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녹아서 흘러내리는 듯한 시계다. 마치 시간이 녹아버린 것 같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이 작품의 제목은 ‘The Persistence of Memory’, 우리말로 풀이하면 ‘기억의 집요함’이다.

 

달리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심취했었다. 인간의 의식보다는 잠재의식이 표출해내는 꿈과 환상에서 작품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특히 녹아내리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을 통해 기억의 지속성을 표현한 이 작품은 기억으로 인해 현실을 왜곡하는 현상을 표현한 것처럼 느껴진다.

 

 

‘마음속의 아이’는 가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어린 시절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오랜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뒤에도 마치 바로 지금 일어난 일처럼 떠올리는 현상을 ‘마음속의 아이(Inner Child)’라고 부른다. 7월호에서 필자가 설명했던 ‘마음의 사진’이다. 과거 기억을 떠올리면 그때 겪었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라 당시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지만, 사실 기억으로 저장된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사진일 뿐이다.

 

인생에서 다시는 겪기 힘들 만큼 무섭고 고통스러운, 목숨의 위협을 느낄 만큼 강렬한 사건이나 사고를 겪은 뒤에는 심리적인 외상이 생긴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일명 ‘트라우마’다. 큰 사고를 당하고 나면 트라우마가 생기고, 비슷한 상황에 처하거나 유사한 이미지만 봐도 당시의 기억과 감정이 되살아난다.

 

트라우마는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다. 늘 불안하고 초조하고 쫓기는 기분으로 사소한 일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대인관계도 어려워지고 일상생활 자체가 힘들어진다.

 

신경과학자들은 기억과 트라우마의 관계를 통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법을 연구해왔다. 최근에는 세포와 분자 수준에서 트라우마가 생기는 메커니즘을 연구해, 생리학적으로 이를 극복하는 방법이 발표됐다(doi:10.1038/nrn3339). 지난 30년 동안 트라우마에 대한 연구 논문은 수천 편이 쏟아져 나왔지만,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구체적인 원인과 치료방법은 찾지 못하고 있다.

 

 

현실과 허상 구분만 해도 트라우마 없어져


그렇다면 트라우마를 ‘마음’으로 치유하는 방법은 어떨까. 2012년 미국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UC샌디에이고) 헬스케어시스템 연구팀은 명상을 이용해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방법을 소개했다(doi:10.1177/ 0145445512441200). 연구팀에 따르면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이 명상을 하면 불안이나 사회 부적응 같은 증상이 줄어들고 삶의 질이 향상된다. 연구팀은 명상이 트라우마 완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구체적인 과정을 알아내기 위해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최근 국내에서도 소방관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 명상을 도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경기소방학교에서는 2013년부터 소방관이 트라우마를 겪지 않고 정신 건강을 챙길 수 있도록 ‘마음빼기 명상’을 도입했다.

 

명상으로 트라우마를 어느 정도 이겨낼 수 있는 이유는, 자기 마음을 반복적으로 돌아보면서 끔찍한 기억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라는 점을 서서히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실제와 허상을 구분하는 일만으로도 마음과 정신이 치유된다.

 

더 나아가 명상을 통해 사건 사고를 겪기 전보다 정신이 훨씬 건강하고 단단해질 수 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공포라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사건을 보는 관점이나 대처 방법에서 변화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도 한때 폐쇄공포증을 앓아 한동안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하지만 명상을 하면서 그런 공포심이 어렸을 때 겪었던 하나의 경험이 원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음속의 아이’를 차차 지움으로써 폐쇄공포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트라우마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명상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 명상으로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는 과학적인 원리가 밝혀지기를 기대해 본다.

 

 

이덕주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미국항공우주국(NASA)을 거쳐 KAIST 항공우주공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현재 미국 헬리콥터학회 부회 장, 한국 드론산업진흥협회 부회장이며 아시아·호주 헬리콥터 포럼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지금이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인성본성탐구 및 인성본 성회복’ 등 인성교육 강좌를 KAIST에서 열었고, 작년부터 전인교육학회 회 장, 미래 교육 소사이어티 창립멤버로 활동 중이다. djlee@kaist.edu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17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이덕주 KAIST 항공우주공학과 교수
  • 기타

    [일러스트] 정은우
  • 에디터

    이정아

🎓️ 진로 추천

  • 심리학
  • 미술·디자인
  • 교육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