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2012년 제주도에 자리를 잡았다. 제주도에서도 가장 남쪽에 있는 산방산 근처 바닷가에서 카페를 열었다. 올레길 10코스 근처인데다 워낙 해안가 경치가 아름다워서 항상 손님이 많았다. 제주도에 내려오기 전까지는 서울에서 대기업에 다니는 직장인이었다. 바쁘게 살았던 그 시절 카페는 어쩌다가 시간을 때우기 위해 들리는 장소쯤 됐다. 하지만 제주도에서 카페를 운영하다보니 경영뿐 아니라 커피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게 됐다. 주로 어떤 생두를 사서 어떻게 로스팅을 해야 맛있는 커피를 뽑을 수 있는지 연구했다.
현재 국내 커피 시장은 10조 원이 넘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커피콩(생두)은 거의 100%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해외 커피농장에서 키운 생두를 수입한 뒤 로스팅 전문회사에서 볶아 국내 카페에 공급하는 게 일반적이다.
왜 국내에서는 커피나무를 키우지 않는 걸까. 필자는 새로운 삶을 시작한 제주도에서 새로운 목표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바로 커피나무를 직접 키워 커피를 생산하는 일이었다.
쉰다리 누룩으로 만든 제주산 루왁커피 ‘제주 몬순’
커피나무를 기르기에 앞서 먼저 생두를 가공할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단지 로스팅을 한 커피보다 훨씬 맛과 향이 깊고 풍부한 커피를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생두를 로스팅하지 않고 커피를 만들 수 있는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루왁(Luwak) 커피다. 일반 커피와 달리 향긋한 과일향이 나는 듯한 특유의 풍미를 갖고 있다. 인도네시아에 살고 있는 사향고양이(팜시벳·Paradoxurus hermaphroditus)가 커피열매를 먹고 싼 똥에서 건져낸 커피 씨(원두)에서 추출한다. 연간 고작 500kg밖에 생산되지 않아 한 잔에 수만 원이나 된다.
루왁 커피의 풍미가 특별한 비결은 바로 질 좋은 커피콩과 발효에 있다. 먼저 사향고양이들은 가장 잘 익고 흠집이 없는 커피열매만 골라서 따먹는다. 이후 사향고양이의 뱃속에서 열매의 과육은 소화되고, 몸속에 흡수되지 않는 씨앗은 바깥으로 배설된다.
캐나다 겔프대에서 식품화학을 연구하는 막시모 말콘 교수는 ‘고약한 맛: 음식의 풍미에 숨은 모험과 과학(In Bad Taste: The Adventures and Science Behind Food Delicacies)’이라는 책에서 사향고양이는 커피콩을 소화시키지 못하지만 뱃속에 있는 소화효소, 특히 단백질 분해효소가 커피콩 껍질에 있는 단백질을 펩티드 사슬과 다양한 아미노산으로 분해한다고 설명했다. 또 사향고양이의 장에 살고 있는 수많은 미생물들이 대사과정에서 다양한 유기물을 만들어 루왁 커피가 다양한 풍미를 갖게 된다.
생두를 발효시키면 커피의 맛과 향이 변한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필자는 인도 몬순 커피의 생두를 발효시켜 새로운 커피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어떤 방식으로 커피를 발효시킬 수 있을까.
제주 전통 발효 음료인 ‘쉰다리’에서 답을 찾았다. 쉰다리는 제주도에서 남은 밥이 쉬기 전에 누룩을 조금 넣고 발효시켜서 만든다. 일단 커피 생두에 누룩을 넣어 발효시켰다. 하지만 커피가 제대로 발효되기는커녕 상해버리기 일쑤였다. 수차례 실패를 거쳐 결국 구수한 맛의 커피 생두를 얻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커피 생두에 ‘제주 몬순(Jeju Monsoon)’이라는 이름을 붙여 기술 특허를 출원했다.
커피 벨트 고지대와 비슷한 기온, 화산토가 적합
커피 발효 다음 목표는 커피나무 재배였다. 커피는 소위 ‘커피 벨트’라고 불리는, 적도를 중심으로 북위 25도와 남위 25도 사이에 위치한 열대 또는 아열대지방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이 지역은 연간 평균기온이 약 20도로 기온에 큰 변화가 없고, 연간 강우량이 평균 1500mm 내외로 토양에 유기물이 풍부하고 비옥하다. 커피 생산지로 유명한 남아메리카의 멕시코와 과테말라, 콜롬비아, 브라질, 아프리카의 우간다와 코트디부아르 등이 커피 벨트에 속한다. 또한 커피 벨트에 속한 지역 중에서도 해발 1500m 정도인 고산지대에서 커피가 잘 자란다.
즉, 커피가 잘 자라기 위한 기후 조건은 비가 너무 많이 오거나 적게 와서도 안 되고, 기온이 너무 덥거나 추워서도 안 된다. 여름에는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데다 겨울에는 춥고 눈까지 내리는 우리나라 기후에서는 커피가 자연적으로 잘 자라기 어렵다는 얘기다. 한반도 최남단인 제주도도 북위 33도로 커피 벨트보다 한참 북쪽에 위치하고 있고, 겨울에 눈이 내리기 때문에 노지에서 커피를 키우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제주도의 토양에서 희망을 찾았다. 커피 씨앗은 흔히 커피‘콩’으로 불리지만, 커피는 사실 콩과식물이 아니라 꼭두서니과식물이다. 꼭두서니과식물은 뿌리가 잘 발달하기 때문에, 뿌리가 깊이 뻗어 들어갈 수 있는 토양에서 잘 자란다. 제주도의 토양은 화산토이기 때문에 유기질이 풍부하고 배수가 잘 되며 약간 푸석거린다. 즉 커피가 뿌리를 깊이 뻗고 자라기에 안성맞춤인 셈이다.
고도가 100m 상승할 때마다 온도가 평균 1도가량 낮아진다는 사실에도 주목했다. 북위 33도에서는 북위 25도에 비해 평균기온이 10~15도 낮다. 하지만 이는 고도가 동일할 때의 얘기다. 다시 말해, 제주도가 북위 33도에 위치하고 있지만 고도가 높지 않다면 커피 벨트의 최북단인 북위 25도의 고산지대와 온도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사 결과 커피 벨트에 속한 지역에서도 저지대에 비해 평균기온이 약 10도 낮은 지역에서 커피나무가 잘 자란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제주도에서는 제주시보다 서귀포시의 겨울철 최저 온도가 2~3도 높다. 서귀포시에 비닐하우스를 설치해 일정한 기온을 유지하고 눈을 막아준다면 겨울철에도 커피나무를 키울 수 있지 않을까. 결국 2014년 제주도에서도 최남단인 산방산 인근에 커피농장을 세웠다.
물론 커피나무를 키우기 위해서는 기온을 15~30도로 유지하는 일도 중요했다. 커피나무는 10도 정도인 서늘한 기온에서도 자랄 수 있지만 5도에서는 성장이 멈춘다. 영하로 떨어지면 얼어 죽는다. 서리나 눈을 맞으면 이파리가 냉해를 입고 모두 떨어져버린다. 이와 반대로 기온이 너무 높고 햇빛이 너무 강할 때에는 잎이 말라 시들 수 있다.
이런 조건들을 고려해 커피나무가 자랄 수 있는 최적의 시스템으로 비닐하우스를 지었다. 별도 난방 시설 없이 기온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커피나무 주변에는 높은 나무를 심어 그늘을 만들었다. 현재 필자가 운영하는 ‘제주커피수목원’은 넓이가 2446m2으로, 연간 100kg의 커피 생두를 생산하고 있다.
커피열매 껍질과 생두 발효시켜 만든 ‘커피와인’
제주도에서 커피나무 키우기에 성공한 뒤 다시 새로운 도전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인류가 커피 생두를 볶아서 마시기 시작한 것은 200~300년 전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커피 열매의 과육은 버리고 씨앗만 음료로 활용해 온 셈이다.
하지만 커피콩으로 커피만 내려야 하는 건 아닐 것이다. 쌀로 밥을 짓기도 하지만, 떡을 만들거나 술도 빚지 않는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커피농장에서 생산되는 커피나무의 모든 부위를 가공해서 음식을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궁금해졌다.
먼저 커피 잎으로는 차를 만들어 내렸다. 커피열매의 껍질도 말려서 차로 내렸다. 여러 가지 실험을 하던 중 커피열매의 껍질에 당분이 많다는 점에 착안해 와인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도와 포도껍질을 으깬 즙을 발효시키면 효모가 당분을 먹고 알코올을 만든다. 커피열매 껍질의 당도는 20~24브릭스(Brix·1브릭스는 물 100g 안에 설탕이 1g 녹아 있는 당도)로 발효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포도에 비해 수분이 부족해 물을 추가했고, 설탕도 좀 더 넣은 뒤 효모를 추가해 발효시켰다.
이런 과정을 거쳐 2015년 드디어 알코올 도수 11%인 커피와인을 얻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토대로 2년 뒤에는 커피열매 껍질로 와인을 제조하는 기술 특허를 출원했다. 그리고 와인을 증류해 브랜디를 만들 듯이, 이번에는 커피와인을 증류했다. 몇 차례 시도 끝에 결국 알코올 도수 40%인 커피와인 증류주 ‘커피코냑’을 만들었다. 커피코냑은 코냑의 맛이 나면서도 은은한 커피향이 동시에 풍긴다.
혹시 커피 생두로도 와인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커피의 생두에는 당분이 10% 정도 함유돼 있다. 커피 생두의 당도를 측정한 결과 커피열매 껍질보다 조금 높은 26브릭스로 측정됐다. 커피열매 껍질로 와인을 만들 때와 마찬가지로 생두를 발효시켰더니 알코올 도수 11%인 와인이 탄생했다. 이 기술은 국내 기술 특허 뿐 아니라 국제 특허도 받았다. 커피 생두로 와인을 제조한 것은 필자가 세계에서 처음이다.
이번에는 커피를 이용해 어떤 새로운 목표에 도전해볼까. 커피나무가 결코 자라지 않을 것 같았던 제주도에서 커피나무를 키워 열매를 맺고 음료를 만들고 와인과 코냑을 탄생시켰듯 앞으로도 필자의 도전은 끝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