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초등학교 6학년을 마치고 말레이시아로 유학을 갔다. 처음에는 부모님의 사업 때문에 결정된 일이었지만, 이후에는 내가 말레이시아에 남아 계속 공부하고 싶다는 의지가 강했다. 사실 공부가 좋아서 남았던 건 아니었다. 그저 말레이시아 생활이 한국보다 느긋하고 행복했기 때문이다.
성적이 특별히 좋았던 적도, 공부를 열심히 한 적도 없었던 나는 지역에서 가장 저렴한 영국계 국제학교에 다녔다. 비싼 학교에 다니는 건 돈 낭비라고 생각했다. 함께 있던 친구들 중 대부분은 대학을 가지 않고 호텔이나 관광 쪽으로 진로를 정했다. 나도 그 사이에 섞여 ‘영어를 못해도 호텔에서 일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만 하고 있었다.
내가 임페리얼칼리지를 처음 알게 된 건 11학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영국 대학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11학년을 마친 뒤 2년간 공부한 후 시험을 보는 대학 입시 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이를 ‘A레벨(GCE Advanced Level)’이라고 한다.
임페리얼칼리지는 교장선생님과 물리선생님이 졸업한 학교였다. 해외 대학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나는 자랑스럽게 학교를 소개하는 선생님과, 그런 선생님을 대단하다는 듯 바라보는 친구들의 시선에 어렴풋이 임페리얼칼리지가 명문대라는 것을 알게 됐다.
누군가는 임페리얼칼리지를 ‘세계 3대 공대’라고 소개하기도 하지만, 내게는 ‘영국 밖에서는 아는 사람들만 겨우 아는 유명하지 않은 대학’이었다. “과학으로는 영국 내에서 3위”라는 친구의 말에, 그렇게 좋은 곳이라면 어차피 가지도 못할 거라는 생각으로 흘려들었다.
그런 내가 임페리얼칼리지에 입학한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대학이었기 때문이다. 학교에 대해 더 알아보지도 않은 채 나는 상위 5개 영국 대학에 원서를 넣었다. 당시 임페리얼칼리지는 영국 타임즈 고등교육(THE) 세계 대학 순위 8위, QS(Quacquarelli Symonds) 세계 대학 평가 9위에 랭크됐다. 이 결과를 절대적으로 신뢰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수년간 10위권 이내를 지키고 있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전공은 화학과로 결정했다. 화학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분명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유독 내 마음을 두드리는 흥미로운 과목이라서 택했을 뿐이다. 사실 나는 어릴 때부터 단순히 좋아한다는 이유로 진로를 정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원하는 것을 이루는 사람은 너무도 적었기 때문이다. 안정적이고 무리 없는 삶이 훨씬 괜찮아 보였다.
그래서 순수과학을 전공으로 선택하는 데에는 나름의 용기가 필요했다. 임페리얼칼리지에 원서를 넣기 전날, 나는 밤새도록 화학과를 졸업해 후회한다는 사람들의 글을 읽었다. 차라리 화학‘공학’과로 원서를 넣을까, 수도 없이 고민했다. 하지만 내 열정은 끝내 화학을 향했다.
원서를 접수한 뒤 스카이프로 면접을 봤다. 면접관은 나에게 가장 먼저 “세상 어느 대학이라도 갈 수 있는 성적을 갖고 있는데, 왜 굳이 임페리얼칼리지를 선택했느냐”고 물었다. 공부에 욕심을 가진 뒤에는 당연히 미국 대학을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미국 대학 원서에는 수상 내역을 적는 칸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미국이라는 선택지는 아예 지워버렸다. 수상 실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중·고등학생 시절, 꿈이나 미래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지 못한 채 시간을 허비했다. 수상 내역은 물론, 이렇다 할 동아리 활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원서에 자기소개서와 성적, 추천서 한 장만 첨부하는 영국 대학에 매달렸다.
성적을 잘 받아야 하는 만큼 열심히 공부했다. 친구들은 A레벨에서 자신 있는 과목 4개를 선택했지만, 욕심이 있었던 나는 시간표에 맞지 않는 수학 과목까지 자습해가며 5개 과목을 이수했다. 그럼에도 힘들다고 느끼지 않았던 건, 그 과정마저 즐거웠기 때문이다.
2016년 11월 1일, 면접 후 사흘 만에 조건부 입학 통보를 받았다. 화학 지식에 관련된 질문은 잘 대답했지만, 학교 자체에 대한 질문에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해 합격할 거라는 기대도 못했던 새벽이었다.
영국은 A레벨 모의고사 점수와 내신 등을 반영해 예상 점수를 주고, 이 예상 점수로 대학에 지원한다. ‘예상 점수’이기 때문에 최종 시험에서 조건부 입학에 기재되어 있는 최저 등급 이상의 점수를 받아야 입학이 가능하다. 최종 시험 점수가 조건부 입학을 만족한 경우, 학교에서 자동적으로 비자와 입학 안내 e메일이 발송된다.
가장 가고 싶었던 케임브리지대에서 불합격 e메일을 받은 어느 1월 저녁, 임페리얼칼리지에는 합격했다. 그제야 임페리얼칼리지에 대해 더 알아볼 마음이 생겼다. 공부해야 할 양이 끔찍하게 많다는 소문과, 그를 입증하는 낮은 학생 만족도, 그리고 많은 학생들이 성적을 유지하지 못해 퇴학당한다는 이야기까지.
그런데 이런 소문은 오히려 학교생활에 대한 기대감을 키웠다. 아마 고등학교 때까지는 겪어보지 못했던 지라, 좋아하던 과목을 싫어하게 될 만큼 공부에 파묻히는 삶을 동경했던 것 같다. 2017년, 설레는 마음과 함께 생애 처음으로 영국 땅을 밟으며, 나의 임페리얼칼리지 생활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