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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뇌사로 사망한 환자에게 인공호흡기 등을 다는 행위는 여러가지 면에서 불합리하다. 이는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단순한 '심폐기능의 연장'일 뿐이다.

죽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가장 중대하며 엄숙한 주제다. 죽음은 고래로 사회적 종교적 의식의 주축을 이루었으며, 문학과 철학의 주요 소재가 됐다. 또한 죽옴은 생물학자의 깊은 연구과제이며 의사들이 끝없이 투쟁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고 소생시키려는 의학적인 노력은 금세기에 들어 연명술과 소생술의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다. 한편 이런 발전은 생과 사의 경계를 모호히 하여 죽음의 정의와 판정기준을 고쳐야 할 과제를 낳았다.

죽음의 정의와 판정은 생명의 유무를 결정짓는 매우 중대한 행위로서 역사적 전통의 측면, 윤리 및 종교적 측면에서 모두 예민한 사회적 과제다. 또한 이 판정은 인간의 권리 및 의무의 발생과 소멸이 직결된 법률문제를 안고 있다.

죽음을 판정하는 데는 몇가지 단계가 있다. 우선 명확하고 간결하게 죽음을 정의해야 하고, 이에 따라 죽음을 인지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며, 이후 죽음의 확인 과정을 통해 죽음을 판정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죽음의 인지·확인의 판정 과정은 의학이 결정해야 할 범주이며, 죽음의 고지는 법률적 범주다.

불합리한 심폐사
 

뇌기능을 잃어도 인공호흡기로 심폐기능을 연장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죽음에 대한 통념은 심장기능이나 폐기능이 멎는 심폐사였다. 그러나 현재 의학계에서는 뇌기능이 돌이킬 수 없게 된 뇌사상태에서 심폐 기능만의 지속은 생명체로서 무의미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또한 의학기술의 발달은 자신의 심폐기능이 멈춘 후에도 인위적으로 그 기능을 지속시킬 수 있어 죽음의 시작을 언제로 보느냐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이미 많은 선진국에서 뇌의 죽음을 개체의 죽음으로 정의하고 있다. 1968년 제22차 세계의사회는 호주의 시드니에서 뇌사를 개체의 죽음으로 정의해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시드니 선언). 1983년 이탈리아의 베니스에서 열린 제35차 세계의사회는 이를 재확인하고 보완했다.

이처럼 뇌사를 죽음으로 인정하려는 목적은 이미 의학적으로 불합리한 전통적 죽음의 정의를 보완·수정하여 사회발전에 기여하자는 데 있다. 이미 뇌사로 사망한 환자를 오랫동안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나 심 박동기를 달아,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심폐기능의 연장을 기도함으로써 환자 가족들이 겪는 정신적 고통과 경제적 부담 및 사회적 손실을 야기한다는 점이 뇌사에 대한 공식적 선언을 부른 것이다. 1967년 남아연방의 버너드박사가 시행한 세계 최초 심장이식수술의 성공 후 한 생명의 사망이 다른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장기기증의 필요성이 증가일로에 있어, 이 같은 움직임에 박차가 가해졌다.

'시드니 선언' 이후 1981년 미국에서는 대통령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죽음의 판정에서 의학적, 법적 및 윤리적 문제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현재 미국의 33개 주가 뇌사를 법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나머지 주는 법에 의한 규정은 없으나 뇌사를 의학적인 죽음으로 승인하고 있다.

세계적으로는 55개국 이상이 뇌사를 사망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데, 동양권에서는 대만이 1987년 뇌사를 인정해 심장이식술을 성공시켰다. 최근 일본에서는 이 문제가 중요한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한의학협회가 1989년 제1차 뇌사공청회를 개최한 후 1989년 뇌사연구특별위원회를 구성했고, 같은 해 7월과 1990년 두 차례에 걸쳐 뇌사입법을 건의했다. 이후 1992년 제2차 뇌사공청회를 거쳐 다음해 3월 '뇌사에 관한 선언'이 선포됐다.

예전에는 죽음을 일으키는 중요 장기의 기능정지가 어디에서 시작하든 심장과 폐기능의 정지가 곧 따라와 사망진단에 큰 문제가 없었다. 심장 폐 뇌 중 한가지가 돌이킬 수 없게 정지되면, 다른 한쪽의 계속적인 기능 유지를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혈액순환과 호흡은 모든 뇌기능을 잃은 후에도 인공호흡기를 비롯한 의학적 방법으로 유지할 수 있다. 이전에는 인간의 생존여부를 심폐기능의 유무로 결정했으나, 이 기준의 적용이 심폐 소생기구 때문에 어려워졌다면 뇌사를 죽음의 정의로 보려는 견해가 불가피하다.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죽음은 가장 중대하며 엄숙한 주제다.


많은 연구와 임상경험을 근거로 현재 의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승인된 정의에 따르면, 첫째 순환기능과 호흡기능의 돌이킬 수 없는(비가역적) 정지가 이미 있거나, 둘째 뇌간을 포함하는 뇌 전체의 모든 기능이 돌이킬 수 없이 정지된 개체는 사망한 것이다.

이 기준은 죽음의 판정을 위해 미국의 대통령특별위원회가 미의학협회 미변호사협회 통일주법의원전국협의회 등 3개 기관과 협조해 만든 '통일사망판정법'의 골자이며, 전세계적으로 채택된 기준이기도 하다. 대한의학협회의 '뇌사에 관한선언'도 이 내용들을 포함한다. 여기서 강조할 점은 뇌사에 근거를 두는 기준은 '새로운 종류의 죽음'을 도입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유기체 전체의 와해'라는 단일현상으로서의 죽음의 개념을 보강하는 것이다. 이는 단지 죽음을 인지하는 새로운 방법을 허용할 뿐이다.

사망을 판정할 때 의사는 다음의 기준을 충촉시켜야 한다. 첫째 생존하고 있는 개체를 사망으로 분류하는 과실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사망한 시체를 생존했다고 분류하는 과오를 최소한 줄여야 한다. 셋째 죽음의 판정은 불합리하나 지체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넷째 명백해야 하며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여러 가지 임상상황에 적응이 가능해야 한다.

한편 모든 뇌기능 상실은 경험이 있는 의사에 의해 관찰기간 초기에 입증돼야 한다. 관찰지속기간은 임상적 판단에 관한 사항으로서, 약물중독, 저체온, 5세 이하 소아, 쇼크 등의 환자를 제외하면, 뇌기능이 정지한 6시간 후에는 뇌기능이 다시 회복한 사례가 없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대한의학협회의 뇌사판정기준에서도 대뇌기능과 뇌간기능 상실에 관련된 사항들을 6시간 경과 후 재확인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확인검사를 하지 않더라도 비가역적 상황이 충분히 입증된 후 최소한 12시간 동안 관찰할 것을 권고한다.

그러나 손상의 범위를 확인하기 어려운 뇌손상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24시간 관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영아와 소아는 뇌손상에 대한 저항이 강하며, 성인보다 더욱 오랜 기간 동안 신경학적 검사로 무반응성을 나타내더라도 다시 뇌기능을 회복할 수 있다. 따라서 의사가 5세 이하 어린이의 사망판정에 신경학적 기준을 적용할 때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입법화가 시급

대한의학협회는 뇌사에 관한 선언에서 생후 2개월에서 1년 사이의 연령군은 48시간 간격으로 2회의 판정기준검사와 2회의 뇌파검사를, 1세에서 5세 사이는 성인에서와 같이 2회의 판정기준검사와 1회의 뇌파검사를 하되 24시간 간격을 둘 것을 권고하고 있다.

뇌사를 판정할 때 뇌기능검사에 경험이 많은 의사를 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한의학협회는 신경과 신경외과 마취과 및 뇌사판정 능력이 있는 전문의 2인과 담당의사가 함께 판정하도록, 그리고 장기이식에 관여하는 의사는 참여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죽음을 판정하고 고지할 때 전통적으로 의학전문가의 의견이 존중돼 왔다.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표준이 일반 국민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전문가의 기술과 기능이 믿을만한 수준으로 향상되면 법은 이에 따라 죽음에 대한 공통된 의견을 반영해주는 것이 상례다.

죽음의 정의와 판정에 대한 새 기준은 급속도로 변천하는 우리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 예상되므로 이에 관한 사항은 반드시 성문법으로 입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입법부나 사법부는 의학전문가들이 마련한 죽음의 판정 및 고지의 기준을 조속한 시일 내에 입법화하고, 의학전문가들이 이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법적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보호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런 추진 과정에서 사려 없이 전통을 고집하는 과거집착적 사고방식이나 비합리적 자세로 새로운 지식에 저항하려는 태도는 금물이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어떤 법적 정의도 장기 증여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거나, 또는 생명유지를 위한 치료를 제한하는 방향으로 이용돼서는 안될 것이다.

뇌사에 대한 의학적 판정 지침

"뇌간을 포함한 뇌 전체의 기능이 돌이킬 수 없이 정지된 인간은 사망한 것이다"


대뇌기능의 상실 : 깊은 혼수상태에 있으며 대뇌의 무수용성과 무반응성이 있어야 한다. 의학적 상황에 따라서는 뇌파 혹은 혈류검사와 같은 확인 검사가 필요할 때가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 이런 검사 없이 판정이 가능하며 필수조건이 아니다.

뇌간기능의 상실 : 자발호흡의 비가역적 소실, 양안동공의 확대 고정, 뇌간 반사(광반사 각막반사 안구두부반사 전정안구반사 모양체척추반사 구역반사 기침반사 등)의 소실 등이 뇌간기능의 상실을 의미한다. 널리 사용되는 무호흡 검사는 자발호흡이 소실된 이후 자발호흡의 회복가능여부를 판정하는 검사로서, 1백% 산소 또는 95% 산소와 5% 이산화탄소를 10분간 인공호흡기로 호흡시킨 후 인공호흡을 중단하고 1백% 산소를 기관 내관을 통해 분당6L를 공급하면서 10분 이내에 혈액 동맥 내 탄산가스분압(PaCO₂)이 60㎜Hg 이상으로 상승함을 확인한다. 이 정도의 탄산가스 과잉증은 30초 이내에 호흡노력을 자극하는데 충분하다. 이 조작으로도 자발호흡이 유발되지 않으면 호흡 정지가 비가역적이라고 판정한다. 말초신경계의 활동성과 척추반사는 사후에도 존속할 수 있다.

1995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이원로 내과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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