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반드시 솔로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을 부추기는 초콜릿 회사들의 ‘농간’이라는 걸 안다. 그런데도 2월이 시작되면 눈길은 자연스럽게 초콜릿을 향한다. 밸런타인데이를 겨냥해 각종 초콜릿들이 리본과 꽃 장식을 두르고 유혹한다. 초콜릿에도 ‘계보’가 있다. 최근에는 ‘4세대 초콜릿’이 등장했다. 이번 밸런타인데이에는 너로 정했다. 4세대 초콜릿.
다크-밀크-화이트로 이어지는 초콜릿
흔히 1세대로 불리는 오리지널 초콜릿, ‘다크 초콜릿’은 1840년대 후반에 나왔다. 다크 초콜릿은 카카오매스의 함량이 클수록 씁쓸한 맛이 강하게 난다.
카카오매스는 카카오나무의 열매로부터 얻는다. 카카오 열매는 둥그스름하면서도 길쭉하고 양끝이 뾰족해, 길이가 10cm 정도인 럭비공처럼 생겼다. 이 열매를 가르면 다른 열대과일처럼 상큼한 향기가 풍기고, 하얗고 끈적끈적한 중과피(펄프)로 가득 차 있다. 중과피는 아몬드만 한 카카오빈을 수십 개 쥐고 있다.
카카오 농장에서는 중과피에서 벗겨낸 카카오빈을 바나나 잎으로 싸 5~7일 발효시킨다. 농장에서 자연적으로 살고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균들이 카카오빈을 발효시키는 셈이다. 표면에 남아 있던 중과피가 발효돼 카카오빈으로 스며들면서 온도는 약 50도까지 올라간다. 원래 보랏빛을 띠던 카카오빈은 발효 과정을 거치면서 짙은 갈색으로 변하고, 끈적끈적하게 부풀어 오른다.
이후 1~2주 뜨거운 햇볕에 건조시키면 수분이 날아가면서 카카오빈의 부피가 줄어든다. 수분이 10% 이하로 줄어들면 고온에서 30분간 볶는다. 로스팅하는 동안 수분은 3% 이내로 줄어들고, 카카오빈을 두르고 있던 껍질이 벗겨져 나가면서 알맹이(카카오닙스)만 남아 구워진다. 이 알맹이를 곱게 간 것이 초콜릿의 주 원료인 카카오매스다.
카카오매스를 압착하면 카카오파우더(코코아)와 카카오버터로 분리된다. 카카오파우더는 초콜릿 특유의 달콤 쌉쌀한 맛을 낸다. 카카오버터는 입 안에 넣었을 때 부드럽게 녹는 식감을 만든다. 카카오파우더와 카카오버터에 설탕, 바닐라 등 향료를 첨가하면 초콜릿이 완성된다.
1870년대 후반 스위스의 제과사인 다니엘 페테르와 앙리 네슬레는 카카오파우더에 우유파우더를 넣어 다크 초콜릿보다 부드럽고 달콤한 밀크 초콜릿을 만들었다. 1930년대 말에는 카카오매스 없이 카카오버터에 우유파우더와 설탕을 넣어 만든 화이트 초콜릿이 탄생했다. 밀크 초콜릿과 화이트 초콜릿은 각각 2세대와 3세대 초콜릿으로 불린다.
발효 안 시키는 게 핵심…4세대 초콜릿 등장
이 초콜릿 계보를 잇는 4세대 초콜릿을 개발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가 이뤄졌다. 최근에는 카카오버터 대신 팜유 등을 넣어 만든 초콜릿이 많다. 팜유가 들어간 경우 입 안에서 잘 녹기는 하지만 카카오버터를 넣은 것보다 식감이 뻑뻑하다. 또 이 경우 카카오 함량이 20% 이상이어야 한다는 초콜릿의 기준에 미달해 ‘준초콜릿’으로 불린다. 참고로 화이트 초콜릿도 처음 나왔을 때에는 카카오매스 함량이 거의 없다는 이유로 초콜릿으로 인정받지 못할 뻔 했다.
2012년 프랑스 초콜릿 제조업체 발로나는 4세대 초콜릿으로 부를 수 있는 황금빛 초콜릿을 개발했다고 주장했다. 카카오 함량이 32%인 ‘블론드 둘세(Blond Dulcey)’는 잘 익은 스테이크 표면이나 빵 껍질에서 날 법한 구수한 맛과 향기를 자랑한다.
발로나 측은 화이트 초콜릿을 일반적인 제조법보다 2배가량 높은 약 130도에서 중탕시키다가 우연히 황금빛 초콜릿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발로나 측이 공개한 레시피에 따르면 일반 레시피보다 2배가량 높은 약 130도에서 화이트 초콜릿을 40분 동안 굽는다. 이때 가장자리만 타지 않도록 5~10분마다 섞어야 한다.
하지만 블론드 둘세는 4세대 초콜릿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화이트 초콜릿에 섞은 우유의 단백질과 유당이 천천히 굳으면서 ‘마이야르 반응(Maillard reaction·포도당이나 과당 같은 당과 단백질의 구성 성분인 아미노산 사이에 일어나는 반응)’이 일어나고, 그 덕분에 황금빛 초콜릿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7년 9월 ‘진짜(?)’ 4세대 초콜릿이 등장했다. 스위스 초콜릿 제조업체인 배리칼리보가 개발한 ‘루비 초콜릿’이 그 주인공이다. 세계 최대 초콜릿 제조업체인 스위스 네슬레가 루비 초콜릿으로 초코바 형태의 ‘킷캣 쇼콜라토리 수블림 루비’를 개발해 세계 최초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루비 초콜릿은 핑크색으로 일단 색깔에서 독보적이다. 맛과 향에서도 다른 초콜릿이 낼 수 없는 매력을 내뿜는다. 다크 초콜릿보다는 달콤하지만, 화이트 초콜릿보다는 훨씬 씁쓸하고 신맛을 내며, 밀크 초콜릿처럼 부드럽다. 루비 초콜릿의 가장 큰 특징은 앵두나 체리에서 나는 것 같은 상큼한 향기를 낸다는 점이다.
뤽 드보에르 배리칼리보 매니저는 과학동아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루비 초콜릿은 화이트 초콜릿 이후 80년 만에 탄생한 4세대 초콜릿”이라며 “우유나 색소 없이 오로지 카카오빈 자체만으로 특별한 풍미를 내게 만든 초콜릿”이라고 설명했다.
루비 초콜릿을 만드는 카카오빈은 일반적인 카카오빈과 마찬가지로 에콰도르, 브라질, 코트디부아르에서 재배된다. 이전에는 핑크색 초콜릿을 만들기 위해 연지벌레를 말려서 얻는 코치닐 색소를 넣어야 했다.
드보에르 매니저는 “2004년부터 약 13년간 초콜릿 제조 과정에서 여러 가지를 더하거나 빼면서 새로운 초콜릿을 연구하던 중 우연히 개발했다”며 “루비 초콜릿이 핑크색을 띠는 이유는 일반적인 초콜릿 제조과정과 달리 발효 과정이 없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배리칼리보가 공개한 루비 초콜릿 특허(EP2237677 (A1))에 따르면 루비 초콜릿은 다른 색소를 첨가하지도 않았고 유전자 변형 작물(GMO)도 아니다. 1g당 40~60mg으로 일반 카카오빈(보통 20mg/g)보다 폴리페놀이 많이 함유된 카카오빈만 골라, 발효시키지 않고 특별한 공정을 거쳐 만든다.
우선 카카오빈을 알코올에 넣어 불린 뒤 중과피를 벗기고 알맹이만 추출한다. 이를 구연산(pH2)으로 산성화시키고 에테르로 탈지까지 시키고 나면 루비 초콜릿이 된다. 즉, 일반 초콜릿처럼 여러 균들이 당을 발효시켜 산과 휘발성 화합물을 만드는 대신, 발효 과정 없이 인위적으로 산성화시켜 특별한 색과 풍미를 만드는 것이다.
배리칼리보 측은 2012년부터 마티아스 울리히 독일 야콥스대 미생물학과 교수팀과 함께 카카오빈에 들어 있는 화합물을 2만여 개 발굴했다. 이 화합물들이 발효와 가수분해 등을 거치면서 초콜릿 특유의 풍미를 낸다.
연구팀은 루비 초콜릿의 비밀도 분자생물학적으로 밝혔다. 어떤 화합물들을 어떤 비율로 섞을 때 최상의 색깔과 풍미를 내는지 확인해 루비 초콜릿 레시피를 완성했다. 하지만 이는 루비 초콜릿의 영업비밀에 해당해 연구 결과를 공개하지는 않았다.
5세대 초콜릿은 ‘맞춤형 초콜릿’
배리칼리보는 현재 벨기에 플랑드르생명공학연구소(VIB)와 케빈 페르스트레펜 벨기에 루뱅대 미생물분자생물학과 교수팀과 공동으로 ‘5세대 초콜릿’의 후보가 될 새로운 초콜릿을 개발하고 있다.
연구팀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에서 카카오빈 발효에 관여하는 효모(Saccharomyces cerevisiae) 수천 종을 분리했다. 연구팀은 각 종들이 카카오빈의 어떤 물질을 발효시켜 어떤 산물을 내는지 분석한 뒤 초콜릿을 만드는 데 가장 적합한 균주 몇 종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가령 어떤 균주는 과일향을 내면서 단맛보다는 씁쓸한 맛을 내고, 어떤 균주는 쓴맛이 약하고 단맛을 강하게 낸다. 연구팀은 균주끼리 교배해 새로운 잡종균주도 개발했다.
이를 통해 연구팀은 발효시키지 않은 생 카카오빈에 특정 효모만 주입해 발효시키면 원하는 풍미를 가진 초콜릿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상큼한 과일향을 내는 효모만 카카오빈에 접종해 발효시키면 과일 향기가 나는 초콜릿을 만들 수 있는 셈이다.
페르스트레펜 교수는 현재 초콜릿 제조에 자연적으로 관여하는 효모는 물론, 맥주나 와인 제조에도 사용하는 효모 중에서도 후보를 찾고 있다. 수년 안에 지금까지 어디서도 맛보지 못했던 특별한 맛의 초콜릿이 탄생하지 않을까.
● 초콜릿 풍미가 다양한 이유
로잔 프레이타스 슈완 브라질 라브라연합대 생물학과 교수팀은 초콜릿이 다양한 풍미를 갖는 이유를 분자 단위에서 찾았다. 연구팀은 카카오빈이 발효될 때 시간에 따라 우위를 점하는 세균이 달라지면서 다양한 산물이 순서대로 만들어지고, 이에 따라 다양한 풍미가 나타난다고 결론 내렸다. doi:10.1080/10408690490464104
가장 먼저 발효를 시작하는 균은 효모(Saccharomyces cerevisiae)다. 카카오빈을 둘러싸고 있는 중과피에는 포도당, 과당, 자당 등 당 성분과 구연산이 많아 산성을 띤다(pH3). 효모는 24~36시간 동안 당을 발효시켜 에탄올과 이산화탄소, 그리고 여러 휘발성 화합물을 만든다.
효모의 뒤를 이어 우위를 점하는 유산균(Lactobacillus fermentum, Lactobacillus casei, Lactobacillus rhamnosus 등)은 발효를 시작한 지 36~48시간 동안 포도당과 과당, 구연산을 발효시켜 젖산과 아세트산, 에탄올, 만니톨 등을 만든다. 그동안 효모가 구연산을 소모하는 덕분에 수소이온농도가 pH5까지 높아진다.
발효 과정이 진행될수록 균끼리 서로 경쟁하며 효모와 유산균의 수가 점점 줄어든다. 그러면 아세트산균(Acetobacter)이 우위를 점하며 점점 늘어난다. 아세트산균은 에탄올을 아세트산으로 산화시키고, 아세트산을 물과 이산화탄소로 분해한다. 이때 단백질이 여러 아미노산으로 분해 되면서 다양한 풍미가 생긴다.
결국 다양한 균이 카카오빈을 발효시키면서 에탄올과 아세트산, 젖산, 알데히드, 케톤, 에스테르, 카르복실산, 피라진 그리고 다양한 휘발성 화합물과 아미노산을 생성하면서 풍미가 풍부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