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2월은 한낮에도 기온이 영하에 머물 정도로 혹독했다. 2004년 KSLV(Korea Space Launch Vehicle)-I(나로호)에 대한 한러 기술 협력 계약이 체결되고, 이듬해 2월 우리는 기술 협력사인 흐루니체프가 제공하는 독립 건물에 현지사무소를 열었다. 1층과 2층에 걸쳐 총 250평 가량 되는 공간에 5개의 사무실, 2개의 회의실, 그리고 간이식당 겸 휴식 공간이 있는 사무실이었다. 날씨도 음식도 모든 것이 낯선 러시아에서 안정적으로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보금자리가 생긴 것이다.
한국-러시아 13개 공동설계팀 꾸려
KSLV-I 기술 협력 계약 이후 한국과 러시아는 각 나라의 전문인력을 합쳐 공동설계팀을 꾸렸다. 공동설계팀은 전공에 따라 총 13개 팀으로 구성됐다. 0팀은 사업관리 및 총괄, 1팀은 발사체 구성 및 체계종합, 2팀은 발사체 임무설계 및 비행종단시스템, 3팀은 비행안정성, 4팀은 하중 및 구조설계, 5팀은 제어시스템, 6팀은 탑재 측정시스템, 7팀은 추진기관, 8팀은 열 및 화재안전시스템, 9팀은 지상장비, 10팀은 시험, 11팀은 신뢰성 및 안전성, 12팀은 환경 및 생태학적 안전을 맡았다.
러시아에 현지사무소를 개소한 것은 초기 설계 단계에서 공동설계팀의 업무효율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었다. 공동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양측 전문가들이 한 장소에 모여야 하는데, 시설을 구축하는 단계에서는 러시아측에서 방한하는 것이 필수적이지만, 초기 설계 단계에서는 러시아의 전문가가 최대한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러시아에 머무는 것이 유리했다.
우리 연구원들은 현지사무소에서 러시아 전문가들과 시스템설계와 상세설계를 공동으로 수행하면서 본격적인 기술 협력에 돌입했다. 발사체 1단과 2단의 인터페이스를 조율하는 기술과 형상을 관리하는 기술을 배우고, 발사체의 하드웨어를 제작하고 시험하는 과정을 참관했다.
2005년 2월부터 2012년 9월까지, 필자를 비롯해 현재 누리호(한국형발사체) 개발의 총괄 책임을 맡고 있는 고정환 당시 선임연구원 등 120여 명의 연구원이 모스크바 현지사무소로 파견됐다.
한국은 2단, 러시아는 1단
모스크바 현지사무소는 국제협력 사업을 관리하는 중요한 창구이기도 했다. 한국은 러시아의 흐루니체프, 에네르고마쉬, KBTM 등 총 3개 회사와 KSLV-I 발사체 시스템과 지상장비를 개발하기로 한 상태였다. 주계약자인 흐루니체프가 체계(발사체 시스템)를 담당하고, 에네르고마쉬는 엔진을, KBTM은 지상장비를 담당하기로 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협력 범위를 정하는 데는 추가 협상이 필요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공동개발 방식을 통해 관련 기술을 습득하고자 한다면 어떤 기술을 어떻게 협력할지, 협력 범위를 전략적으로 택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KSLV-I 개발 과정에서 공동으로 담당할 부분, 한국이 담당할 부분, 러시아가 담당할 부분 등 세 파트로 업무를 나눴다. 먼저 발사체의 시스템설계, 체계종합, 한국 내 지상종합시험, 발사운용과 정기적인 기술회의, 현안협의는 공동업무로 규정했다.
그리고 2단 고체 킥모터 개발, 노즈페어링 개발, 탑재용 항법제어시스템 개발, 원격측정시스템 개발, 지상장비 제작 및 조립, 발사장 인프라 구조물 구축 등은 우리 업무로 가져왔다. 또 기술자료 분석, 제작·시험과정 모니터링을 통해 핵심기술을 습득할 권리를 한국이 갖는 것으로 규정했다.
러시아측이 담당할 부분은 1단 개발, 한국측 시공설비에 대한 감리 및 검증, 발사에 대한 기술적 지원 및 책임, 발사시스템 개발을 위한 기술 지도, 그리고 발사운용교육으로 규정했다.
협상의 백미, 무상 재발사
사실 러시아측이 담당하기로 한 ‘발사에 대한 기술적 지원 및 책임’ 부분은 조금 특별한 내용이었다. 정확히는 ‘계약서에 명시된 2회의 발사 가운데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우리의 요청에 따라 1회에 한하여 무상으로 재발사를 수행한다’는 내용이다.
1회 무상 재발사는 우리에게 대단히 유리한 조건이었다. 다른 나라 로켓을 빌려 우리나라 위성을 쏘는 경우처럼 우리 돈을 주고 발사 서비스를 맡긴 경우에도 만에 하나 발사가 실패하면 발사 서비스 회사가 배상 책임을 지지 않는다. 발사 서비스를 의뢰한 쪽에서 보험에 가입해 실패에 대비하는 것이 세계 시장의 관행이다. 러시아와 무상 재발사 약속을 맺은 것은 당시 한국이 최초였다(이는 나로호가 두 차례 발사 실패 이후 3차 발사에 도전할 수 있는 큰 힘이 됐다).
러시아에게 얼마만큼의 돈을 줄 것인가도 어려운 협상 과제였다. 국제협력의 대가로 지불하는 비용이 마트에서 물건을 사는 것처럼 시장가격으로 형성돼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돈을 내는 쪽과 받는 쪽의 입장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니, 서로가 유리하게 협상을 이끌기 위해 상대의 약점을 이용해야 했다.
우리는 러시아가 경제위기에 빠진 상황이라는 점을 이용했다. 계약이 급한 내색을 하지 않고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상대의 양보를 유도했다. 그 결과 협상 초반 러시아가 제안했던 금액인 9억2500만 달러(당시 원화로 1조961억 원)에 비해 훨씬 적은 비용인 2억1000만 달러(당시 원화로 약 2488억 원)로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춥고 낯선 땅에서 동고동락하던 순간들
우주발사체 분야의 국제협력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사업자간 계약 이외에도 비밀유지협정(NDA), 우주기술협력협정(IGA), 우주기술보호협정(TSA) 등 세 가지 협정을 맺어야 했다.
비밀유지협정은 말 그대로 상호 제공한 정보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약속이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은 2002년 6월 흐루니체프, 에네르고마쉬와 이러한 비밀유지협정을 체결했다.
우주기술협력협정은 우주의 평화적 이용을 도모하기 위한 한러 정부 간의 협정이었다. 우주 분야 협력을 위한 협력대상과 협력형태를 기술하는 한편, 지적재산권, 수출통제, 통관문제 등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우주발사체와 같이 첨단 군사무기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는 민감한 기술은 국제적인 기술이전 및 협력이 엄격히 통제되므로 협력에 대한 정부 간 보장 및 보증이 필수다. 우주기술협력협정은 한국과 러시아의 우주 분야 협력을 정부 차원에서 상호 보장하며, 이런 협력은 전적으로 평화적 목적으로만 수행하겠다는 대한민국 정부의 뜻을 국제적으로 선언하는 의미가 있었다. 우주기술협력협정은 2006년 9월부터 발효됐다.
마지막으로 우주기술보호협정은 기술 협력 과정에서 개발, 이전되는 자료와 기자재 등을 제3국으로 유출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를 준수하고 기술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은 다른 협정에도 있었지만, 엔진이 들어 있는 발사체 1단과 같이 민감한 품목이 국내로 이송돼야 했던 만큼 기술 보호의 세부내용과 절차에 대한 추가 협정이 이뤄졌다.
우주기술보호협정은 훗날 ‘러시아가 처음에는 기술이전을 약속했다가 우주기술보호협정을 핑계로 기술이전을 거부했다’는 오해를 낳기도 했다. 협상 초기에는 발사체 1단과 같은 하드웨어를 이송할 때만 발효된다고 알려졌는데, 푸틴 대통령의 집권 2기가 시작되면서 조건이 강화돼 발사체 관련 설계자료나 도면도 보호협정 대상 품목에 포함됐기 때문이다.
보호 품목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님에도 국회나 언론에서는 계약을 잘못했다는 질타가 쏟아졌다. 연구원들이 계약서를 들고 국회에 찾아가 오해가 생긴 부분을 일일이 해명했지만, 괴담처럼 퍼진 소문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힘든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티며 러시아와의 협력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과 러시아에서 함께 애쓴 동료들 덕분이었다.
요즘처럼 날씨가 쌀쌀할 때는 그 시절 러시아 출장이 특히 생각난다. 밤에 버스를 타고 퇴근해 공동숙소에서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던 순간들, 출근을 하지 않는 주말에는 족구를 하며 스트레스를 풀던 순간들. 이 모든 순간들이 모여 나로호의 성공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조광래
1988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의 전신인 천문우주과학연구소에서 과학로켓 개발을 시작해 이후 30년 넘게 발사체 개발에 몸담았다. 1993년 1단형 과학로켓 KSR-Ⅰ개발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1990년대 후반 KSR-III 사업부터 2002~2013년 나로호 사업까지 총 책임자를 맡았다. 2014~2017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장을 맡아 2021년 발사 예정인 한국형발사체 누리호(KSLV-Ⅱ) 개발을 이끌었다. gwcho@kar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