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주
2018년은 국제단위계의 7개 기본단위 중 4개가 다시 태어나는 중요한 해입니다. 올해 11월 개최되는 국제도량형총회(CGPM)에서 이들 4개 상수가 더욱 정확하고 엄밀한 숫자로 정의되기 때문입니다. 과학동아는 독자들에게 이 의미가 잘 전달될 수 있도록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과 공동으로 단위의 탄생과 변천사, 한국 과학자들의 연구 노력을 7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킬로그램은 ‘kg 원기’ 라는 인공물의 질량으로 정의돼 왔다. kg 원기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889년이다.
사람들은 ‘4 ℃에서 1 L인 물의 질량’ 을 1 kg이라고 정의하고 1889년 백금 90%와 이리듐 10%의 합금으로 원통형 1 kg 원기를 제작했다. 이것을 형제인 6개의 복사본과 함께 프랑스 국제도량형국(BIPM) 지하의 비밀 금고에 소중히 보관해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1950년, 1992년, 2014년 kg 원기를 금고에서 꺼낼 때마다 원기의 질량이 미세하게 달랐던 것이다. 원기를 기준으로 교정한 전 세계 100개가 넘는 복제본 원기들의 질량에도 덩달아 오차가 생겼다.
과학자들은 이를 결코 변하지 않는 상수로 극복하고자 한다. 광자의 에너지를 광자의 주파수로 나눈 ‘플랑크 상수’ 로 kg을 재정의하는 것이다. 큰 이변이 없다면 올해 11월 kg 원기는 130년간 차지했던 왕좌를 플랑크 상수에게 물려주게 된다.
쌀, 보리 등 곡물을 저울에 올리다
수천 년 전부터 사람들은 물건의 무게를 쟀다. 특히 농업이 시작되고, 공동체에 여유가 생겨 귀금속의 가치를 매기고, 의술이 발전해 약품을 취급하기 시작 하면서 저울의 중요성이 커졌다.
저울에 올려놓는 질량의 기준은 주로 곡물이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보리 낱알 200개를 1 베카(Beqa)로 정의했다. 지금의 단위로는 약 13 g에 해당한다. 이집트 사람들은 이것을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채취한 사금의 무게를 재는 데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가 하면 로마시대에는 캐럽나무 열매의 씨앗이 기준이 됐다. 질량이 0.2 g가량인 캐럽나무 씨앗 1728개의 질량이 당시 1 로마파운드였고, 이것의 12분의 1인 캐럽나무 씨앗 144개의 질량을 1 로마온스라고 했다. 캐럽나무 씨앗은 작고 가벼운 물체를 재는 데 용이했다. 덕분에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의 질량을 표시하는 보조계량단위인 ‘캐럿’이 캐럽나무 씨앗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곡물을 저울에 사용한 건 동양의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에서 보리 7000알의 무게를 1 파운드로 정의한 것처럼, 쌀을 주식으로 재배하는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는 쌀 한 가마니를 기준으로 질량을 쟀다. 낱알들이 작고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수를 합쳐 그것의 평균을 단위로 삼았다.
백금에 이리듐 섞어 원기를 만들다
킬로그램(kg)이 탄생한 것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직후였다. 당시 프랑스에는 800개의 이름을 가진 25만 개나 되는 도량형 단위가 사용되고 있었다. 복잡한 도량형 제도는 물건을 사고파는 데 큰 걸림돌이었다. 봉건주의 사회에서 농민들에게 수확량의 일정량을 소작료로 걷는 과정에서도 ‘기준’을 둘러싼 잡음이 많았다.
결국 루이 16세는 프랑스과학아카데미에 새로운 도량형 체제를 만들 것을 명했다. 이미 관습으로 뿌리를 내린 도량형 제도를 완전히 새롭게 바꾸는 일은 또 하나의 혁명이었다. 우리에게 ‘질량 보존의 법칙’으로 잘 알려진 과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가 프랑스과학아카데미의 재무장관으로 임명돼 킬로그램 표준연구에 참여했다. 프랑스과학아카데미가 지정한 도량형 위원회는 1793년 질량의 단위를 ‘그레이브(grave)’라고 명명하고 황동으로 그레이브 원기를 제작했다.
질량의 단위는 그 후에도 조금씩 바뀌었다. 1795년 ‘그램(gram)’이 됐다가 1799년 킬로그램(kg)이 기본단위가 됐다. 사람들은 황동 대신 백금으로 kg 원기를 제작했다. 백금은 반응성이 낮아 공기나 이물질에 노출돼도 부피나 무게 등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875년 미터협약을 체결한 이후에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1878년 경 백금 90%, 이리듐 10%를 섞은 합금으로 강도를 높인 새로운 원기를 만들었다. 이 원기는 1889년 제1회 국제도량형총회(CGPM)에서 공식적인 국제 표준으로 승인돼 오늘날까지 프랑스 국제도량형국에 보관돼 있다. 또 원기와 동일한 복사본 100여 개가 각국의 국가표준기관에서 질량의 표준을 지키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 복사본 원기가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 보관돼 있다.
한국은 언제부터 킬로그램 썼을까
우리나라에 원기의 복사본이 처음 들어온 건 고종 즉위 시절인 1894년이다. 그 전까지는 전통 도량형이 널리 쓰였다. 전통 도량형의 기록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보면 ‘근(斤)’등의 단위가 기록돼 있고 추와 추를 제작하기 위한 거푸집 등이 출토됐다.
이런 도량형 제도는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며 꾸준히 정비됐다. 세금을 수취하고 물건을 사고파는 데 도량형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저울을 제작하는 것은 높은 기술력을 요하기 때문에 관청 같은 국가기관에서 직접 제작하고 관리했다. 한 예로 세종은 1422년 공조참판 이천에게 당시에 사용되던 저울을 개조하게 해, 1500개를 서울과 지방에 반포하고 백성들이 자유롭게 구입하게 했다.
전통 도량형 토대는 구한말까지 유지되다가 서구의 미터법 체계에 맞춰 재정의됐다. 1902년(고종 39년)정식으로 도량형기의 제조 검정기관인 ‘평식원’이 설치됐고, 서구의 도량형제를 도입한 ‘대한제국 도량형규칙’이 제정됐다. 이 규칙은 1905년 ‘대한제국 법률 제 1호’로 제정됐다. 1909년(한일합병으로 일본에게 국권을 침탈당하기 한 해 전) 도량형법을 개정하고 돌연 일본식 도량형제를 도입하면서 일본식 질량 단위인 ‘돈’도 혼용되기 시작했다.
한편 1894년에 도입된 원기(39번)는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으로 옮겨지면서(일본이 패망 직전 귀금속 조달을 위해 가져갔다는 설이 있다), 또 한국전쟁 때 방치되는 과정에서 흠집이 생기는 등 상태가 나빠져 질량 불안정성이 커졌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은 1993년 새로운 원기(72번)를 도입해 주 원기로 사용하고 2003년에 84번, 2017년에 111번 원기를 연구용으로 추가 도입해 현재 4개의 원기를 보유하고 있다.
[Interview]_이광철
“국내 질량 척도의 정밀도 높일 것”
현재까지 측정된 가장 정확한 플랑크 상수는 6.626070150(69)×10-34kgm2s-1이다. 올해 11월 플랑크 상수를 기반으로 한 단위 재정의가 승인되면 2019년 5월 20일부터는 새로운 질량 단위를 사용하게 된다.
“플랑크 상수 값을 고정해 킬로그램을 정의하면, 각 나라의 표준기관에서 플랑크 상수를 이용해 언제 어디서나 킬로그램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질량 척도의 정밀도를 높이고, 나아가 우리나라가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질량 교정 허브가 되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130년 만에 킬로그램의 정의가 바뀌는 역사적인 시점, 국내 표준 연구자들의 역할을 묻는 질문에 이광철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 역학표준센터 책임연구원은 이 같이 답했다.
전세계 과학자들은 1980년대부터 킬로그램을 정확히 정의하기 위해 플랑크 상수를 측정해왔다. 플랑크 상수를 정확하게 구하는 방법은 XRCD와 키블 저울, 크게 두 가지다. XRCD는 실리콘 개수를 세어 아보가드로 수를 측정하는 방법이다. 아보가드로 수와 플랑크 상수의 곱은 알려져 있기 때
문에 플랑크 상수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키블 저울은 저울 한쪽에 인공물을 달고 다른 한쪽에 자기장 환경에서 코일에 전류를 흘린 뒤, 인공물에 작용하는 기계적인 일률과 전기적인 일률을 비교해 플랑크 상수를 알아내는 방법이다. 캐나다와 미국은 2015년과 2017년 각각 키블 저울을 이용해 플랑크 상수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데 성공했다. 국제도량형위원회(CIPM)는 올해 이 값으로 kg을 재정의하기로 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은 키블 저울 방식으로 플랑크 상수를 구하는 연구를 2012년 시작했다. 1980년대에 연구를 시작한 미국과 유럽, 2005년에 시작한 중국에 비하면 훨씬 늦게 시작했다. 이 책임연구원은 “그럼에도 6년만에 키블 저울 시스템을 완성했다”며 “5년 이내로 안정적인 실험값을 낸 뒤 외국과 실험값을 비교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역학표준센터 연구팀은 키블 저울을 설계할 때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디자인을 적용했다. 저울을 가동할 때 힘이 수직방향 외에 다른 방향으로 분산되지 않도록 피스톤 실린더, 스프링 가이드 등을 추가했다. 기존의 키블 저울을 똑같이 재현하는 ‘지름길’을 두고 새로운 아이디어에 도전한 이유가 뭘까.
이 책임연구원은 “나라마다 키블 저울의 기본 원리는 같지만 세세한 구조에는 차이가 있다”며 “서
로 다른 시스템에서 동일한 값이 나와야 진정한 표준으로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의 키블 저울 기술이 플랑크 상수 값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게 되면 질량 실현은 지금보다 훨씬 간편해 진다. 이 책임연구원은 “원기는 단위가 1 kg이어서 원자 질량이나 1 mg 이하의 질량을 정확하게 재기 어려웠다”며 “새로운 측정 기술이 반도체, 나노기술 등이 발전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 알려드립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은 국제단위계(SI 단위계) 표기 규정, 한글 맞춤법 규정에 따라 수치와 단위 기호 사이를 띄워 쓸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이번 호부터 7회에 걸친 공동기획 기사는 이런 권장 사항을 적용해 작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