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노벨화학상은 ‘분자기계(molecular mechanics)’에 돌아갔다. 머리카락 굵기의 1000분의 1 크기의 화학 구조물인 분자기계는 빛이나 열과 같은 외부 자극에 반응해 기계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새로운 개념으로 큰 관심을 모았지만, 아직까지 기술에 직접적으로 적용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2017년 7월 ‘사이언스’에 분자기계에 대한 논문이 실렸다. 분자기계를 이용해 배터리의 저장용량을 최대 50%까지 높였다는 것이다. 논문의 교신 저자는 노벨상 수상자 중 한 명인 프레이저 스토더트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수의 제자인 최장욱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였다.
합금반응 선택했더니 에너지밀도 50% up⇧
최 교수는 박사과정에서부터 꾸준히 배터리를 연구해왔다. 그의 관심은 여느 배터리 연구자들처럼 배터리 효율을 올릴 수 있도록 에너지 밀도를 높이는 방법에 집중됐다. 하지만 최 교수는 기존 배터리에서 사용하는 화학반응 대신 다른 연구자들이 쉽사리 도전하지 않는 화학반응을 연구했다.
시중에 판매되는 리튬이온 배터리는 리튬이온이 전극의 빈 공간에 삽입됐다가 빠져나가기(탈리·脫離)를 반복하면서 충전되는 ‘ 삽입·탈리반응’ 을 이용한다. 이 반응은 전극의 구조가 변하지 않아 안정적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그 구조가 차지하는 공간을 리튬이 활용할 수 없어 저장 용량이 작다는 단점이 있다.
최근 10년간 이 방법을 활용한 리튬이온 배터리의 에너지 밀도는 20% 가량 향상됐다. 최 교수는 “이만큼 올리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라며 “기존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가 선택한 방식은 리튬이 최대한 많이 들어갈 수 있는 ‘합금반응’이다. 실리콘 원자로 구성된 음극을 만들면 리튬이온은 실리콘과 실리콘 사이의 결합을 끊고 실리콘과 리튬 결합을 새롭게 만든다. 이 반응을 이용하면 삽입·탈리반응의 배터리보다 최대 50% 가까이 에너지 밀도를 높일 수 있다.
문제는 합금반응을 이용하면 리튬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는 점이다. 받아들일 수 있는 양보다 더 많은 양의 리튬이 들어와 음극의 부피가 3배 가까이 늘어난다. 6평짜리 집에 20~30명의 사람이 들어간 것과 비슷한 셈이다. 이로 인해 전극 소재가 갈라져 내구성이 떨어지고, 시간이 지나면서 화학반응에도 문제가 생긴다. 그만큼 배터리의 수명이 줄어든다. 에너지 밀도를 높이자니 배터리 수명이 줄어든 것이 다.
분자기계 적용해 수명 50배 늘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 교수는 분자기계를 떠올렸다. 스토더트 교수는 1991년 ‘로탁세인(Rotaxane)’이라는 분자기계를 개발했다. 중앙에 세 개의 둥근 분자가 붙어있고, 이 분자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형태다(아래 그림). 때문에 로탁세인은 ‘분자 엘리베이터’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최 교수는 로탁세인을 움직도르래로 이용했다. 배터리의 음극이 팽창하면서 발생하는 장력을 로탁세인의 둥근 분자가 움직도르래처럼 위아래로 움직이며 힘을 분산시킨다. 최 교수는 “로탁세인을 사용하지 않았을 때보다 최대 50배 가까이 배터리 수명이 늘었다”고 말했다.
최 교수가 처음부터 분자기계를 쓴 건 아니었다. 시작은 실리콘의 분자 구조를 이용해 장력을 분산시키는 연구였다. 결과도 좋았다. 그 연구로 2015년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에도 뽑혔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기존 방식을 버리고 배터리에 분자기계를 적용하겠다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했을까. 최 교수는 다른 분야에서 부피 팽창을 어떻게 제어했는지 연구 결과를 조사했다. 그 중 탄성이 매우 큰 하이드로겔을 개발한 연구팀이 분자기계를 이용해 부피 변화에서 오는 충격을 줄인 점이 눈에 띄었다.
이 연구에서 영감을 받은 최 교수는 로탁세인을 음극 소재에 적용했다. 최 교수는 “연구를 하다 보
면 자신의 분야에만 갇혀 다른 분야를 보기 어려울 때가 있다”며 “항상 다른 사람은 어떤 연구를 하는지 관심을 갖는 자세가 내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