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제가 얘기하려는 갯벌 보호의 이유는 지금까지 여러분이 알고 있던 것과는 다릅니다. 생물의 다양성이 아닌 ‘블루카본’을 확보하기 위해 갯벌을 보존해야 한다는 걸 전해주려고 합니다.”
인천 강화도 강화갯벌센터 강연장에 등장한 박흥식 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 해양생물자원연구단 책임연구원은 이 말로 강연의 포문을 열었다. 블루카본은 강연장에 모인 학생들에게도 굉장히 생소한 단어였다.
탄소 흡수하는 바다의 염생식물
5월 18일 토요일 아침. 유독 화창한 날씨 덕분인지 이른 아침부터 강화도로 들어가는 진입로는 나들이 차량으로 가득했다. 강화도의 유명 관광지인 동막해수욕장을 지나 8km 정도 더 달리자 강화도 남서쪽 끝에 위치한 강화갯벌센터가 나타났다.
강화갯벌센터는 그 이름처럼 강화도의 갯벌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한창 썰물 때라 갯벌은 3km 가까이 펼쳐져 있었다. 그 뒤로 좁아진 바닷길이 있었고, 다시 갯벌과 장봉도로 이어지는 장관이 연출됐다. 하늘이 맑아 저 멀리 인천국제공항이 있는 영종도까지 눈에 들어왔다.
이날 해양과학자를 꿈꾸는 중고등학생 15명이 모였다. 블루카본이라는 낯선 주제에 대한 궁금증에서였다. 박 책임연구원은 “블루카본은 국내에서 이제 막 시작된 연구 주제”라고 말했다.
친화력이 높은 탄소는 다른 원소와 결합해 여러 가지 형태로 지구에 존재한다. 그중 석탄이나 석유처럼 땅속에 저장돼 있다가 방출되는 탄소를 ‘블랙카본’, 육상에서 식물의 광합성에 의해 흡수되는 탄소를 ‘그린카본’이라 부른다. 그리고 블루카본은 바로 바다 연안에서 땅속으로 흡수되는 탄소를 일컫는다.
블루카본은 크게 두 가지 경로로 만들어진다. 하나는 맹그로브나 잘피, 칠면초와 같이 연안에서 자라는 염생식물에 흡수돼 땅에 묻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육상에서 떠내려 온 유기물이 바다에 묻히는 경우다.
블루카본이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는 지구온난화를 막을 수 있는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박 책임연구원은 “연안에서 사는 염생식물은 육상 식물보다 광합성을 통해 탄소를 흡수하는 속도가 최대 50배 빠르다”며 “또 바다는 수압이 높아 탄소가 땅에 묻힐 경우 바깥으로 배출되기 어려운 만큼 수천 년 이상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덕분에 블루카본이 생성되는 연안 지대는 바다 전체 면적의 0.5%에 불과하지만 흡수하는 탄소량은 바다 전체의 50~71%에 이른다. 게다가 육상 삼림보다 면적은 훨씬 좁은데도 불구하고 연간 탄소 흡수 총량은 육상 삼림과 비슷한 수준이다.
이런 블루카본의 특성은 2000년대 이뤄진 연구들로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9년 국제연합(UN)과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등이 공동으로 출간한 ‘해양의 탄소 흡수에 대한 종합 평가 보고서(The Role of Healthy Oceans in Binding Carbon)’에서 블루카본의 탁월한 능력이 공인됐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블루카본은 어디에 있을까. 박 책임연구원은 “바로 이곳 갯벌”이라며 “갯벌에서 자라는 갈대와 칠면초 염생식물이 주인공”이라고 말했다. 강화 갯벌을 포함한 서해 갯벌은 미국 남동부 조지아주 연안, 브라질의 아마존 유역 등과 더불어 세계 5대 갯벌로 불릴 만큼 넓은 면적을 자랑한다.
하지만 전 세계 블루카본 서식지는 도시 개발, 항만 건설, 농지 개간 등으로 매년 2~7%씩, 육상의 삼림보다 최대 4배 빠른 속도로 파괴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현재 순천만, 낙동강 하구, 강화도 정도에만 갯벌이 넓게 남아있으며, 과거 서해안의 넓은 갯벌은 현재 대부분 도로로 바뀌었다.
이렇게 줄어든 블루카본은 지구온난화를 악화시킬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막대한 손실이다. 박 책임연구원은 “국제적으로 온실가스 감축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면서 국가끼리 또는 기업끼리 탄소배출량을 거래하는 ‘탄소배출권거래제’가 시행됐다”며 “탄소배출량 한도를 정할 때 각국의 자연환경이 흡수할 수 있는 탄소량이 중요한 기준이 되는데, 블루카본 서식지가 넓으면 높게 평가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람에게 불필요하다고 여겨졌던 염생식물의 가치가 높아진 이유다.
▲ 강화도에 위치한 강화갯벌센터에서 박흥식 KIOST 책임연구원(왼쪽 서 있는 사람)이 바다의 탄소 순환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유해생물 갯끈풀의 재발견
이제 직접 갯벌에 발을 담글 차례다. 강연에 참여한 학생들은 KIOST에서 마련한 버스에 올라탔다. 3km 남짓 달렸을까. 도로 바로 옆으로 갈대밭과 드넓은 갯벌이 펼쳐졌다.
금강산도 식후경. 버스에서 내린 학생들은 갯벌 부근 바위에 앉아 샌드위치로 체력을 비축했다. 다음날 비가 온다는 소식 때문인지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최고 기온이 26도에 이르는 더운 날씨였지만, 그늘 한 점 없는 갯벌에 들어가도 덥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딱 좋았다. 갯벌 보호를 위한 강의에 온 만큼 먹고 남은 쓰레기는 분리수거해 한 데 모았다.
“자, 이제 모두 양말만 신고 제 앞으로 모이세요.”
현장 교육은 갯벌의 ‘야전사령관’ 윤건탁 저서생물연구센터 책임연구원의 몫이었다. 윤 책임연구원 앞에는 삽과 채, 쟁반, 실험용 장갑 등이 놓여 있었다. 갯벌 생물들을 채취하고 관찰하기 위한 도구들이다. 학생들은 저마다 실험용 장갑을 손에 끼고, 사용하고 싶은 도구를 하나씩 들었다. 윤 책임연구원은 갯벌에서 걷는 요령부터 알려줬다.
“이곳에 처음 오는 학생들은 얼마 가지도 못하고 갯벌에 빠져 ‘살려 달라’고 소리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걸을 때 발가락부터 갯벌에 디디세요. 평소 걷는 것처럼 뒤꿈치부터 디뎠다가 빠지면 꺼내기 힘듭니다.”
학생들은 윤 책임연구원의 뒤를 따라 총총 걸어갔다. 100m 정도 걷던 윤 책임연구원이 발아래 듬성듬성 나있는 빨간색 식물 하나를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윤 책임연구원은 “이게 염생식물 중 하나인 칠면초”라며 “처음에는 초록색이지만, 갯벌과 같이 소금기가 있는 곳에서 자라면서 빨간색으로 색이 바뀐다”고 말했다. 칠면초는 잎의 액포에 소금을 가능한 오래 머금고 있다가 때가 되면 잎을 떨어뜨린다. 식물이 살 수 없을 것만 같은 바다에서 염생식물이 살아남는 방법이다.
각자 갯벌 생물을 채집해보라는 윤 책임연구원의 말에 학생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갯벌을 파자 망둥어와 참게, 갯지렁이 등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각자 채집한 생물들을 윤 책임연구원에게 들고 가면 어떤 생물인지, 특징은 무엇인지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장희찬 군(서울 신도중 1학년)은 “갯지렁이를 굉장히 징그럽다고 여겼는데, 설명을 듣고 연구를 한다고 생각하니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채집에 열중하다 보니 넘어지는 학생들도 속출했다. 갯벌 흙을 피부에 바르며 즐기는 학생들도 일부 눈에 띄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윤 책임연구원이 갈대와 갯끈풀이 모여 있는 곳으로 학생들을 이끌었다. 밀물 때가 되기 전에 더 중요한 걸 보여줘야 했다. 윤 책임연구원은 학생 몇 명에게 갈대와 갯끈풀 밑을 한 번 파보라고 말했다.
학생 네 명이 삽을 들고 파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간해서 뿌리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파자 여러 대의 갈대가 연결된 뿌리가 나타났다. 갯끈풀은 그보다 더 많은 개체들이 뿌리 하나에 연결돼 있었다.
윤 책임연구원은 “갈대와 갯끈풀은 씨앗에 의해 새로운 개체가 자라기도 하지만, 뿌리 중간에 새순이 돋아나고 그 새순이 하나의 개체로 자란다”며 “갯끈풀은 뿌리 하나에서 돋아나는 개체 수가 갈대보다 훨씬 많아서 번식력이 엄청나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국내에서 갯끈풀은 갯벌 생태계를 파괴하는 유해 해양식물로 알려져 있다. 갯끈풀이 자란 갯벌을 밟아보면 발이 빠지기는커녕 마치 육지처럼 딱딱하다. 그 아래가 갯끈풀의 뿌리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갯벌을 파고 생존하는 생물들이 살 공간이 협소해지는 것이다. 정부와 지자체에서 갯끈풀 제거 작업을 실시했지만 일일이 뽑아야 하기 때문에 제거하기도 어렵거니와 금세 다시 갯벌을 메운다.
윤 책임연구원은 이런 갯끈풀을 블루카본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관찰한 결과 갯끈풀은 바다와 멀고 생물이 많이 살지 않는 일정 지역에서만 자란다”며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이를 잘 활용해서 탄소를 흡수하는 자원으로 활용하는 방법도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갯벌 체험을 무사히 마친 학생들은 바위로 돌아와 준비한 물로 몸에 잔뜩 묻은 갯벌 흙을 씻어냈다. 박예빈 양(인천 학익여고 1학년)은 “항상 생물다양성을 위해 갯벌을 지켜야한다는 얘기만 들었는데, 탄소 저장이라는 새로운 시각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며 뿌듯해했다.
박 책임연구원은 “8월 열대태평양 미크로네시아 축주에서 열대해양캠프를 진행할 계획”이라며 “여기서 더 새로운 해양생태계의 가치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만큼 많은 청소년들이 지원해주길 기대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