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아내야 할 게 많고, 또 그것을 오랜 기간 담아내야 하는 것이 건축입니다. 건축물은 역사, 문화, 그리고 주변 사회를 용광로처럼 모두 녹여내야 합니다.”
서울대 건축학과 학과장을 맡고 있는 여명석 교수는 건축, 그리고 건축물의 의미를 이같이 부여했다.
건축은 매우 보수적인 학문으로 알려져 있다. 건물 하나를 짓는데 많은 비용이 투입되는 만큼, 섣불리 새로운 시도를 했다가 실패하면 그 여파가 상당히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건축에도 최근 변화의 움직임이 거세다. 과거에는 네모반듯한 건물을 튼튼하고 빠르게 짓는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첨단 기술과 사회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일례로 건물의 예술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여 교수는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는 공학과 예술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대표적인 건축물”이라며 “휘고 뒤틀린 부정형의 건축물을 짓기 위해 설계, 소재 등 다방면에서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최근 건축학에서는 에너지 절약을 넘어 에너지를 생산하고 실내 공기질을 고려하는 친환경 연구, 시공 자동화, 사물인터넷(IoT)과 결합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교수진] 물로 굳히는 친환경 콘크리트 개발
건축학과는 세부 전공으로 건축물을 디자인하는 ‘건축학전공’과 건물을 짓는 공학적 방법을 연구하는 ‘건축공학전공’이 있다. 총 17명으로 이뤄진 교수진 가운데 9명은 건축학, 8명은 건축공학을 담당하고 있다.
건축학전공 교수들은 실제로 국내외 건물 설계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 조항만 교수는 세종시 중심행정타운(정부세종청사) 마스터플랜 등을 이끌었고, 최춘웅 교수는 서울 광진구 어린이대공원 내 꿈마루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설계에 참여했다. 세계 최대의 건축 축제로 알려진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에는 2006년 김승회 교수가, 2014년 존 홍 교수가 각각 전시를 하며 발군의 실력을 뽐냈다.
건축공학전공 교수들은 다양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며 건축 공법 발전에 이바지 하고 있다. 홍성걸 교수는 시멘트 없이 물로 굳히는 친환경 콘크리트를 개발했다. 기존 콘크리트는 시멘트와 모래에 물을 섞어 만드는데, 시멘트를 제조할 때 온실가스가 대량 배출되는 문제가 있었다. 시멘트 대신 알칼리 용액(수산화나트륨)을 사용할 수 있지만, 이 경우에도 인체와 환경에 유해하다. 홍 교수는 모래와 결합재에 물만 섞는 방식으로 콘크리트를 만드는 새로운 기법을 개발해 2017년 3월 재료과학 분야 국제학술지 ‘머티리얼스’에 발표했다.
강현구 교수는 새로운 포스트텐션 공법을 개발해 올해 7월 이 분야 세계 최고 기업인 프리시전 헤이즈 인터내셔널과 기술이전 계약을 맺었다. 포스트텐션 공법은 기둥 수가 적은 건물이나 기둥과 기둥 사이의 거리가 먼 다리에 사용되는 공법이다. 기존에는 구조물을 지탱하는 케이블을 당긴 뒤 변화된 길이를 일일이 파악해야 했지만, 강 교수는 케이블에 센서를 달아 계측과 기록을 자동으로 할 수 있는 ‘스마트 포스트텐션 공법’을 개발했다. 이 기술은 올해 공학한림원이 선정한 ‘100대 미래기술’에 포함됐으며, 국내에서는 이미 실제 시공에 사용되고 있다.
[교육 프로그램] 1, 2학년 통합교과과정 운영
서울대 건축학과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건축학과로 통합 선발해 2년간 통합교과과정을 이수하게 한 뒤 건축학전공과 건축공학전공 중 하나를 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대학은 이들 세부전공을 처음부터 각각 뽑으며, 일부 대학은 두 세부전공 중 하나만 운영한다.
여 교수는 “건축에서 디자인과 엔지니어링은 필수적으로 함께 가야 한다”며 “두 전공을 아우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더 적합한 세부전공을 택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1, 2학년 때 통합교과과정을 듣게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2015년까지만 해도 서울대 건축학과 역시 신입생을 전공별로 나눠서 선발했다. 건축학과 건축공학에서 요구하는 인증 제도가 각각 다르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디자인을 하는 건축학은 세계건축사연맹(UIA)에서 인증하는 건축사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서 5년제 학부 과정을 이수해야한다. 반면 건축 공법을 연구하는 건축공학은 공대의 다른 학과와 마찬가지로 ‘ABEEK 공학교육인증’ 조건만 충족하면 되기 때문에 학부 과정을 4년만 이수하면 된다.
두 전공의 요구 조건이 서로 다른 만큼 건축학과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두 전공을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편이 여러모로 편하다. 하지만 여 교수는 “3학년 때부터 세부 전공을 들어도 인증 기준을 충족할 수 있다”며 “디자인과 엔지니어링을 통합적으로 사고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진로 지원] 세계적 트렌드를 잡아라
1946년 설립된 서울대 건축학과는 국내 건축학과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만큼 그간 수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건축학과를 졸업하면 진로가 크게 세 분야로 갈라진다. 우선 건축 디자인을 전문으로 하는 경우에는 건축설계사무소에 취직하는 게 일반적이다. 건축 이론을 전공하는 경우에는 국토연구소 등 연구소나 대학으로 진출하고, 건축 공법을 전공한 경우 건설 회사나 주택공사, 국공립연구소 등에 자리를 잡는다.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창업도 또 하나의 길이다. 여 교수는 “건축의 수많은 요소들 중에서 한 부분에서라도 독특한 아이디어가 있다면 성공적인 창업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일례로 최근 졸업생들이 창업한 ‘창소프트 아이앤아이’는 건축물의 모든 정보를 관리하는 동시에 사전에 3차원(3D)으로도 볼 수 있는 모듈을 개발해 외국에 수출도 했다.
건축학과는 외국 대학과의 교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건축 분야는 국제적 활동이 많고, 예술적인 요소가 많이 가미되는 만큼 세계적인 트렌드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현재 서울대 건축학과는 싱가포르국립대와 매년 학부생 5명을 보내는 ‘NUS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또 건축 분야 선진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의 협력 대학에 매년 학부생 10명가량을 교환학생으로 보내고 있다. 연간 두세 차례 유명 건축가를 초청해 세미나도 연다.
건축학전공 4학년 2학기에는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건축전공 대학원생들과 공동 스튜디오도 운영한다. 양측이 10일가량 서로의 지역에 방문해 이에 적합한 건축 설계를 진행하고, 결과물을 전시회나 출판물을 통해 발표한다.
[인재상] 건축 전문가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포용력
서울대 건축학과에서 추구하는 인재상은 예술을 좋아하고, 인문학적 감수성과 수리적 능력을 갖춘 학생이다. 스펙트럼이 넓은 건축학과의 특징이 그대로 담겼다.
여 교수는 이와 더불어 건축 전문가로서 중요하게 갖춰야할 덕목 하나를 강조했다. 바로 포용력이다.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와 같은 초고층 건물의 경우 건설 과정에서 건축 전문가만 80~100명이 참여한다. 설계, 구조, 기계, 전기, 정보통신 등 건물의 각 요소를 담당하는 전문가가 모두 따로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엘리베이터만 담당하는 전문가도 등장했다. 건설 단계에 투입되는 현장 근로자들까지 포함하면 수천 명에 이른다. 때문에 건축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포용력이 중요하다.
여 교수는 “기술을 아는 디자이너, 디자인을 아는 기술자가 돼야 한다”며 “어느 한쪽 전공에 쏠리기보다는 디자인과 공학은 모두 알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언] 새로운 분야 도전해야
여 교수는 초등학생 시절 ‘타워링’이라는 재난영화를 보고 건축학도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는 “고층 건물에 대형 화재가 난 영화였는데, 불량 재료로 건물을 만든 것이 화재의 원인이었다”고 설명했다.
여 교수가 대학에 다니던 시기는 건축에서 적은 비용으로 튼튼한 건물을 짓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졌던 때다. 하지만 그는 건물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더 쾌적하고 안전하게 생활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실내 공기질 관리와 냉난방, 소방 설비를 연구하는 환경설비 분야가 국내에서 막 시작됐을 때 과감히 뛰어들었다. 현재 이 분야는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 중 하나로 꼽힌다.
여 교수는 “건축은 주변에 끼치는 영향력이 큰 만큼 사회적 책무가 대단히 큰 분야”라며 “사람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새로운 건축 연구는 계속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