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컴퓨터 제조업체 IBM에서 개발한 AI인 ‘왓슨’은 2011년 한 퀴즈쇼에서 사람을 상대로 우승해 유명세를 탄 뒤 최근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 중 최근 ‘닥터 왓슨’이 가장 ‘핫’하다.
지난해 12월 가천대 길병원은 국내 최초로 왓슨을 처음 도입했고, 현재 총 6개 병원에 왓슨이 들어왔다. 9개월 동안 ‘닥터 왓슨’은 뭘 하고 지냈는지 직접 만나봤다.
하얀 가운을 걸치고 얼굴에서 파란 빛을 깜박이며 기계음으로 ‘하이(Hi)’ 하고 인사해 주겠지. 닥터 왓슨에 대한 기대를 가득 안고 왓슨이 있다는 ‘왓슨 다학제 진료실’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곳에는 여러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테이블과 그 앞에 걸린 커다란 모니터 3개가 전부였다. 김영보 가천대 길병원 신경외과 교수는 “왓슨의 본체는 미국 IBM 본사에 있다”며 “모든 절차는 클라우드 컴퓨팅 기술을 통해 진행된다”고 설명했다.
길병원이 스카우트한 왓슨은 암 진료 도우미 역할을 하고 있다. 사람으로 따지면 전공의 수준이다. 지난해 12월 5일 첫 환자 진료에 투입됐다. 대장암 3기 진단을 받고 복강경 수술을 한 60대 남성 조 모씨였다. 이 환자에게 향후 어떤 항암치료를 진행하면 좋을까. 왓슨은 ‘폴폭스’와 ‘케이폭스’를 이용한 약물 치료요법을 추천했다. 길병원 의료진의 판단과 동일했다.
8개 암 치료법 제시하는 ‘AI 전공의’
왓슨은 8월 7일 현재 암 환자 414명을 진단하는 데 사용됐다. 매달 평균 50명씩 환자를 본 셈이다. 김 교수는 “내과, 핵의학과, 영상의학과, 방사선과, 혈액종양내과 등 여러 분야 전문의가 한 자리에 모이는 ‘다학제 진료’가 원칙”이라며 “왓슨이 제시한 치료법을 토대로 전문의들의 협의를 거쳐 치료법을 최종 결정하는 만큼 환자 한명 당 20분 이상 걸린다”고 말했다.
환자들 입장에서는 AI가 정확한 진단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는 한편 각 분야 전문의가 병을 자세히 설명해주고 추후 치료법까지 제시하는 만큼 심리적으로 한결 안심이 된다. 김 교수는 “왓슨은 아직 완벽한 의사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최종 치료법은 전문의 교수들이 결정하는 만큼 현재로서는 능력이 뛰어난 전공의 실력 정도 된다”고 설명했다.
‘닥터 왓슨’의 능력은 매일 최고치를 경신하며 진화하고 있다. 진료에 투입되는 횟수가 늘수록 임상 데이터가 쌓이고 그 덕분에 정확도는 증가한다. 왓슨의 능력을 좌표로 나타내자면 x축으로는 암의 종류가, y축으로는 치료방법이 매일 늘고 있는 셈이다.
왓슨의 진화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서 현재 길병원에 있는 왓슨은 유방암, 폐암, 위암, 자궁경부암, 난소암, 전립선암, 결장암, 직장암 등 8개 암을 진단하는 데 쓰이고 있다. 조만간 혈액암(백혈병)과 간암 진단에도 활용될 전망이다.
인간 의사 진단법과 80% 일치
전 세계에서 왓슨을 사용하고 있는 병원은 모두 똑같은 소프트웨어를 사용한다. 환자에 대한 데이터가 표준화돼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빅데이터를 활용한 연구가 용이하다. 가령 최근에는 왓슨이 병원 현장에 투입된 지 얼마 안 된 만큼 왓슨이 어떤 치료법을 제시했는지, 의사가 진단한 방법과는 얼마나 일치하는지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올해 5월 이광범 가천대 길병원 산부인과 교수팀은 2006~2016년 자궁경부암 수술을 받은 환자 496명의 데이터를 이용해, 왓슨이 제시한 치료법과 실제 치료법이 얼마나 일치하는지 조사했다. 그 결과 왓슨이 잘 알지 못하는 치료법을 받은 환자를 제외한 나머지 370명 중 80.8%가 일치했다(doi:10.3802/jgo.2017.28.e67).
김 교수는 “앞으로 왓슨을 활용 중인 해외 연구기관 전문가들과 공동연구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장 기대되는 분야는 어떤 요인과 특정 질환 사이의 연관관계를 밝히는 ‘코호트 연구’다. 왓슨이 가진 수많은 환자의 빅데이터(건강 상태, 음주, 흡연 등 생활습관)를 이용해 특정 질환이 발병하는 원인을 추적 조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지역별 또는 인종별로 많이 발생하는 암 연구도 가능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위암 환자가 가장 많다. 전문가들은 그 이유로 맵고 짠 음식을 자주 먹는 문화 때문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 등 서양에서는 위암 환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위암 치료에 있어서는 국내 기술이 가장 뛰어나다.
김 교수는 “위암 치료 노하우를 왓슨을 통해 간접적으로 공유할 수 있다”며 “국내에서 치료하기 어려웠던 환자의 경우에도 해외 사례를 통해 적합한 치료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왓슨이 갖고 있는 데이터가 대부분 서양 사례인 만큼 한국인에게 적합한 ‘한국형 AI 의사’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국내 환자의 데이터가 미국 업체의 AI에 축적되는 일을 꺼리는 전문가들도 있다. 국내 일부 병원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환자치료 데이터를 이용해 자체적으로 AI를 개발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데이터 주권’을 지키기 위해 자체 AI를 개발하는 일이 마냥 장밋빛만은 아니다. 인간 의사보다 AI 왓슨이 뛰어난 점은 머리로 기억할 수 없는 방대한 양의 의학적 자료와 확률 데이터를 저장한다는 점이다. 즉 왓슨의 가장 뛰어난 능력은 전 세계 의학 지식을 담고 있는 고급 저널들을 포함한 빅데이터다.
게다가 왓슨은 지금 이 시간에도 처음에 저장한 데이터 외에 새로운 사례를 지속적으로 학습하며 경험을 쌓고 있다. 세계 각지에 있는 병원에서 새로운 정보가 들어와 그만큼 빠른 속도로 다양하게 학습하는 것이다. 때문에 국내에서 자체적으로 의료용 AI를 개발하더라도 각 병원이 갖고 있는 데이터만으로는 왓슨만큼 정확하고 정밀하게 치료법을 제시하기 어렵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유전정보 모으는 왓슨도 활동 중
전문가들은 왓슨 사이의 협업도 꿈꾸고 있다. 암진단에 활용하는 ‘왓슨 포 온콜로지(Watson for Oncology)’가 유전체학 전문인 ‘왓슨 포 지노믹스(Watson for Genomics)’와 협업하는 것이다. 양쪽의 데이터를 합칠 경우 시너지는 엄청날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 1월 부산대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두 왓슨을 모두 도입했다.
아직까지 ‘왓슨 포 지노믹스’에 입력된 유전정보 데이터는 수십만 명 수준이다. 하지만 수백만 명 이상으로 데이터가 폭발적으로 늘 경우 얘기가 달라진다. 지금은 왓슨이 의학 교과서나 저널에 실린 결과를 토대로 치료법을 제시하고 있지만, 유전정보 데이터가 늘어날수록 암 유전자의 유무, 발현 빈도 등 유전정보를 따질 수 있다.
김 교수는 “데이터를 많이 모으는 일도 중요하지만 빅데이터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가 더 중요하다”며 “사람의 뇌가 여러 기억을 모아 통합적인 예측을 하듯, AI도 데이터를 이용해 병의 발생이나 예후를 현재보다 정확하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AI가 현대의학도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하는 난치병에서 인류를 구할 수 있는 날이 올지 기대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