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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자의 과속은 무죄!

초고속광물성제어연구단

때는 지금으로부터 150여년 전. 프랑스의 어느 살롱에 모인 귀족들이 옥신각신 다투고 있다.

귀족 1 : 그거 들었스왕? 달리는 말의 네 발굽이 땅에서 동시에 떨어진다고 함스왕.
귀족 2 : 농~. 믿기 어렵스왕. 달리는 말의 네 발굽이 어떻게 땅에서 동시에 떨어지겠스왕? 그렇다면 말이 날기라도 한단 말이스왕?
귀족 3 : 위~. 프랑스 최고의 생리학 교수인 에티엔느 쥘 마레가 그렇게 얘기했스왕. 그가 설마 거짓말했겠스왕?
귀족 2 : 농~. 내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한 믿지 못하겠스왕. 논리적으로 생각해봅스왕. 말의 한 발은 반드시 땅에 붙어 있어야 계속 달릴 수 있지 않겠스왕? 말의 네 발굽이 땅에서 동시에 떨어진 것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 있스왕? 없지 않스왕?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실제로 달리는 말의 네 발굽은 어느 순간 모두 땅에서 떨어진다.

1877년 미국의 사진사 이드웨어드 머이브릿지가 이런 사실을 밝혀냈다. 그는 말이 달리는 길옆에 사진기 12대를 설치하고 줄을 연결해 지나가는 말이 다리로 줄을 치고 지나갈 때마다 셔터가 눌러지도록 했다. 셔터가 열고 닫히는 속도는 25분의 1초. 그러자 불과 몇 초 동안 수십 장의 사진이 찍혔다.

말발굽 진실게임

머이브릿지의 사진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어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가 1821년 발표한 그림 ‘엡슨에서의 경마’에는 말이 두 앞발과 두 뒷발을 동시에 쭉 펴고 달리는 것으로 묘사돼있다. 그런데 머이브릿지의 사진에 따르면 말은 달릴 때 앞다리를 절대 앞으로 뻗지 않았다. 인간의 눈은 생각보다 정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눈으로는 16분의 1초보다 짧은 순간에 벌어지는 일은 인식하지 못한다. 100m 달리기 결승 지점에서 등수를 가려내려면 셔터 속도가 1만분의 1초인 카메라를 사용해야 한다. 총알이 지나가는 순간을 포착하려면 100만분의 1초짜리가 필요하다. 그런데 만약 이보다 더 짧은 순간을 잡고 싶다면 어떻게 할까.

화학반응의 기본이 되는 분자가 대표적인 예다. 분자는 맨눈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엄청난 속도로 움직인다. 보통 기체 상태에서는 시속 수천km로 날아다닌다. 초음속 비행기보다 더 빠르다. 게다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1초에 10조번이나 돌고 떨며 뒤집기를 해댄다. 분자가 한번 회전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100펨토초(1펨토초=${10}^{-15}$초) 정도다.

그래서 분자를 찍으려면 셔터 속도가 아주 빠른 특수 카메라가 필요하다. 수 펨토초 정도의 아주 짧은 시간폭을 가진 레이저 펄스를 내보내는 초고속 레이저 분광기가 그것. 초고속 레이저 분광기는 분자에 레이저 펄스를 보내 분자가 활동을 시작하게 한 뒤, 두 번째 펄스를 바로 뒤이어 보내 이 분자가 흡수하거나 방출, 산란하는 빛을 측정해 분자의 활동을 초고속으로 촬영한다.

1초 동안 찍을 수 있는 필름의 수가 늘어날수록 순간을 더 잘게 쪼개 엿가락처럼 길게 늘여서 볼 수 있듯이 초고속 레이저 분광기의 레이저 펄스가 짧을수록 분자의 운동이나 반응의 진행 과정을 슬로비디오처럼 볼 수 있다.
 

기체 상태에서 시속 수천km로 날아다니는 분자를 찍기 위해서는 수 펨토초 정도의 초고속 레이저가 필요하다.


김 감독의 분자영화를 아시나요

연세대 화학과 김동호 교수는 이런 ‘분자영화’를 찍는 ‘감독’이다. 그가 이끄는 초고속광물성제어연구단은 영화의 ‘스태프’인 셈.

‘인공 광합성 소자’는 연구단의 대표작 중 하나. 광합성은 1000조분의 1초 만에 반응이 끝나버리기 때문에 초고속 레이저 분광기를 촬영기로 쓸 수밖에 없다. 김 교수는 엽록소가 햇빛을 받았을 때 양분을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을 본떠 엽록소와 가장 유사한 구조를 가진 포피린 분자를 이용해 빛에너지가 이동할 수 있는 인공 구조체를 만들었다.

이를 토대로 2004년에는 빛 알갱이 하나로 작동하는 태양전지의 가능성을 제시해 미국 화학회가 발간하는 ‘어카운트 오브 케미컬 리서치’(ACR) 10월호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1997년부터 이들이 찍은 여러 편의 분자영화는 ‘칸’ 같은 세계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셈이다.

김 교수는 “광합성에서는 버리는 에너지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광합성 과정을 잘 분석하면 이를 이용한 고효율 태양전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말이 쉬워 분자 ‘영화’지 아직 세계적으로도 이 분야는 초기 단계다. 그만큼 어렵다. 이 분야의 선구자로 불리는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아메드 즈웨일 교수가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것이 1999년이었다.

단분자인 요오드화나트륨(NaI)이 나트륨(Na)과 요오드(I)로 분해되는 반응 시간을 측정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요오드화나트륨이 분해되는 과정은 아주 간단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온결합상태(Na+와 I-)와 중성원자인 공유결합상태(Na와 I)가 섞여 있어 매우 복잡하다.

김 교수는 국내에서 불모지나 다름없던 이 분야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화학학회지(JACS)에 매년 평균 3~4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최근 3년간 JACS에 발표한 논문은 12편. 이 중 2편은 관련 분야에서 인용횟수가 최상위 1%에 드는 논문으로 선정됐다. 지금까지 연구단에서 발표한 논문만 모아도 150여편에 달한다. 이들 논문이 인용된 횟수를 더하면 무려 3150회다.
 

초고속 현상을 보는 방법


원하는 반응만 골라서

하지만 아직 김 교수는 성에 차지 않는다. 지금까지 분자가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 봤다면 이제는 그 움직임을 조절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연구 자체가 단분자 수준으로 한층 심화돼야 한다.

최근 미국 시카고대 라이스 교수와 프린스턴대 래비츠 교수 등은 분자의 운동 정보를 광펄스에 입력하고 이를 되먹여 분자의 운동과 반응을 능동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다. 이론적이기는 하지만 일부 분자에서는 실험으로도 가능하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김 교수는 “이를 이용하면 두 가지 반응 경로가 있는 화학반응에서 특정한 생성물만 선택적으로 고를 수 있다”고 밝혔다. 대부분의 화학반응에서는 한 가지 이상 생성물이 생기기 마련이다. 화학반응을 제어할 수 있게 되면 원하는 생성물이 생기는 반응만 일어나도록 유도할 수도 있다.

스피드 즐기는 화학계의 레이서

따르릉.
“감사합니다. 네, 고맙습니다.”
따르릉, 따르릉.
“철은 익사이티드 라이프 스팬(excited life span)이 짧으니까… 마그네슘이 들어가는 이유가… 철은 2가, 3가가 있는데… 산화가 일어나지 못하고 불안정해집니다.”
그와 마주앉아 있는 2시간 동안 전화통에 불이 났다. 그가 전날 ‘제 10회 한국과학상’ 시상식에서 화학분야 상을 받은 것을 축하하는 전화와 연구 자문을 구하는 전화가 앗달아 울렸다. “수상턱을 톡톡히 치른다”며 손을 내저으면서도 한 통화 한 통화를 꼼꼼히 챙기는 모습에서 순간을 다루는 과학자 특유의 세심함이 엿보였다.

1992년 김 교수가 풀러렌(${C}_{60}$)의 전자구조를 처음 밝혀낸 것은 초고속 현상 연구의 신호탄이었다. 풀러렌은 탄소 60개가 축구공 모양으로 둥글게 결합한 분자로 그 구조와 성질은 당시 화학계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김 교수는 풀러렌 분자가 레이저를 흡수해 들뜬 상태가 된 뒤 1.2나노초 만에 에너지를 방출하고 다시 원래의 바닥상태로 돌아가면서 빛을 낸다는 사실을 밝혔다.

1995년부터 김 교수는 ‘스피드’를 높였다. 나노에서 피코, 펨토까지 수년 새 시간을 100만배나 단축했다. 1997년 창의연구단을 시작할 때는 과학자들에게도 생소했던 펨토초 연구를 이제는 꽤 ‘대중적’으로 만들었다.

김 교수는 “이 분야가 결코 대중적인 분야는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논문이 인용되고, 학회에 초청되면서 외국 학자들 사이에 내 이름이 회자되는 것이 기쁨이고 보람”이라고 말했다.

그간의 노력 때문일까. 최근 경사가 겹쳤다. 지난해 12월에는 교육인적자원부가 지원하는 ‘스타 패컬티’(Star Faculty)에 선정돼 앞으로 10년 동안 연구비를 지원받게 됐다. 스타 패컬티가 되려면 10년 이상의 연구 경력에 논문이 1000회 이상 인용돼야 하는 등 조건이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연구단의 핵심 기술과 노하우를 토대로 개발한 분광광도계, 색차계, 형광계 등 첨단 계측기기는 동남아시아와 중동 등지에서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

김 교수는 최근 과학계 사태와 관련해 “과학은 나무에서 뿌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라며 “인기에 관계없이 해야 할 연구를 묵묵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식물의 광합성은 에너지 효율이 100%에 가깝다. 김동호 교수는 엽록소와 유사한 인공 광합성 소자를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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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이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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