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정선군 신동읍에 있는 해발 989m의 예미산에는 특별한 엘리베이터가 있다. 바로 ‘우주의 미스터리’로 불리는 암흑물질을 찾으러 지하 600m깊이까지 수직 갱도를 따라 땅속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다. 사진은 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지상을 향해 찍은 것이다. 이곳에서 더 내려간 지하 1100m에는 기초과학연구원(IBS) 지하실험연구단이 암흑물질을 찾기 위해 설치 예정인 입자 검출기 공사가 한창이다. 11월 6일 국내 언론 최초로 현장을 찾았다.
이곳은 현재 철광이 운영 중이다. 철광에 가본 것은 처음이었다. 자동차를 타고 예미산을 오르니 거대한 폐석 더미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날은 예미산 여신(女神)에게 고사를 지내는 날이었다. 한 철광 관계자는 “갱도를 뚫을 때면 여신을 괴롭힌다는 생각에 늘 고사를 지낸다”고 말했다.
최첨단 과학실험 시설이 설치되는 곳에 여신이라니. 철광의 낯선 풍경과 우주의 암흑물질 이미지가 한 데 뒤섞여 불안하면서도 환상적인 느낌을 줬다. 남미 작가들의 ‘마술적 사실주의’ 소설 속 한 장면 같았다. 예미산 여신은 인간이 ‘우주의 미스터리’를 풀게 허락할까.
日 노벨상 배출 지하실험실 규모와 비슷
2017년 8월 IBS 지하실험연구단은 우주입자연구시설 구축을 위해 정선군, 한덕철광과 업무협력협정(MOU)을 체결했다. 이 연구시설 조성에는 210억 원이 투입되며, 2019년 완공한 뒤 2020년부터 본격적인 실험을 진행할 계획이다.
정선 실험시설은 양양에 이어 지하실험연구단이 운영하는 두 번째 지하실험실이다. 지하실험연구단이 직접 땅을 파고 수직 갱도를 뚫을 수 없는 만큼 이미 운영 중인 철광의 지하 공간을 찾아 일부를 계약을 맺었다. 양양 지하실험실 역시 국내 최대 규모의 낙차를 가진 한국수력원자력 양양 양수발전소 공간을 빌려 구축됐다.
정선에 새로운 지하실험실을 구축하는 이유가 뭘까. 박강순 IBS 지하실험연구단 책임기술원은 “양양 지하실험실은 지하 700m에 구축됐다”며 “이 정도 깊이도 실험을 진행하기에는 충분하지만 터널 폭이 4~5m에 불과해 실험실에 설치할 수 있는 장비의 크기에 제약이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양양 지하실험실의 규모는 300m2 수준이지만, 정선 지하실험실은 약 2000m2로 건설될 예정이다. 이는 일본 기후현 폐광 지하 1km에 설치된 중성미자 관측 장비인 ‘슈퍼 가미오칸데’와 비슷한 규모다. 가미오칸데는 중성미자 첫 관측에 성공해 2002년 일본에 노벨 물리학상을 안겼다.
세계 최고 수준 민감도로 입자 검출
수직 갱도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땅속으로 내려갔다. 초속 2m. 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데도 워낙 깊어 지하에 도달하기까지 10여 분의 시간이 걸렸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갱도 안에 울려 퍼졌다.
박 책임기술원은 “지하실험연구단은 말 그대로 깊은 지하에서 암흑물질과 중성미자라는 희귀한 우주 입자를 찾는다”고 설명했다. 암흑물질과 중성미자는 우주의 기원과 물질의 존재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로 꼽힌다. 아직 현대물리학이 풀지 못한 최대 숙제로 여겨지는 만큼 이들의 존재는 오랫동안 노벨 물리학상 후보 0순위로 거론됐다.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확인됐지만, 여전히 정체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1970년대 이후 암흑물질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속속 드러나면서 우주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물질은 우주의 약 5%만 차지할 뿐 나머지는 암흑에너지(약68%)와 암흑물질(약 27%)로 이뤄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들 정보는 암흑물질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로 확인한 것일 뿐 암흑물질의 실체가 직접 확인된 적은 없다.
중성미자도 마찬가지다. 박 책임기술원은 엄지손톱을 들어 보이며 “지금도 중성미자는 1cm2의 손톱만 한 면적에 초당 1000억 개가 지나간다”며 “이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중성미자가 자연계를 구성하는 입자와 상호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중성미자에는 ‘유령 입자’라는 별칭이 붙어 있다.
지하실험연구단이 지하 깊숙이 들어가는 이유도 흔적을 잘 남기지 않는 유령 입자를 포착하기 위해서다. 박 책임기술원은 “지하로 들어가면 우주에서 지구로 들어오는 우주선(線)이 암반을 투과하면서 많이 소진되기 때문에 지상에서보다 불필요한 우주선의 신호 등 배경잡음을 최대한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주변이 조용해야 아주 작은 소리를 포착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다.
특히 정선 예미산은 지하실험실 구축에 유리한 지형이다. 우선 대지 표면이 평평해 깊이 들어가도 사방에서 투과하는 거리가 비슷해 우주선 차단 효과가 높다.
암질이 석회암으로 형성됐다는 점도 실험에 유리하다. 박 책임기술원은 “석회암은 다른 암종에 비해 자연방사성 물질의 배출량이 적어 암흑물질 검출기에 잡음을 덜 만든다”라고 말했다.
현재 정선 지하실험실의 우주입자연구시설은 구축이 30% 정도 진행됐다. 박 책임기술원은 “전 세계에서 성능이 가장 뛰어난 입자 검출기는 민감도가 100meV(밀리전자볼트) 수준”이라며 “정선 지하실험실에 들어설 검출기는 15meV로, 완공되면 세계 최고 수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배경잡음인 우주선의 차단 능력이 기존 검출기에 비해 5배 이상 향상된다는 뜻이다.
‘윔프’ 흔적 맞나 검증 중
정선을 떠나 양양 지하실험실로 이동했다. 양수발전소의 긴 터널을 지나니 좁은 터널 안에 구축된 지하실험실이 보였다. 지하 700m의 공간은 미로 같았고, 축축했다. 끊임없이 돌아가는 기기들이 뿜어내는 열로 바깥은 초겨울인데 터널 안은 후텁지근했다.
양양 지하실험실은 두 구역으로 나뉜다. 서울대 암흑물질연구단이 2003년 개소한 ‘Y2L A6’ 실험시설과, IBS 지하실험연구단이 2014년 완공한 ‘Y2L A5’ 실험시설이다.
A6 실험시설은 총면적 100m2로 4개의 방으로 구성됐다. 이곳에서는 요오드화세슘 결정 검출기를 이용해 한국형 암흑물질 탐색 실험(KIMS)이 진행되고 있다. 검출기가 설치된 붉은 조명의 방에서 이현수 IBS 지하실험연구단 부연구단장은 “여기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며 웃었다.
A5 실험시설에는 최근 지하실험연구단이 주축이 돼 연구 성과를 낸 ‘코사인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코사인 실험은 ‘약하게 상호작용하는 무거운 입자’라는 뜻을 가진 ‘윔프(WIMP·Weakly Interaction Massive Particle)’의 흔적을 찾는다.
윔프는 유력한 암흑물질 후보 입자로 여겨진다. 그러나 지금까지 윔프의 흔적은 1997년 이탈리아 그란사소 국립연구소의 ‘다마(DAMA)’ 실험에서만 유일하게 관측됐다. 이후 21년째 다마 팀이 관측한 신호가 정말 암흑물질인지에 대한 논란이 이어져 왔다.
지하실험연구단이 이끄는 ‘코사인-100 공동연구협력단’은 총 106kg의 요오드화나트륨 결정을 개발해 암흑물질 검출기의 민감도를 높였다. 그 후 이를 이용해 다마 팀이 발견한 신호가 윔프가 남긴 흔적이 아닐 가능성을 시사하는 데이터를 확보했다. 이는 2016년 10월 20일부터 12월 29일까지 59.5일간 수집한 데이터를 해석한 결과다. 연구팀은 현재 이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에 투고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이 부연구단장은 “다마 팀의 실험과 상반된 결과를 얻었지만, 암흑물질 검출 시설을 갖추는 것 자체가 어려운 만큼 신호가 똑같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며 “정선에 지하실험실이 새로 구축되면 암흑물질 탐색을 계속해 5년 내 암흑물질 미스터리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 비핵화도 검증하는 중성미자 실험
지하실험연구단은 중금속 몰리브덴을 이용해 극저온(영하 237도) 환경에서 빛과 온도의 변화를 동시에 측정해 중성미자 미방출 이중베타붕괴를 탐구하는 ‘AMoRE 실험’도 진행 중이다.
이중베타붕괴는 자연에 존재하는 일부 원자핵에서 두 개의 양성자가 두 개의 중성자로 바뀌는 현상으로, 이때 두 개의 전자와 두 개의 중성미자가 방출된다. 한편 이 반응이 일어날 때 중성미자 두 개가 방출되지 않는 현상도 1937년 이론적으로 예측됐지만, 아직 실험에서 확인되지는 않았다.
이 부연구단장은 “이 현상이 발견되면 우주에 반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암흑물질 검출과 중성미자 미방출 이중베타붕괴 탐지 실험은 완전히 다른 실험이지만, 희귀한 반응을 포착하기 위해 배경잡음을 줄일 수 있는 지하에서 한다는 점에서 실험 테크닉이 매우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최근 지하실험연구단은 북한 비핵화를 검증하는 방법으로 중성미자 검출기를 사용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원자로에서는 초당 1000만W 출력일 때 대략 2해 개(2X1020)개의 중성미자가 생성되는데, 이렇게 생성되는 중성미자의 개수가 원자로의 열 출력에 비례한다는 점을 고려해 원자로의 가동 여부를 추적한다는 아이디어다.doi:10.1126/science.aav8136
서선희 IBS 지하실험연구단 연구위원은 “그동안 순수 학문으로만 여겨진 중성미자 연구를 핵의 평화적 이용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며 “만약 실현된다면 북한 과학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연구 형태가 돼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