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술 읽혀요
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이었다. TV 전원을 연결하다가 불꽃이 튀는 현상을 처음으로 겪었다. 항상 주변에 있던 전기였지만, 직접 그 존재를 마주한 첫 순간이었다. 나는 전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집안 화장실에 전구가 나갔다. 이게 문득 전선이 끊어졌기 때문인지, 전구의 수명이 다했기 때문인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창고에서 찾은 전구를 끼우다가 몸속에 따끔한 느낌(지금 생각해보면 살짝 감전됐던 것 같다)이 들어 전구를 놓치고 말았다.
전구는 박살이 났고, 어머니께 혼나면서도 ‘감전이 됐으니 전선이 아니라 전구 문제였구나!’라는 깨달음에 웃음이 났다. 화장실은 엉망이 됐지만, 궁금증은 해결된 셈이었다.
전기 기사는 고교 시절 최고의 친구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전기 과학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98년, 그전까지는 서점에서 가끔 사보던 과학동아를 정기구독하기 시작했다.
과학동아에서 다룬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던 ‘전류전쟁’ 기사는 몇 번이고 읽었던 것 같다. 교류를 써야 한다고 주장한 니콜라스 테슬라와 직류를 고집한 토머스 에디슨에 대한 다양한 서적들을 더 찾아보는 계기가 됐다.
기억에 남는 코너는 대학 연구실을 소개하는 기사였다. 당시 나는 대학에 가봐야 중·고등학교에서처럼 수업 듣고 과제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단지 ‘선생님’을 ‘교수님’이라고 바꿔 부르는 점을 빼면 특별할 것이 없을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런데 이 기사를 보고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모든 교수가 개인 연구실을 가지고, 자신의 전공 분야를 더 깊이 연구하는 동시에 대학원생들을 지도하는 교육자의 역할까지 한다니! 이때 나는 처음으로 교수라는 직업에 관심이 생겼고, 교수가 돼서 전기 연구를 하는 실험실을 꾸려 보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됐다.
과학동아를 정기구독하며 꼼꼼히 챙겨본 기간은 단 2년이었다. 더 구독하고 싶었지만, 2001학년도 대학 입시를 앞두고 공부를 집중적으로 할 수 있는 기숙사에 입소하면서 정기구독을 끝냈다. 그렇게 과학동아와의 인연은 끊어지는 듯했다.
눈에 딱 들어온 나노기술 기사
2001년 성균관대 전기전자 및 컴퓨터공학부(현재 전자전기공학부)에 진학했다. 전기전자 및 컴퓨터공학부는 전자와 전기, 컴퓨터 등 세 학과가 통합된 학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전자과는 각종 전자 부품에 들어가는 소자부터 회로 설계법을, 전기과는 송전과 발전 등 실제 전기 사용법을 배운다. 컴퓨터학과는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법에 치중한다.
나는 전자과에 집중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컴퓨터에서 흔히 말하는 메모리 1GB(기가바이트)란 전자소자 8억 개가 포함돼 있다는 의미다. 각 전자소자는 전압으로 반도체 물질의 저항을 변화시켜, 전기가 흐르면 1, 반대의 경우 0을 표현한다. 이처럼 전자소자를 자유자재로 조절해 컴퓨터를 동작시킬 수 있다는 점에 큰 흥미를 느끼게 됐다. 곧 반도체 기술 관련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자료를 찾아봤다.
그런데 이때도 눈에 들어온 건 과학동아였다. 과학동아에서 미래 유망 기술로 나노기술을 설명하고 있었고, 나노기술로 반도체를 만들면 당시(2000년대 중반)보다 수만 배 더 높은 집적도로 회로를 설계할 수 있다고 강조돼 있었다.
특히 머리카락보다 10만 배 얇은 지름 3nm(나노미터 ·1nm는 10억분의 1m)인 탄소나노튜브라는 나노물질이 현재 반도체 칩에 들어가는 트랜지스터의 주재료인 실리콘을 대체할 차세대 소재로 손꼽힌다는 내용은 인상적이었다.
나노기술 관련 서적 등을 더 찾아본 뒤, 2007년 나는 결국 탄소나노튜브 연구에서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던 이영희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의 연구실 소속 대학원생이 됐다. 모교에 탄소나노튜브 분야의 세계적인 연구자가 있었다니. 이것도 내게 신선한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탄소나노튜브에서 그래핀으로
대학원에서 하는 공부는 교과서에도 없는 새로운 내용의 연구 주제를 선정하고 실험을 통해 검증해야 하는 일이다. 나는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해 반도체 전자소자를 직접 만들고, 전기적 특성을 측정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낸 뒤 실패하면, 그 원인을 찾아 개선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나는 실험을 게임처럼 즐겼고, 계속 도전할 수 있었다. 실험에 빠져 미친듯이 연구하다 보니 4년이 훌쩍 지났고, 박사학위를 받고 졸업할 수 있었다. 이 기간에 내가 국제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은 8편이었다(연구실 졸업요건의 4배를 달성했다!).
이 시점에서 나는 나노기술을 이용한 반도체 전자소자 연구에 매진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깊이있는 연구를 하는 동시에 미래의 동료가 될 후학도 양성할 수 있는 교수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더욱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교수가 되려면 다른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연구 경력을 쌓고 구체적인 성과를 내야 했다. 박사후연구원은 대학원처럼 지도교수가 있는 게 아니다. 이 때문에 본인 스스로의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
박사후연구원에 지원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대학원 시절 출판한 논문 목록을 담은 이력서를 관심있는 대학의 교수나 연구소의 e메일로 전송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했더니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등이 박사후연구원 자리를 제안했다. 나는 2011년 3월 나노과학 소재 분석 전문가인 시앙펑 두안(Xiangfeng Duan) UCLA 화학 및 생화학과 교수 연구실에 합류했다.
UCLA에서는 탄소나노튜브의 사촌 격인 그래핀을 주로 연구했다. 그래핀은 육각판 모양의 탄소 결합체 한 장만 떼어낸 2차원 구조이며, 탄소 원자 1개 정도로 두께가 매우 얇은 도체다. 일반적인 도체와 다르게 저항을 바꿀 수 있는 독특한 성질도 가졌다.
UCLA에서의 성과는 좋았다. 나는 그래핀과 반도체를 결합한 소자로 만든 트랜지스터의 전자 이동 속도가 반도체 트랜지스터보다 1000배 이상 빠르고, 광센서 감도도 200배 이상 높다는 사실을 검증했다. 이를 이용하면 초고속 컴퓨터와 초고감도 센서 제작을 앞당길 수 있었다.
이런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네이처 머티리얼스’와 ‘네이처 나노테크놀로지’에 각각 한 편씩 실렸고, 나는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만 30세가 되던 2013년 성균관대 교수로 임용됐다. ‘교수가 되겠다’던 고등학교 시절의 꿈을 이룬 것이다. 물론 이와 동시에 새로운 도전도 시작됐다.
알파고와 이세돌이 이끈 인공 뇌 연구
나만의 연구실이 생기자 이전 연구들과 겹치지 않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야겠다는 생각이 커졌다. 마침 2016년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바둑 인공지능(AI) ‘알파고’와 이세돌 9단 간의 역사적인 바둑 경기가 열렸다. 승패를 떠나 나는 이를 전자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알파고는 대용량 슈퍼컴퓨터 수백 대를 이용해 시간당 5만6000W의 막대한 전기에너지를 사용한다. 반면 이세돌 9단의 뇌는 주먹 두 개 정도의 크기(심지어 그중 일부만 사용한다)로 시간당 20W의 에너지를 소비했다.
만약 인간의 뇌와 같은 원리로 동작하는 인공 뇌를 만든다면 어떨까. 사실 이때 이미 인간 뇌의 동작을 모방할 수 있는 신개념 메모리로 ‘멤리스터(memristor)’가 개발된 시점이었다. 멤리스터는 저항값의 변화로 기억을 저장하는 새로운 소자다. 하지만 막 시작된 분야였고, 어떻게 발전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인공지능 뉴로모픽(neuromorphic) 시스템을 연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인공지능 뉴로모픽 시스템은 인간의 뇌를 모방한 시스템으로 인간의 오감(시각, 촉각, 미각, 후각, 청각) 데이터를 기계 스스로 학습해 판단하는 장치다. 뇌를 모방한다는 것은 결국 뇌 신경세포와 신경세포 사이에 존재하는 틈(시냅스)에서 벌어지는 전기적 변화를 밝혀 전자소자에 적용한다는 의미다.
우리 연구팀은 2016년 말 뇌세포와 시냅스의 특성을 완벽하게 모방하는 ‘플로팅게이트 멤리스터’를 최초로 개발했다. 플로팅게이트 멤리스터는 기존 멤리스터 대비 1000배 이상 높은 정확도를 기록했고, 해설(레이블)이 없는 정보를 사람처럼 스스로 학습하고 새로운 지식을 창출할 수 있는 자기주도학습도 구현했다. 이를 해설이 포함된 정보를 입력해주는 지도학습과 구분해 ‘비지도학습’이라고도 부른다. 지금도 나는 비지도학습 뉴로모픽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 과학동아를 보지 않았더라면 연구자이자 교육자인 교수라는 직업을 꿈꿀 수 있었을까. 과학동아에서 나노기술 기사를 읽지 않았더라면 탄소나노튜브를 연구 주제로 삼을 수 있었을까. 돌이켜보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기회는 운명처럼 찾아오기도 한다. 독자 여러분도 운명처럼 찾아오는 과학동아와의 만남이 자신의 길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