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의 이학박사인 이태규박사(88·한국과학기술원 명예교수·화학)의 일대기가 제자들에 의해 출간돼 과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어느 과학자의 이야기'라는 제목이 붙은 이 전기는 이박사의 미수(米壽, 88세를 일컫는 말)를 기념해 국내에 있는 제자들이 전기편찬위원회를 구성해 집필한 것이다.
제자들이라고는 하지만 면면을 살펴보면 이들 역시 국내 과학계의 원로급 인사들이다. 최상업(서강대 명예교수) 장세헌(서울대 명예교수) 한상준(한양대 명예총장) 김완규(전 숭실대교수) 이용태(한국정보산업연합회 회장) 김각중(경방회장)씨 등등.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연구와 강의를 거르지않고 있는 이박사를 과학기술원에 있는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요즘도 새벽 세시쯤이면 어김없이 눈이 떠집니다. 전날 읽던 책을 다시 보거나 학생들이 진행중인 연구테마를 머리속에서 정리해 보기도 하지요. 강의는 수, 목 이틀간 두시간씩 하는데 6명의 박사과정 학생이 있습니다."
유일한 낙이었던 아침산책을 최근 지팡이에 의지해야 하는 그의 건강 때문에 충분히 하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한다. 그외 잔병치레는 없을정도로 건강하고, 사람이나 연구테마에 대한 기억력도 예전과 다름없다.
북으로 간 제자들 가끔 생각
최근 남북총리회담이나 체육 문화교류가 서울 평양을 오가면서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이박사는 가끔 해방직후 혼란스러웠던 대학분위기를 떠올린다고 한다. 조선인으로는 드물게 일본 교토(京都)제국대학 교수직을 맡고있던 이박사는 해방직후 귀국해 경성대학(서울대학교의 전신) 이공학부장을 맡게 된다. 그러나 모처럼 해방된 조국에서 과학발전을 위해 봉사하려던 이박사의 꿈은 1946년 소위 '국대안파동'이 일어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는 국립대학교로 설립된 서울대학교의 초대 문리대학장으로 임명됐으나, 국대안에 대한 교수 학생들의 거센 반대로 학문보다는 정치의 와중에 휩쓸려 들어가게 된 것이다.
"능력있는 교수가 드물었던 것도 문제였지만 우선 교수 숫자가 절대 부족했는데, 국대안파동으로 많은 교수들이 사표를 내자 정상적인 수업은 생각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학장으로서 주된 일은 나가는 교수들을 말리고 제자들을 불러다 교수 숫자를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끼던 제자 두명이 불쑥 찾아와 사표를 던졌을 때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이박사는 한국에서 더이상 학문을 계속할 의욕을 잃었고,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미국인 동료 아이링교수(유타대학)가 같이 연구할 것을 권유해 미국행을 결심하게 됐다고 한다.
"당시 사표를 냈던 교수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아직 북한에 살아있고 제자들 가운데도 흥남질소비료공장 등에 취직시켰던 사람들이 있어 그들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요".
이태규박사는 일제 식민통치가 한창이던 1931년 '일산화탄소 분해시 촉매작용에 관한 연구'로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일본 유학생들은 대개 법학 문학 등을 전공했기 때문에 이박사의 학위취득은 국내외에 비상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후 1937년 일본인도 어려운 교토제국대학의 조교수로 임명됐고, 1939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학에서 테일러 아이링 메이어 아인슈타인 등 세계적인 석학들과 교유를 하게 된다.
"처음 반년동안은 테일러박사와 공동으로 연구했는데 그는 실험위주였고 나는 이론위주였으므로 잘 맞지 않았어요. 그후에는 아이링박사와 주로 연구를 같이 했는데 점성 (粘性)이론 반응속도이론 촉매작용 등이 관심을 갖고 연구한 분야입니다." 당시 이박사의 학문적 수준은 세계 화학계의 최첨단을 걷고 있었다. '반응속도론에 관한 이론적 연구' 'SST액체이론'등이 크게 주목을 받았고 '표면복합물이론'을 발표해 촉매반응에 대한 오류를 지적함으로써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리-아이링이론
아이링교수의 권유로 유타대학교수가 된 이박사는 그곳에서 그의 학문적 개화기를 맞게 된다. 그 중 '리-아이링(Ree-Eyring)이론'으로 알려진 '비(非)뉴턴 운동이론'은 세계 화학계에 널리 알려진 이론이다. 이 이론은 비뉴턴유동의 여러가지 현상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어 분자점성학의 기초가 되었다. '리-아이링'은 이박사와 아이링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 무렵 이박사는 노벨상에 가장 근접해 있었다.
"65년 노벨상 추천위원으로 선정됐어요. 아이링박사를 추천했지요." 결과적으로 아이링박사도 노벨상을 놓치고 말았지만 이박사는 69년 다시 한번 분자점성학에 대한 기여로 노벨상 물망에 오르게 된다.
학문연구이외에 미국에서 이박사가 가졌던 관심은 한국인 후학(後學)들을 양성하는 일이었다. 그는 문리대학장시절 눈여겨 보아두었던 제자들을 잇따라 유타대학으로 불러 관심을 갖고 보살펴 주었다. 한상준 장세헌 이용태 김완규 김각중 전무식(KAIST 교수) 등 20여명이 유타대학에서 이박사의 지도아래 유학시절을 보냈다. 이때문에 국내 과학계 특히 화학분야에는 전통적으로 유타대학 출신들이 많다.
이박사가 25년간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것은 1973년 한국과학원(KAIS, 현재 한국과학기술원)을 설립되면서 해외과학자 유치대상에 포함된 것이 계기가 됐다. 이박사는 그후 17년간 손자 손녀뻘되는 제자들에게 필생의 연구성과를 전수해오고 있다.
"일제시대 우리가 공부할 때나 미국 유학시절 우리 밑의 세대들이 겪은 고생에 비하면 요즘 젊은이들은 행복한 환경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무랄데 없이 우수한 학생들도 많습니다. 단지 순수한 학문적 열정보다 세속적인 욕망에 한눈파는 것을 볼 때 안타까운 느낌이 듭니다." 70여년을 외길로 살아온 과학자로서 이태규박사는 '과학자의 길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에 대해 서슴없이 '예민한 관찰력과 끊임없는 노력' 두가지를 꼽는다.
그의 가족사항 중에 특이한 사항은 시인 정지용의 중매로 결혼하게 됐다는 점과 1남3녀의 자녀 가운데 3명이 이학박사 학위를 땄다는 점이다. 지난해 부정선거 척결의지가 관철되지 않자 홀연히 선거관리위원장직을 사퇴한 이회창씨는 그의 조카.
'언제까지 강의를 계속할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과학자는 스스로 강의와 연구를 그만둘 때를 감지한다"고 이태규박사는 웃으며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