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넘어져 무릎에 상처가 났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약은 단연 소독약, 과산화수소다. 상처 부위에 바르면 따끔하지만 흰색 거품이 부글부글 나면서 오염물질들을 제거해줘 널리 사용된다. 상처 소독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청소할 때, 옷에 묻은 얼룩을 제거할 때도 유용하다.
과산화수소의 사용 범위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산업에서 더 필수적인 물질이다. 제지와 섬유산업에 탈색과 표백용으로 사용되는 것 외에도 반도체, 수처리 등 과산화수소를 쓰지 않는 산업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사실 가정에서 사용하는 소독약은 과산화수소의 농도가 3%에 불과하다. 나머지 97%는 물이다. 단 3%의 농도로도 세균들을 죽이는 과산화수소의 ‘파괴력’은 실제로 엄청나다. 과산화수소의 농도가 35%만 넘어가면 인체에 절대 닿아서는 안 된다. 그 이상의 고농도 과산화수소는 산업적 용도로만 사용된다.
파괴력의 원천은 매우 강력한 산화력에서 비롯된다. 과산화수소는 다른 물질을 산화시키는 산화제다. 중학교에서 산화제는 산소를 주거나 전자나 수소를 뺏는 역할을 한다고 배우는데, 이를 달리 말하면 다른 물질을 변형시키는 물질이라 할 수 있다.
과산화수소 소독약을 예로 들어 보자. 과산화수소가 상처에 닿으면 우리 몸속에 있는 카탈레이스라는 효소가 과산화수소(H2O2)를 물(H2O)과 산소(O2)로 분해한다. 분해 과정에서 우리가 호흡할 때 사용하는 보통의 산소가 아닌, 전자가 하나 더 있는 활성산소가 생긴다.
분자는 전자가 달랑 하나만 남아돌면 굉장히 불안해한다. 그래서 빨리 다른 물질로부터 전자를 하나 뺏어서 자신의 전자가 짝을 이루도록 만들려고 한다.
이런 분자를 ‘라디칼(radical)’이라고 한다. 과산화수소를 분해했을 때 나오는 라디칼은 상대방이 어떤 물질이건 간에 전자를 뺏을 정도로 불안함을 떨쳐내려는 욕구가 강하다. 그래서 과산화수소에서 분리된 활성산소가 주변에 있는 세균들에게서 전자를 뺏어와 말살시키는 것이다. 산업에서는 분해하기 굉장히 어렵다는 다이옥신과 같은 물질도 변형시켜 제거한다.
금보다 비싼 팔라듐 가격이 문제
과산화수소는 1818년 처음으로 합성됐고, 1940년대 독일에서 ‘안트라퀴논 공정’이라는 대량생산 기술이 개발되며 비로소 산업에서 널리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이후 70년 이상 흘렀지만 여전히 안트라퀴논 공정이 과산화수소를 생산하는 주요 방식으로 쓰이고 있다.
과산화수소는 물에 산소 하나가 더해진 아주 간단한 구조지만, 대량으로 만드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물에 산소 원자를 하나만 더하거나 또는 수소 분자와 산소 분자를 붙여서 과산화수소를 만들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과산화수소는 불안정해서 금세 다시 물로 분해돼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트라퀴논 공정은 방향족 유기화합물인 안트라퀴논을 매개체로 사용한다. 안트라퀴논에 수소 분자를 붙인 뒤, 이어서 산소 분자를 붙이고 그 과정에서 부가적으로 생성되는 과산화수소를 추출하는 식이다. 과산화수소를 얻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긴 하지만, 동시에 여러 문제점이 지속해서 제기됐다.
성영은 기초과학연구원(IBS) 나노입자연구단 부단장(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은 “안트라퀴논 공정에 막대한 에너지가 소비된다는 점이 큰 문제 중 하나”라고 말했다.
앞서 안트라퀴논 공정 과정을 간단히 설명했지만, 실제로는 매우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리고 단계마다 일정한 압력과 온도 등 까다로운 조건을 맞춰줘야 한다. 예를 들어 안트라퀴논에 수소를 결합할 때 압력은 최대 4bar(바·1bar는 약 0.99기압), 온도는 40~50도를 맞춰야 하는 식이다.
여기에 최근 더 큰 문제로 지적되는 내용이 있다. 안트라퀴논 공정 과정에 들어가는 주요 촉매인 팔라듐의 가격이 급등했다는 점이다. 안트라퀴논에 수소를 붙일 때 팔라듐을 기반으로 한 촉매가 필수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팔라듐 활용 분야가 크게 늘어났다. 살 사람이 많아지면 가격이 오르는 법. 그 결과 2019년 12월 뉴욕상업거래소에서 팔라듐은 1트로이온스(toz·1트로이온스는 약 31.1g) 당 1858.8달러(약 219만 원)를 기록하며 1년 만에 가격이 48.2%나 올랐다. 이제는 금(1트로이온스 당 1459.3달러)보다 더 귀한 몸이 됐다.
2000분의 1 가격으로 8배 많이 생산
IBS 나노입자연구단은 안트라퀴논과 팔라듐 없이도 과산화수소를 대량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해 국제학술지 ‘네이처 머티리얼스’ 1월 13일자에 발표했다. doi: 10.1038/s41563-019-0571-5
연구팀은 산소를 포화시킨 수용액에 전기를 흘리는 간단한 방식으로 과산화수소를 생산해냈다. 그리고 이런 전기화학 반응을 도울 촉매로는 철(Fe), 코발트(Co), 니켈(Ni) 등 값싼 재료만 사용했다.
현택환 IBS 나노입자연구단장(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석좌교수)은 “우리 몸에서 활성산소를 과산화수소로 바꿔주는 효소의 구조를 확인하고 이를 모방해 새로운 촉매를 고안해냈다”고 말했다.
우리 몸속에는 세포를 죽이는 활성산소가 끊임없이 생성되는데, 반대로 이를 또 끊임없이 제거해주는 효소들이 있다. 우선 초과산화물 불균등화효소(SOD)가 활성산소를 과산화수소로 만들면, 이를 다시 카탈레이스가 물과 산소로 바꿔준다. 이 과정을 눈여겨본 연구팀은 활성산소를 과산화수소로 바꾸는 SOD의 정확한 구조를 알아내고 그대로 따라 만들어보기로 했다.
SOD는 가운데 망간(Mn) 원자가 있고, 네 개의 질소(N) 원자가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다. 고등학교 교과과정에서 나오는 헤모글로빈의 헴(heme) 구조와 동일하다. 연구팀은 망간 대신 코발트(Co) 원자를 중심에 두고, 그 주위를 네 개의 질소 원자가 둘러싼 형태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을 탄소 원자가 2차원 평면 구조를 이룬 그래핀에 부착시켰다.
전기전도도와 열 전도성이 뛰어난 그래핀은 아직 비싸고 산업용으로 쓸 만큼 크게 만들기 어렵지만, 연구팀이 사용한 그래핀은 그 정도로 높은 성능이 필요한 것이 아니어서 값도 싸고 면적도 크게 만들 수 있다.
연구팀은 이 방식으로 촉매 1kg을 활용해 하루에 341.2kg의 과산화수소를 생산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촉매는 사용할수록 활성이 조금씩 떨어지기 마련인데, 연구팀이 개발한 촉매는 110시간 이상 연속적으로 사용해도 초기 성능의 99% 이상을 유지했다.
현 단장은 “안트라퀴논 공정에 사용된 촉매보다 가격은 2000배 싸면서도 지금까지 가장 효율이 좋다고 알려진 촉매보다 최대 8배 이상 과산화수소를 많이 생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코발트와 질소 원자로 만들 수 있는 구조 중에 이번에 개발한 구조가 가장 뛰어난 성능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컴퓨터 계산으로도 확인했다. 이는 계산화학 분야 전문가인 유종석 서울시립대 화학공학과 교수가 맡았다.
친환경 화학산업 가능케 해
IBS 나노입자연구단이 개발한 방식은 최근 화학산업의 화두인 친환경적인 면에서도 우수하다. 현 단장은 “안트라퀴논 공정에 다량의 유기물질을 사용하기 때문에 환경오염을 일으킨다는 지적이 계속 있었다”며 “연구단이 개발한 방식은 물과 산소만을 이용해서 오염물질을 배출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에는 벌써 기업들의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성 부단장은 “많은 산업 분야에서 오염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과산화수소가 아닌 염소를 사용하는데, 부산물로 나오는 염소와 염소 화합물이 환경오염을 일으킨다”며 “친환경이 추세인 만큼 많은 기업이 과산화수소를 쓰고 싶지만 가격이 부담돼 그동안 사용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이번 연구결과가 산업에 적용되면 더 싼 가격에 과산화수소를 사용하면서 환경오염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다만 실제 대량생산을 위해서는 몇 가지 관문이 남아있다.
성 부단장은 “연구단이 개발한 과산화수소 생산방식은 기존과 달리 전기를 이용하는 방식인 만큼 대형 전극과 같은 생산설비들을 새로 마련해야 한다”면서도 “생산설비를 갖추고 경제성을 확보할 때까지 3년 정도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