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증강현실(AR·Augmented Reality) 게임을 소재로 한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증강현실은 스마트폰을 통해 보이는 현실 이미지에 가상 물체를 겹쳐 보여주는 기술이다. 얼마 전 신드롬을 일으킨 모바일 게임 ‘포켓몬고’가 AR을 이용한 대표적인 콘텐츠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여기서 기술적으로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됐다. 남주인공인 유진우(현빈)가 눈에 스마트 렌즈를 끼는 순간, 현실과 게임 공간의 경계가 사라진다. 이런 현실 같은 AR 게임, 언제쯤 플레이할 수 있을까.
콘택트렌즈에서 작동하는 박막전지 개발
드라마에 등장하는 AR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장비는 유진우가 눈에 끼는 스마트 렌즈다. 공학박사이자 IT 투자회사 대표인 유진우는 “렌즈 없이는 게임을 개발해봐야 소용없다”고 말한다.
드라마 속 스마트 렌즈가 구현하는 AR 기술은 현실에서는 요원하다. 이길행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차세대콘텐츠연구본부장은 “렌즈를 이용해 드라마처럼 실감 나는 증강현실을 구현하는 것은 아직 먼 미래의 일”이라고 말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AR 게임용 렌즈는 렌즈보다는 사실상 투명 디스플레이에 가깝다. 이 본부장은 “조그만 렌즈 안에 통신 모듈, 배터리, 카메라, 디스플레이까지 모두 담아야 하는 만큼 현재 기술로는 쉽지 않다”며 “렌즈에 들어가는 전자부품에서 발생하는 열이나 전자파가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임상시험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렌즈 내에 배터리를 삽입하는 기술에서는 진척이 있다. 최지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전자재료연구단 책임연구원이 이끄는 연구팀은 콘택트렌즈 내에서 작동 가능하도록 유연한 박막전지를 개발해 국제학술지 ‘나노 에너지’ 2018년 8월 24일자 온라인판에 발표했다. doi:10.1016/j.nanoen.2018.08.054
연구팀이 개발한 박막전지는 모든 구성 요소를 고체 필름 형태로 제작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전지는 휘어진 상태에서도 구동할 수 있고, 수분이 있는 환경에서도 작동한다. 연구팀은 콘택트렌즈 위에서 발광다이오드(LED)를 작동시키는 데에도 성공했다.
최 책임연구원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리튬이온전지는 액체 전해질을 사용하고 있어, 장기간 사용하거나 충격을 받았을 때 폭발 위험이 있다”며 “이번에 개발한 박막전지는 폴리이미드 기판과 세라믹 전도체를 사용해 전체가 고체로 이뤄져 있어 그런 위험이 없다”고 설명했다.
현재 연구팀은 박막전지에서 눈의 동공 부분을 뚫어 시야를 확보한 상태다. 최 책임연구원은 “앞으로 시야를 전혀 방해하지 않는 완전히 투명한 박막전지도 개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산업체에서 유용한 AR 글라스
그렇다면 현재 AR 기술은 어디까지 온 걸까. 이 본부장은 “현재 AR 기술은 크게 두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며 “스마트폰이나 TV처럼 화면에 증강현실을 구현하는 기술과 렌즈를 포함해 안경형 AR 글라스로 증강현실을 구현하는 기술”이라고 말했다.
화면에 증강현실을 구현하는 기술은 카메라만 추가하면 돼 크게 어렵지 않다. 스마트폰의 경우 카메라가 이미 달려있어 현재로서는 가장 이상적인 AR 기기로 꼽힌다. 이를 통해 ‘포켓몬고’ 등 게임뿐만 아니라 가상 피팅 서비스 등 다양한 서비스가 개발됐다.
AR 글라스 기술은 아직 시작 단계다. 구글이 2012년 ‘구글 글라스’를 선보인 뒤 시장에는 HMD(Head Mounted Display·안경처럼 착용하는 형태의 영상장비)가 쏟아져 나왔지만 대부분 두껍고 무거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대신 구글이 내놓은 산업용 AR 글라스는 산업체를 중심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 본부장은 “BMW 엔지니어들은 구글의 AR 글라스를 이용해 따로 설명서 없이도 고장이 난 부품이 어떤 부품인지, 그리고 어떻게 정비해야 할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며 “조립, 정비 등 많은 부품을 다루는 산업에서 AR 글라스의 수요가 많다”고 말했다.
현재 기술 수준에서 드라마 속 게임과 가장 비슷한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제품은 마이크로소프트(MS)의 AR 기기 ‘홀로렌즈’다. 윈도우10 기반의 홀로렌즈는 큰 고글 형태다. 홀로렌즈를 끼면 사용자가 있는 공간을 3차원으로 인식할 수 있고, 동작과 음성 명령을 내릴 수 있어 증강현실을 실감 나게 체험할 수 있다.
컴퓨터 없이 단독으로 구동할 수도 있다. MS는 ‘마인크래프트(블록을 쌓아 기계를 만들어 동작시키거나 마을을 만들어 운영하는 게임)’를 홀로렌즈로 구동하는 모습을 공개하기도 했다. 현재 홀로렌즈는 개발자 위주로 설계됐지만, MS는 2019년 일반 소비자를 위한 홀로렌즈 신제품 출시를 계획하고 있다. 구글도 구글 글라스를 업그레이드해 판매할 예정이다.
이 본부장은 “현재 증강현실 기술은 공간을 2차원으로만 인식할 수 있어 현실적인 이미지 구현에 한계가 있다”며 “심도(깊이) 카메라를 이용해 공간을 3차원으로 인식할 수 있는 AR 기술이 연구되고 있다”고 말했다.
촉감 구현은 햅틱 이용한 촉각 패드로
드라마에서 유진우는 AR 게임에 들어가 칼을 잡고 휘두른다. 칼의 손잡이를 통해 전달되는 감각은 고스란히 유진우의 피부에 전달된다. 실재하지도 않는 존재에서 촉감을 느끼는 것이다. 실감나는 AR 게임에는 이런 촉각 효과, 즉 햅틱(haptic) 테크놀로지가 중요하다. 햅틱은 그리스 말로 터치를 뜻한다.
ETRI는 초음파 원격 햅틱 기술을 개발 중이다. 이 기술은 인간이 들을 수 없는 40kHz(킬로헤르츠·1초에 4만 번 진동하는 주파수) 대역의 초음파를 200~300개 장치로 동시에 허공으로 발사해 피부에 압력을 가한다. 인공적인 촉각을 만드는 것이다.
황인욱 ETRI SW콘텐츠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세계적으로 초음파를 이용해 촉각을 전달하려는 연구가 한창”이라며 “초음파의 영역을 혀의 촉감으로 확대하거나 초음파의 세기를 조절해 정교함을 높이는 등 다양한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황 선임연구원은 초음파 햅틱 기술을 이용해 가상의 피아노를 개발했다. 머리에 고글을 끼고 초음파 발생 장치를 바라보면 그 위로 가상의 피아노 건반이 펼쳐진다. 건반을 누르면 피아노 소리가 나고, 이와 함께 손끝에 무언가를 누르는 듯한 감촉이 느껴지면서 마치 실제로 피아노를 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연구팀은 이 내용을 ‘2017 IEEE 월드 햅틱스 콘퍼런스’에서 공개했다. doi:10.1109/WHC.2017.7989903
촉각 패드를 이용해 촉각을 구현할 수도 있다. 패드라는 매개체를 이용해 촉각을 구현하는 것이다. 만질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점에서 햅틱 기술보다는 상대적으로 난이도가 낮다. 강성철 KIST 의료로봇연구단장이 이끄는 연구팀은 패드를 이용해 2차원에서 촉감을 느끼는 방법을 고안해 국제학술지 ‘산업 정보학 저널’ 2018년 6월 26일자에 발표했다. doi:10.1109/TII.2018.2850849
연구팀이 개발한 촉감 패드는 공명을 이용한 모터인 선형 공진 구동기(linear resonant actuator)를 이용해 진동을 전달한다. 이 모터는 두께가 얇아 스마트폰에도 삽입할 수 있다.
이 패드는 인간의 착각을 이용해 효율성을 높였다는 점에서 특히 의미가 있다. 손가락 촉각의 분해능은 약 5mm 정도다. 즉, 손가락의 한 지점에서 어느 쪽으로든 5mm 이내 범위에서는 뇌가 동일한 부위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10mm 간격으로 모터를 배치했다. 강 단장은 “모터의 간격을 넓힌 대신 자극하고자 하는 부분의 모터와 인접한 모터의 진동을 동시에 조절해 감각의 착각을 불러일으키면 연속적으로 촉감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며 “패드에 들어가는 모터를 4분의 1 수준으로 줄일 수 있어 효율적”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