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빛의 속력으로 정의한 ‘완벽한 단위’ 미터

‘빛이 진공 중에서 1/299 792 458 초 동안 진행한 경로의 길이’ . 1983년 제17차 국제도량형총회(CGPM)에서 정의돼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는 길이의 단위  ‘미터(m)’ 의 정의다. 전 세계 표준 과학자들은 값이 일정하고 변하지 않는 기본 물리상수로 단위를 재정의 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오는 11월에는 질량의 단위인 킬로그램(kg), 전류의 단위인 암페어(A), 물질의 양의 단위인 몰(mol), 온도의 단위인 켈빈(K)이 각각 플랑크 상수, 기본전하 상수, 아보가드로 상수, 볼츠만 상수를 통해 재정의 된다. 미터는 이보다 35년 앞서 기본단위 중 가장 먼저 기본 물리상수(빛의 속력, 299 792 458 m/s)를 통해 정의됐다. 정의 자체의 불확도가 영(0)인 셈이다. 인류가 미터를 발명한 역사와 미터를 정확히 실현하는 방법에 대해 살펴봤다.

 

 

 

몸의 일부로 단위를 만들다


역사에 기록된 가장 오래된 길이의 단위는 ‘큐빗(cubit)’이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팔꿈치에서 가운데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를 1 큐빗이라 정의했다. 이후 다양한 종류의 큐빗이 개발됐는데, 파라오의 팔꿈치에서 가운데 손가락까지의 길이에 손바닥 폭의 길이를 더한 것을 특별히 1 로열 이집트 큐빗으로 불렀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큐빗의 길이를 화강암에 새겨 ‘자’로 활용했다. 자의 정확도는 의외로 높았다. 기원전 2600년, 이집트 제4왕조의 제2대 파라오인 쿠푸 왕이 건조한 대 피라미드(Great Pyramid)를 보면, 동서남북 네 개의 밑변 길이가 230 m에서 한 뼘 이내로 일치한다. 


신체를 기준으로 한 길이의 단위는 이후에도 다양하게 발명됐다. 서양에서는 엄지손가락 폭에서 착안한 인치(2.54 cm), 팔 길이에서 유래한 야드(91.44 cm), 어른의 발 길이를 의미하는 푸트(30.48 cm) 등을 사용했고, 동양에서는 한 뼘에 해당하는 척(尺), 손가락 한 마디를 나타내는 촌(寸) 등의 단위를 썼다. 


우리나라에서 척을 사용한 기록은 삼국과 통일신라시대 역사서에도 남아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기록된 왕과 왕비의 키를 보면 고구려는 한척(漢尺·22 cm~23 cm)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당대척(唐大尺·29.7 cm)을 사용해 불국사, 석굴암 등 건축물을 실측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 조선시대는 기준척을 여러 형태의 기본 척으로 사용했다. 양전척 또는 주척(토지 측량), 포백척(포의 수취), 영조척(건물 축조) 등이 있었다. 조선시대 암행어사는 마패뿐만 아니라 놋쇠로 만든 자 유척(鍮尺)을 지니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유척은 지방관이 조세를 공정하게 징수하는지, 형벌을 합리적으로 적용하는지 감찰하는 용도로 쓰였다. 

 

 

 

지구의 크기를 기준으로 미터원기를 만들다


1789년 7월 14일부터 1794년 7월 28일까지 일어난 프랑스의 시민혁명은 길이의 단위에도 혁명을 가져왔다. 길이의 단위가 특정 시대나, 특정 권력자에게 귀속되지 않도록 인류의 공통 유산인 자연에서 길이의 단위를 구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프랑스의 천문학자 들랑브르와 메솅은 이를 위해 1792년부터 1798년까지 무려 7년 동안 파리를 지나는 자오선의 길이를 쟀다. 그들은 프랑스 북쪽 국경지역 덩케르크에서 파리를 거쳐 스페인 바르셀로나까지 이어지는 거리를 ‘삼각측량’법으로 측정했다. 삼각측량법은 삼각형 한 변의 길이와 그 양 끝 각의 각도를 알면, 남은 두 변의 길이를 삼각함수로 계산해 삼각형 각 점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사실에 기반한 측량법이다. 거리를 알고자 하는 두 점 사이의 영역을 여러 개의 삼각형으로 분할하고, 이 삼각형들의 각도를 측정해 거리를 알아낼 수 있다. 


들랑브르와 메솅은 각각 북쪽과 남쪽의 11.8 km, 11.7 km 길이의 기준선을 측정한 뒤, 수많은 삼각형의 각도를 재 덩케르크에서 바르셀로나까지 총 1050 km에 해당하는 거리를 쟀다. 그리고 지구의 타원도를 적용해 북극에서 적도까지의 자오선 길이를 계산했다. 표준 과학자들은 1799년 이 길이의 1000만 분의 1을 미터로 정의하고 미터원기를 만들었다.

 
현재 파리 근교에 위치한 국제도량형국(BIPM) 지하실에 보관 중인 국제미터원기(IPM)는 1889년 제1차 CGPM에서 미터의 정의로 승인된 원기로, 백금과 이리듐을 각각 90 %와 10 % 포함하는 합금으로 만들어졌다. BIPM은 IPM의 복제품을 여러 개 만들어 세계 각 나라에 보급했는데, 우리나라에 도입된 복제품(No. 10c)은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사용되다가 현재는 국가기술표준원에서 보관 중이다.

 

 

 

물리적 원리로 길이를 정의하다


측정과학이 발전하면서 미터원기 역시 한계가 드러났다. 눈금선의 폭이 6 μm(마이크로미터·1 μm는 100만 분의 1 m)에서 8 μm여서 그 중심을 정확히 찾기가 어려운 데다가 열팽창, 시간 흐름에 따라 길이가 미세하게 변했다. 인공물인 만큼 닳거나 파손될 가능성도 있었다. 


표준 과학자들은 1960년 크립톤-86 원자의 복사선을 이용해 미터를 재정의했다. 진공 중 크립톤-86 램프에서 나오는 주황색 빛 파장의 1 650 763.73배 되는 길이를 1 m로 정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물리적 원리를 이용한, 실험을 통해 언제든지 구현이 가능한 단위의 정의가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같은 해 크립톤-86 램프보다 훨씬 더 안정된 파장의 빛을 내는 레이저가 개발됐고, 표준 과학자들은 이후 레이저를 이용한 연구를 통해 빛의 속력을 상대 불확도 3×10-9 수준으로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게 됐다. 1975년 빛의 속력은 기본 물리상수로 인정받았고, 결국 이것이 1983년에 정의돼 현재까지 사용 중인 미터의 정의, ‘빛이 진공 중에서 1/299 792 458 초 동안 진행한 경로의 길이ʼ의 바탕이 됐다.

 

 

 

● “새로운 산업에 필요한 길이 측정 신기술 개발할 것” - 강주식

 

“새로운 산업이 발전하면 새로운 측정 표준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측정 표준을 개발하고, 측정 정확도와 정밀도를 계속 높여 나가는 게 저희의 임무죠.” 


강주식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물리표준본부 광학표준센터 책임연구원은 길이 단위의 표준 연구는 ‘현재진행형’이라고 강조했다. 


길이의 단위인 미터는 1983년 다른 단위에 비해 35년이나 앞서 기본 물리상수를 통해 정의됐다. 광속을 이용해 정의함으로써 정의 자체의 불확도가 영(0)이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은 1989년 미터의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요오드 안정화 헬륨-네온 레이저’ 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요오드 안정화 헬륨-네온 레이저는 전 세계에서 길이의 표준기로 쓰고 있는 레이저로, 주파수의 상대 안정도가 10-11에 달한다. 


따라서 가장 높은 정확도로 길이를 재고 싶다면, 측정대상물의 길이가 이 레이저 파장의 몇 배인지를 헤아리면 된다. 이러한 안정된 레이저의 파장은 ‘광빗(optical comb)’ 으로 측정할 수 있는데, 광빗은 매우 안정된 동일한 간격의 주파수 여러 개가 촘촘하게 합쳐진 짧은 펄스 레이저다. 


그러나 복잡한 레이저를 산업체에서 직접, 매번 사용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산업현장에서는 특수강으로 제작한 다양한 길이(0.5 mm~1000 mm)의 게이지 블록(gauge block)을 측정 표준으로 사용한다. 게이지 블록의 길이 오차는 수십에서 수백 나노미터(nm·1 nm는 10억 분의 1 m)에 불과하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는 광학 간섭계를 이용해 이런 게이지 블록을 측정하고 있다. 


강 책임연구원은 “표준을 유지하고 향상시키는 것은 표준을 확립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라며 “나라간 기술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역할이 더욱 막중해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기업이 기술을 다른 나라에 수출하려면 국제적으로 공인된 기관에서 발급한 교정 및 측정성적서를 제출해야 한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은 전세계 측정 표준대표기관과 함께 ‘CIPM(국제도량형위원회) MRA(상호인정협약)’ 를 맺었다. 여기에 속한 기관(100개국 158개 기관)은 측정능력이 동등하다고 인정받고, 교정 및 측정성적서를 서로 인정한다는 협약이다. 


“이런 측정능력의 동등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국제비교를 실시해야 합니다. 게이지 블록을 여러 나라 표준기관에 차례로 보내고, 각 기관의 측정결과를 모두 모아 상호 비교하는 것도 국제비교의 한 예입니다.”


강 책임연구원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게이지 블록 국제비교를 총괄 지휘하고 있다.  이는 한국의 측정기술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의미다. 강 책임연구원은 지난해 11월부터 아시아-태평양 측정표준협력기구(APMP) 산하 12개의 기술위원회를 대표하는 선임의장으로 선출돼 CIPM-MRA와 관련된 국제회의에 아시아 대표로 참석하고 있기도 하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은 자체 개발한 측정기술을 산업체에서 직접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이전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반도체 웨이퍼의 불량 여부를 파악하거나 대형 디스플레이용 유리판의 불량을 안정적으로 검출할 수 있는 기술 등은 이미 상용화됐다.   


강 책임연구원은 “X선을 이용해 물체 내부의 길이를 정밀하게 측정하거나, 3D 프린터에 대한 측정 표준을 확립하는 등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한 측정기술을 개발하고 표준을 확립하는 데에도 꾸준히 힘쓸 것”이라고 밝혔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18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이영혜 기자 기자
  • 사진

    현진
  • 기타

    정은우
  • 기획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

🎓️ 진로 추천

  • 물리학
  • 기계공학
  • 컴퓨터공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