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어려워요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사스코로나바이러스-2의 ‘민낯’이 국내 연구진에 의해 밝혀졌다. 사스코로나바이러스-2가 숙주세포에서 만들어내는 모든 RNA를 찾아낸 것이다.
기초과학연구원(IBS) RNA 연구단은 질병관리본부 국립보건연구원과 협력해 RNA 전사체 지도를 완성했다. 또 바이러스의 외피나 스파이크 단백질을 만드는 하위유전체 RNA(sgRNA·subgenomic RNA)의 종류를 알아내고 RNA 변형도 최초로 확인했다.
위기 상황에 기술이 있다면 나서야
“전 세계 수십 억 명을 위협하고 있는 바이러스와 한 공간에 있다니 기분이 이상했어요.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죠.”
장혜식 RNA 연구단 연구위원(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은 국립보건연구원에서 사스코로나바이러스-2의 샘플을 처음 가져왔던 2월을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는 대구에서 확진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직후였다.
김빛내리 단장(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이 이끄는 RNA 연구단은 중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급속도로 늘어나는 상황을 보며 일주일 고심 끝에 사스코로나바이러스-2 분석을 결심했다. RNA 연구단에서 수없이 해왔던 ‘나노포어(nanopore) 직접 RNA 염기분석법’을 활용하면 되겠다는 판단이었다.
나노포어 기술은 긴 RNA를 절단하지 않고 통째로 분석하는 기술이다. 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 크기의 분자구멍에 전류를 흘린 다음, 유전물질이 구멍 속으로 들어올 때 전류의 변동 정도를 측정한다.
RNA 연구단은 나노포어 기술로 RNA 전사체를 분석했다. 전사체는 숙주세포 안에서 생산된 RNA 총합이다. 전사체를 분석하면 바이러스 유전자가 단백질을 생산할 때 활용하는 매개 물질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다. 연구단은 분석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유전체를 대량 증폭해 분석하는 ‘DNA 나노볼 염기분석법’도 함께 진행했다.
장 연구위원은 “RNA 연구단이 나노포어 염기분석법 장비를 유일하게 보유한 곳은 아니지만 분석 경험이 많기 때문에 사스코로나바이러스-2 분석도 자신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 “RNA 연구는 사회에 즉각적으로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드물다”며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과학자들이 빠르게 바이러스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연구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운도 따랐다. 그동안 RNA 연구단은 바이러스보다는 암세포와 같은 사람 유래 세포로 주로 연구했다. 그런데 마침 당시에는 김동완 연구원이 B형 간염 바이러스를 연구하고 있었다. B형 간염 바이러스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실험실이 고위험병원체 취급이 가능한 생물안전 등급 허가를 받아야 한다.
RNA 연구단의 실험실은 생물안전 2등급 시설로 허가를 받은 상태였다. 김 연구원은 “B형 간염 바이러스를 분석하느라 시약과 장비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며 “샘플만 도착하면 곧바로 분석을 할 수 있는 상태였다”고 말했다.
샘플은 국립보건연구원에서 전달받았다. 원숭이 신장세포(Vero cell)를 숙주세포로 삼은 사스코로나바이러스-2를 배양한 것으로, 전파 능력이 없고 생물안전 등급도 2등급을 만족했다.
RNA 연구단은 샘플을 받기 2주 전부터 실험 설계에 돌입했다. 실험 절차부터 장비 배치까지 중간에 막히거나 꼬이는 단계가 없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덕분에 샘플을 받고 3일 만에 염기서열을 모두 읽어냈다. 같은 시기 동일한 분석을 한 호주 연구팀은 2주가 넘게 걸린 일이었다.
분석 결과를 담은 논문은 국제학술지 ‘셀’ 4월 23일자에 실렸다. doi: 10.1016/j.cell.2020.04.011
논문 게재 과정 역시 쾌속이었다. 보통 논문을 내기 전에 학술지 편집자에게 논문을 검토해줄 것인지 의사를 묻는 e메일을 보내는데, 답장을 받기까지 4~5일이 걸린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작 4분(!)만에 답장이 도착했다. 그 뒤엔 심지어 논문을 보내기 전부터 논문을 검토해줄 전문가들이 섭외돼 있었다.
전 세계 가장 정밀한 유전체 지도
이번 연구는 지금까지 나온 사스코로나바이러스-2 유전체 지도 중 가장 정밀한 지도라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 RNA 연구단보다 5일 앞서 호주 멜버른대 연구팀이 RNA 염기분석 결과를 ‘바이오아카이브(bioRxiv)’에 공개했다. 그러나 해당 결과는 염기서열을 읽어내는 데 중점을 둬 분석 내용은 많지 않았다. doi: 10.1101/2020.03.05.976167v1
RNA 연구단은 읽어낸 염기서열을 분석해 RNA의 화학적 변형과 sgRNA 등을 알아냈다. 지질과 단백질로 만들어진 사스코로나바이러스-2 껍질 안에는 약 3만 개의 염기가 일렬로 이어져 있는 유전체 RNA(gRNA)가 있다.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에이즈·AIDS)을 일으키는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의 RNA가 약 1만 개의 염기로 이뤄진 것을 고려하면 사스코로나바이러스-2의 gRNA는 특이할 정도로 크다.
gRNA는 숙주세포의 리보솜을 빌려 자신을 복제해 줄 효소를 생산한다. 효소는 gRNA를 주물로 활용해서 또 다른 RNA 가닥을 만들어낸다. 또 효소는 여러 개의 sgRNA를 제조한다. sgRNA는 스파이크, 외피와 같은 바이러스 입자를 구성하는 여러 단백질을 합성하고, 이것들이 복제된 gRNA를 감싸며 숙주세포 안에서 새로운 바이러스를 조립한다.
RNA 연구단은 사스코로나바이러스-2가 최소 9종류의 sgRNA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기존에는 10종류로 예측됐지만, 한 종류(ORF10)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다.
구조단백질인 뉴클레오캡시드 단백질(N), 스파이크 단백질(S), 막 단백질(M), 외피 단백질(E)을 만드는 sgRNA와,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액세서리단백질(ORF3a, ORF6, ORF7a, ORF7b, ORF8)을 만드는 sgRNA가 여기에 해당한다.
일부 RNA에 특이한 화학적 변형이 일어났다는 점도 새롭게 밝혔다. RNA상에서 ‘수식현상’이라고 불리는 화학적 변형이 최소 41군데 관찰됐다. 김 연구원은 “적절한 대조군을 설정해 RNA에 화학적 변형이 일어났음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바이러스 연구에 계속 관심
RNA의 화학적 변형은 숙주세포의 면역작용을 피하는 기능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모든 변형이 그런 것은 아니기에 추가 분석이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어떤 변형이 일어났는지도 앞으로 더 연구해야 한다. 최종 목표는 RNA 수식현상이 사스코로나바이러스-2의 생활사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내 바이러스의 약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치료제와 백신 개발에 새로운 물꼬를 틀 수 있다.
하지만 성공 확률이 매우 낮은 도전적인 연구다. 김 연구원은 “RNA 화학적 변형의 정체를 파악하는 일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은 없다”면서도 “사람 폐세포에 사스코로나바이러스-2를 감염시키는 식으로 실험 방식을 바꾸고 연구에 속도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사스코로나바이러스-2에 관한 연구는 전 세계에서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위기상황인 만큼 사람들의 관심이 뜨겁기 때문이다. 장 연구위원은 “최근 RNA 바이러스가 점점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만큼, 사스코로나바이러스-2 연구뿐만 아니라 바이러스 연구 전반에도 관심을 놓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