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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과학·공학·의학 발달의 일등공신 ‘히든 피겨스’

영화 ‘히든 피겨스’의 중심인물은 미국항공우주국(NASA) 랭리연구소에서 ‘컴퓨터’로 일했던 캐서린 존슨(타라지 P. 헨슨 분), 메리 잭슨(자넬 모네 분), 도로시 본(옥타비아 스펜서 분)입니다. 당시 컴퓨터란 계산을 담당하는 직책을 뜻했습니다. 대부분 여성으로 구성돼 있던 ‘휴먼 컴퓨터’들이 뒷받침한 덕분에, NASA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었죠.

영화는 아주 감동적인 한편, 아픕니다. (스포일러 주의) 천재성을 인정 받아 백인 남성 과학자들만 가득한 연구실에 입성했으면서도 일부 건물에만 있는 유색인 전용 화장실에 가기 위해 하이힐을 신은 채(당시 여성 직원 복장 규정) 뛰어다니는 캐서린의 모습에, 뭇 여성들은 깊이 감정이입을 할 겁니다. 은밀해졌을 뿐, 비슷한 차별이 현재도 존재하니까요. 판사를 설득해 백인남성만 다닐 수 있었던 학교에서 수업을 듣기까지 한 메리가, NASA의 유리천장을 확인하곤 1979년 엔지니어를 그만두고 여성 엔지니어 양성에 매진했다는 후일담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사회적 약자가 스스로의 두려움이나 나약함 때문에 유리천장을 부수지 못한 게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온갖 차별 딛고 우주 개발에 공헌한 삼총사
3월 23일 개봉 예정인 ‘히든 피겨스’는 1960년대 미국과 러시아의 우주 개발 경쟁에서 미국의 승리를 이끌었던 NASA 프로젝트의 숨겨진 천재 세 명의 실화를 다룬 영화다. 특출한 재능을 가진 수학자였던 캐서린 존슨은 머큐리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하고, 메리 잭슨은 엔지니어로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 도로시 본은 유색인 계산 부서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책임자로 승진한다. 감동적인 성공 스토리이지만, 영화는 상당 분량을 이들이 겪는 차별을 그리는 데 할애한다. 주인공들이 피부색과 성별을 이유로 온갖 차별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유색인 전용(colored) 화장실만 갈 수 있었고, 도서관에서도 일부 구역은 들어갈 수 없었다. 차별로 좌절한 모든 이에게 용기를 주는 한편, 누군가를 차별하고 있을지도 모를 ‘나’에게 경종을 울리는 영화다. 마지막으로, 기자가 꼽은 최고의 명대사는 메리 잭슨의 “그럴 필요도 없죠. 벌써 됐을 테니까”이다. “네가 백인 남자였으면 엔지니어를 꿈꿨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해방 후 한국 경공업 떠받친 여공의 삶
한국에도 히든 피겨스가 있습니다. 다만 한국의 과학과 공학은 최근 20여 년 사이에야 크게 발전했기 때문에, 영화에서처럼 천재성을 발휘한 개인이 등장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사회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여한 직업군이 있었죠.
 
우리는 흔히 해방 이후 박정희 시대, 과학기술을 일으킨 역군으로 고등교육을 마친 남성 과학자와 엔지니어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이들은 당시 과학기술인력의 극히 일부였습니다. 1962년 국가분류체계는 약 30만 명의 기술인력을 교육 수준과 경력에 따라 기술자, 기술공, 기능공 등으로 나눴는데, 교육 수준이 가장 높았던 기술자는 3%에 불과했습니다. 기술공은 약 4%였고, 기능공이 나머지 93%였죠. 그리고 이들 기능공의 가장 낮은 위치에, 일명 ‘시다’라고 불린 여성 기능공(여공)이 있었습니다. 한경희 연세대 공학교육혁신센터 교수와 게리 리 다우니 미국 버지니아공대 과학기술학과 교수가 쓴 ‘근현대사 속 한국 엔지니어들의 변천사’에는 해방 후 한국의 경공업을 이끈 여공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수출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슬로건은 박정희 정권이 수출을 늘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기업이 수출 가능한 상품을 개발하도록 정부는 다양한 금융 정책을 제시했죠. 그러나 실제로 경쟁 우위를 달성하는 데 가장 유효했던 정책은, 교육 수준이 낮은 저임금 여성 인력을 활용하는 것이었습니다. 1965년까지 약 26만 명의 여성이 노동 시장에 진입했습니다. 이들 중 14%는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고, 64%는 초등학교만, 8%는 중학교만 마쳤습니다. 15% 정도만이 고등학교 졸업자였죠.

당시 농촌 여성은 대부분 일찍 결혼했기 때문에, 박정희 정부는 이들을 경공업 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상당히 노력했습니다. 여성 노동자를 남성과 마찬가지로 ‘산업의 역군’으로 부르며 희생과 인내를 강조했고, ‘착한 딸들을 국가 발전을 위해 보내’도록 가족을 격려했죠. 김현미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가 쓴 논문 ‘한국의 근대성과 여성의 노동권’(한국여성학 제16권 1호)에 따르면, 1970년대 중반까지도 여성 중심의 제조업이 여전히 총 수출액의 70%를 차지했습니다. 1978년 이들의 수는 109만 명에 다다르게 됐죠. 여공들이 없었다면, 경쟁력 있는 경공업도 없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 가운데 가장 지위가 낮았던 이들은 ‘공순이’라는 호칭으로 비하 당하거나 차별을 받을 때가 많았습니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역사가 아닙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군수무기를 만드는 데 엄청난 수의 여성인력을 동원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We Can Do It)!”라고 적힌, 한 여성이 팔 근육을 내보이는 선전 포스터가 대변하죠. 중국의 페미니스트 카이 이핑은 2월 8일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1980년대이후 중국 정부는)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다며 여성을 ‘하늘의 절반’이라고 불렀다”며 ”그러나 이는 여성을 위한 거라기보다 여성을 노동시장에 끌어들이기 위한 정책에 불과했다”고 말했습니다.

경공업 발달에 기여한 특출한 여공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자료를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마 사료를 남길 형편이 안됐을 겁니다. 교육 수준이 낮은데다 노동 환경 자체가 너무나 열악했기 때문에 사실상 기술개발에 참여할 길이 없었을 수도 있죠. 한경희 교수는 “한국 여성이 과학과 기술에 미친 영향은 사료도 거의 없고 연구하려는 사람도 적다”며 “특정 인물의 공로를 찾기는 더욱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1960~1970년대 여성 기능공은 ‘공순이’라고 비하 당했지만,
경공업 발달의 진정한 일등공신이었다.
1970년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분신자살을 계기로 이들의
열악한 환경과 낮은 임금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회복실 만들고 간호행정 체계화한 간호사 박명자
한국 의학이 발달한 데에도 숨은 공로자가 있습니다. 근대 초기 의료 일선에서 서양의학을 실천한 간호사들이죠. 흔히 간호사를 의사의 보조자, 또는 환자의 간병인으로 보는 몹시 잘못된 시각이 있지만, 엄연히 전문의료인력입니다.

역사 속 여러 간호사 중에서도 기자의 눈을 단박에 끈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1991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기장(국제적십자위원회가 주는 전세계 최고 영예 상)을 수상한 박명자입니다(이꽃메, ‘나이팅게일 기장 수상자 박명자의 창조적이고 개척적인 간호업적 고찰’, 한국간호교육학회지 2015.8). 그는 1949년 서울대 의대 부속 고등간호학교에 입학했고, 6.25가 발발하자 육군 소위로 군 병원에서 근무했습니다. 당시 간호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박명자는 간호실무와 간호관리자 역할을 모두 해야 했죠. 전쟁 당시 군 병원들은 이미 새로운 의료기술을 소화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이 때 많은 지식을 습득한 것으로 보입니다.

1956년 육군 중위로 전역하고 서울대 의대 부속병원 수술장에서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서울대병원은 환자 가족이 입던 옷과 신발 그대로 들어와 수술을 참관할 정도로 무균술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어요. 이에 박명자는 무균술을 준수하고, 수술 후 회복실을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병원이 예산 부족을 이유로 난색을 표하자 그는 사비를 털어 참관인용 신발을 사다 놓고 수술실 옆 창고를 청소해 회복실을 꾸렸습니다. 전국 각지의 병원이 요청할 때마다 수술장과 회복실 설치를 도왔고요.

특히 군 병원에서 배운 최신 마취술을 간호학생과 의과대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1966년에는 수술과 마취에 관한 단행본을 펴냈죠. 수술 및 마취 분야의 독보적인 우리말 교재로 이후 20년 간 큰 영향을 줬습니다. 그의 삶을 연구한 이꽃메 상지대 간호학과 교수는 논문에서 “마취의사가 거의 없던 시기에 박명자, 간호장교로 교육받아 초기 마취간호사로 활동했던 이종선 등 간호사가 기여한 역할이 매우 컸다”고 평가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9년간 간호학생을 가르치다가 1966년 서울대병원 수술장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당시 병원에 중환자는 느는 반면 정부 제한으로 간호사 정원이 묶여 간호사들이 12시간 맞교대 근무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업무 효율은 떨어지고 환자와 의료진 모두 불만이 컸죠. 이에 동료 간호사와 함께 간호사 업무를 모두 나열하고 소요시간을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정부 관계자에게 설명해 간호인력 충원이라는 결실을 얻어냈죠. 이 때 간호사 3교대 제도와, 근무별·특수파트별 간호감독 제도가 시작됐습니다. 그는 간호조무사의 업무도 이렇게 분석해 논문으로 발표했습니다. 간호행정 논문이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발표되기 시작한 걸 고려하면, 박명자는 이 분야의 선구자인 셈이죠.

1903년 한국 최초로 정규 간호 교육을 시작한 보구여관.
선교사 마가렛 에드먼드(가운데)가 주도했다.​

 
그 외에도 많은 간호사가 한국의 의료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이금전은 지역사회간호사업의 선구자로 꼽힙니다(이꽃메, ‘한국지역사회간호의 선구자 이금전에 관한 역사적 고찰’, 지역사회간호학회지 2013.3). 의료에서 소외돼 있던 어머니들을 위한 위생관련 소책자를 발간하는 한편, 1946년엔 ‘조선간호협회’를 설립했고 1967년엔 자신의 지식을 집대성해 ‘보건간호학’을 출판했죠. 간호는 그 나라의 역사, 정치, 경제, 문화 등을 고려해야 하므로 외국 책을 그대로 쓰기가 어려운 분야입니다. 그의 보건간호학은 우리나라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 간호학 책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간호사이자 산파였던 정종명은, 여자고학생상조회, 정우회, 근우회, 신간회 등 쟁쟁한 사회단체를 설립했습니다(이꽃메, ‘일제강점기 산파 정종명의 삶과 대중운동’, 의사학 2012.12). 유명 대중연설가로 전국을 다니며 여성문제에 대한 강연도 했죠.

지금 당신 주변에도 히든 피겨스가 있다
다양한 영역에서 많은 히든 피겨스가 각자의 어려움을 헤치면서 활약했습니다. 예컨대, 서재필에 이어 한국 두 번째 의사이자 여성 최초 의사인 김점동(세례명 박 에스더)을 비롯해 허영숙, 이채희, 장문경 등이 남성의사에게 갈 수 없었던 많은 여성환자들을 치료했습니다(의료정책연구소, ‘우리나라 근·현대여성사에서 여의사의 활동과 사회적 위상’, 2012.9). 그러나 남성과 동일한 교육을 받고도 사회적 편견 때문에 거의 전부가 소아과나 산부인과를 개원할 수밖에 없었고, 여성환자들의 편견이 걸림돌이 되는 예도 적지 않았습니다.

초창기 여성 과학자들은 과학과 공학 교육에 헌신했습니다. 1950년대만 해도 한국에 과학교사가 부족해 대학만 졸업하면 수업을 맡아 달라는 청탁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이후 배출된 여성 과학자들도 연구보다는 대부분 대학에 진출해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죠. 자의도 있었지만, 사회적 편견과 성차별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논문(조아라, 박진희 ‘한국 여성 과학자의 ‘과학자 되기’에서 보이는 특징’, 아시아여성연구 제49권 2호)에 따르면, 1970년대 들어 정부출연연구소들이 늘어나면서 대학 이외에도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경로가 생겨났지만, 연구소의 문호는 여성에게 쉽게 개방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히든 피겨스가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자명하게 그들에게 빚이 있지만, 관심 갖는이는 드뭅니다.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 보세요. 땀과 눈물을 흘리는 히든 피겨스가 있지는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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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우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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