고, 이 물질들이 성장 원추 내 어떤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하는지 연구되고 있습니다.
필자가 속한 연세대 의대 발생신경생물학 실험실에서도 개구리와 쥐의 시신경으로 신경세포의 발생과 죽음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신경세포가 태어나 복잡한 신경회로를 형성하고 이를 유지하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 뇌는 약 수백억 개의 신경세포로 이뤄진 복잡한 기관입니다. 이들은 발생 과정 동안 수많은 시냅스를 형성하고 정확한 신경 회로들을 만들어 냅니다. 이때 축삭 유도가 비정상적으로 이뤄지면 신경발달장애나 파킨슨병 등 치명적인 신경 퇴행성 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축삭 유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발생 과정과 신경 세포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