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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유학일기] 전 과목 1등, 영어만 20점 잘 쓴 에세이 필사하기

 

보통 ‘영어를 잘 한다’는 칭찬은 ‘회화를 잘 한다’는 뜻이다. 이 기준에서 나는 아직까지 영어를 못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영어로 공부하는 것’은 ‘회화를 잘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영어에도 분야가 있고, 분야별로 연습법이 다르다. 내 특기는 에세이 쓰기와 독해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말레이시아로 유학을 갔다. 내 또래들보다 훨씬 영어에 서툴렀을 때였다. 당시 나는 한국을 떠나 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고, 영어가 내 인생에서 중요할 것이라는 생각도 없어 열심히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챕터의 소제목을 외우는 것이 전부였다. 


당연히 초등학교에서 배운 영어는 외국에서 살아가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고작해야 ‘My name is Yeon’ 수준의 지극히 단순한 문장을 겨우 외우고 있었다. 그 문장을 이루는 문법조차 알지 못했고, 알파벳도 노래로 외워야 겨우 Z까지 읊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내가 다닌 학교는 입학시험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교육열 높은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명문학교 축에 끼지도 못했다. 학생 중 절반 이상은 한국인 유학생이었다. 그런 환경에서는 영어가 제대로 늘지 않는다. 늘었다고 하더라도 간단한 일상 회화 수준이다.   


하지만 살아가기 위한 영어와 공부를 위한 영어는 다르다. 모든 한국인이 한국말을 잘 하지만, 완벽한 구성으로 멋진 글을 쓰는 사람이 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학교 재학 중 나는 수학, 역사, 과학, 미술 등 영어를 제외한 모든 과목에서 항상 1등이었다. 영어가 부족해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은 한글로 발음만 받아 적은 뒤 집에 와서 다시 노트에 정리했다. 그렇게 정리한 노트를 5번씩 베껴 쓰면 대부분의 문장을 외울 수 있다. 단순 문법은 자연스럽게 터득할 수 있었고, 성적도 높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반면 영어는 항상 100점 만점에 20점대였다. 영국식 영어 교육에는 리포트나 토론 등 여러 형식의 작문과 시를 포함한 영문학 독해가 필수였는데, 한국인인 나는 절대로 따라갈 수 없을 거라고 자포자기한 채로 살았다. 영어를 위한 공부는 전혀 하지 않았다.


영어 공부는 10학년(한국의 고등학교 1학년)이 돼서야 시작했다. 역사 시험이 에세이 형식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나는 영국인들이 선호하는 논리 전개와 문장 스타일을 익히기 위해 노력했다. 같은 의미를 전달할 때도 단어와 문장 구성이 완전히 다를 때가 많았다. 가령 영미권에서는 미괄식보다는 두괄식이나 양괄식을 선호한다. 영어 공부는 이를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 틈에서 좋은 결과를 내려면 원어민처럼 영어를 쓸 필요가 있었다.


여러 교재를 읽었고, 단어집도 사서 외웠다. 영어 선생님은 좋은 소설책을 많이 읽어보라고 했다. 하지만 11학년이 끝날 때가 되도록 내 영어 실력은 조금도 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내가 택한 방법은 잘 쓴 에세이를 필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내가 쓴 에세이와 잘 쓴 에세이를 비교했고, 어떤 점에서 잘 썼다는 평가를 받았는지 찾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영어 선생님이 말했던 좋은 글의 요소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이해하게 됐다. 


이 즈음에 본 모의고사(IGCSE) 영어 성적은 35점이었다. 이런 식으로 작문 실력은 느리게, 그러면서도 갑작스럽게 늘었다. 어느 순간 ‘귀가 트인다’는 표현처럼 말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그리고, 무언가를 제대로 습득하는 데는 그만큼 인내가 필요하고 많은 수고가 든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 노력의 결과로 나는 11학년 말에 보는 국제 시험의 ‘English as First Language(원어민 대상 영어 영역)’에서 B+(70점대 후반)를 받았다. 역사 시험에서는 상위 2%에 들었고, 이듬해 임페리얼칼리지에 보낼 자기소개서 첨삭도 한 번에 통과했다. 임페리얼칼리지 입학 이후에는 모든 리포트에서 고득점을 받고 있다. ‘읽기 좋은 짜임으로 돼 있다’ ‘문장의 구성이 훌륭하다’ 등의 코멘트를 놓친 적이 없다. 


임페리얼칼리지에는 영어에 서툰 학생을 위한 영어학습센터(Centre for Academic English)가 있다. 이공계 분야 영작문(English for STEM writing), 과학 전달법(Communicating Science) 등의 코스도 제공한다. 그 중에는 1 대 1 수업도 있다. 


나는 모든 코스를 들어봤는데, 내게 가장 도움이 된 수업은 회화(Speaking course)였다. 일상 회화 중에서 흔히 생략하는 문법이나, 흘려버리는 발음과 그에 대한 구강 구조의 움직임까지 자세하게 알려줬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좋은 발음이나 억양을 위해 크게 노력하지는 않는다. 말레이시아에서 습득한 그 억양 그대로 살고 있다. 스피치용 작문은 곧잘 하고, 발표에도 익숙하지만 일상 대화는 아직도 어렵다. 고등학생 때처럼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는다면 영어로 대화하기는 앞으로도 어려운 일로 남을 것 같다. 

2019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글 및 사진

    고승연
  • 에디터

    서동준 기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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