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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의 승리인가, 무모한 도박인가

미·소의 우주개발 싸움으로 인류의 달 착륙 앞당겨져

“한 인간에게는 보잘 것 없는 한 발자국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입니다.”


“한 인간에게는 보잘 것 없는 한 발자국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입니다.”

한국 시간으로 7월 21일은 미 우주 비행사 닐 암스트롱과 에드윈 알드린을 태운 이글호가 달 착륙에 성공한 지 35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글호를 실은 아폴로 11호가 케네디 우주센터를 출발해 달의 궤도 진입에 성공한 다음 날의 일이었다. 지구촌은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가 됐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꿈꿔왔던 달 여행이 2천여년 만에 실현된 순간이었고, 우주 속의 지구를 눈으로 확인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인류 역사의 새 장을 연 것으로 평가되는 아폴로 11호의 성공 뒤에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이라는 당시 정치적 조류가 숨어 있었다. 시발점은 1957년 10월 4일 소련의 세계 최초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 성공이었다. 미국은 소련의 ‘선제공격’에 놀라 이듬해 급히 미항공우주국(NASA)을 신설하고, 즉시 달 탐사 프로그램을 내놓았다.

하지만 당시 미국이 발표한 달 탐사 프로그램의 중심 과제는 유인 우주선 개발이 아니었다. 장기적으로는 유인 우주선 개발을 지향하고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과학 연구를 위한 탐사 위성을 개발하고, 통신 기술과 로봇 기술 등을 개발하는데 우선적인 목표를 뒀다.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보좌관이었던 제롬 위스너는 미국의 과학기술이 우주 비행사를 보낼 만큼 발전돼 있지 않으며, 유인 달 착륙 계획은 실패할 확률이 너무 높다고 주장했다. 이후 1961년까지 미국의 이런 입장은 지속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61년 4월 12일 미국의 우주 개발 계획을 전면 수정하게 되는 또 다른 사건이 발생했다. 이번에도 역시 계기는 소련이었다. 이 날 소련에서는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이 우주선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지구 궤도를 선회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소련에게 두번이나 패배한 셈이었다. 당시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은 모든 측면에서 미국과 소련이 힘의 균형을 이뤄야 세계 질서가 유지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련이 미국보다 우주 개발에 앞서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즉시 NASA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검토하도록 했다. 미국이 사회주의 소련을 이기려면 우주에 실험실을 운반하는 것이 좋은가, 달을 돌고 오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인간을 달에 갔다 오게 하는 것이 좋은가. 이에 대해 죠지 마샬 우주비행센터장이었던 베르너 폰 브라운은 3인 우주선을 이용한 달 착륙 계획으로 소련을 이길 수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다. 케네디 역시 인간을 달에 보내는 것이 소련을 이기는데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같은 해 5월 5일 우주 비행사 앨런 쉐프드가 미국의 첫 유인 우주선인 프리덤 7호를 타고 대기권에서 5분 동안 비행하는 데 성공했고, 케네디는 이를 계기로 즉시 아폴로 계획을 공표했다. 그는 5월 25일 의회연설에서 60년대가 끝나기 전에 미국인의 손으로 인간을 달에 보내자고 촉구했다. 장기적인 우주개발에서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는 것만큼 중요한 과제가 없다고 하면서 아폴로 계획이라고 이름 붙인 유인 달 착륙 계획을 추진할 것을 발표했던 것이다. 이처럼 아폴로 계획은 소련에 무너진 미국의 자존심 회복이라는 정치적인 목적이 다분히 담긴 계획이었다.

아폴로 계획의 공표로 미국의 우주 탐사는 가속이 붙었다. 케네디가 아폴로 계획을 공표한 지 8년 후 미국 현지 시각으로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11호는 달 착륙에 성공했다.

이로써 미국은 소련에 구겨진 자존심을 세울 수 있었지만, 이를 위해 미국은 큰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우선 아폴로 계획으로 미국은 심각한 재정적 압박을 받았다. 이 계획이 발표된 후 NASA의 예산은 10배로 증가해 1972년까지 지속된 아폴로 계획에 들어간 총 비용은 무려 2백36억 달러였다. 머큐리 계획과 제미니 계획이 각각 4억 달러와 13억 달러 가량의 규모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폴로 계획이 얼마나 거대한 프로젝트였는지 알 수 있다.

자연히 다른 부분의 예산을 줄여야했다. 케네디의 후임인 린든 존슨 대통령은 재임 즉시 가난과의 전쟁을 선포해야 했고, 1965년 예산 국장 슐츠는 아폴로 계획의 예산을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미 아폴로 계획은 미국인의 자존심의 상징이 됐고, 이 때문에 반대의 목소리에 힘이 실릴 수 없었다. 존슨 역시 아폴로 계획이 성공하면 다른 정책적 결함은 묻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아폴로 계획의 지원을 지속했다.

또한 아폴로 계획은 무리하게 추진된 탓에 언론이 입을 봉하고 있는 사이 크고 작은 사고를 동반했다. 발사 전 로켓 추진체의 연료 폭발은 비일비재했고, 발사 후에 폭발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1961-1964년까지 달의 근접 촬영을 위해 계획된 레인저 우주선도 6번 발사 모두 실패했다. 1967년에는 우주 비행사 세명이 화재로 죽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아폴로 11호의 귀환 역시 요행의 산물이었다. 이글호가 달 표면에 착륙하기 직전 착륙선에 남아 있던 연료는 30초분이 채 안되는 것이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착륙 시간이 지연됐다면 암스트롱과 알드린은 달에 영원히 남아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아폴로 계획은 미국의 자존심은 세웠지만 자국의 경제와 우주 비행사의 안전을 담보로 한 위험천만의 게임이었다.

2004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박진희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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