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여성 A씨는 2014년 초 남편에게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로 폭행을 당했다. 다행히 몸은 회복됐지만 장보기조차 힘들어 했고, 우울증상도 보였다. 범죄피해자 지원을 담당하는 검찰은 A씨에게 자기공명영상(MRI)검사를 권했다. 분석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뇌에 문제가 생겨 있었다.
A씨의 뇌는 전전두엽 부위에 이상이 있었고, 그 부위의 혈액순환도 원활하지 않았다. 전전두엽은 뇌의 여러 부위를 연결하는 연결망의 중심으로, 이 부위가 손상되면 행동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기능이 저하된다. A씨뿐만이 아니었다. 2015년 이화여대 뇌융합과학연구원에서 강력범죄 피해자 60명의 뇌를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으로 촬영한 결과, 상당수의 피해자가 정상인과 다른 상태를 보였다. 특히 피해를 입은 지 오래 되지 않을수록 편도체가 과도하게 활성화돼 있었다. 해마의 끝 부분에 있는 편도체는 정서적인 반응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위로, 특히 공포반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 정보를 전달하는 통로인 백질에도 이상이 있었다.
뇌과학자들이 폭행과 성폭력 등 강력범죄 피해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피해자 가운데 상당수는 몸에 남은 상처가 사라져도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조사 결과가 있었지만, 뇌과학 연구는 이뤄지지 않았다.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오랜 시간을 몸부림칠 수도 있는 일부 피해자들에게 과학자들이 손을 내민 것이다.
[진단] 뇌에 남은 상처, ‘바이오마커’ 찾는다
먼저 강력범죄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추적 조사를 하는 연구팀이 생겨났다. 국내에서는 류인균 이화여대 뇌융합과학연구원 교수팀이 2015년 이후 현재까지 강력범죄 피해자 300여 명을 대상으로 뇌 영상을 촬영하고 분석하는 연구를 하고있다. 미국의 경우, 강력범죄 피해자는 아니지만 해외파병 군인 등을 대상으로 충격적인 경험이 뇌에 미치는 영향을 추적 조사하는 연구를 2015년부터 진행 중이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는 뇌에서 공포 반응을 주관하는 편도체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최근 뇌과학에서는 어느 한 부위가 활성화돼서 특정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부위가 동시에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PTSD 역시 편도체와 시상, 뇌섬엽, 해마, 복내측전전두피질 등 다른 부위와의 연결망을 분석해 뇌 전체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연구가 활발하다.
강력범죄 피해자 연구도 마찬가지다. 윤수정 교수팀의 분석 결과, 뇌에서 이상이 확인된 피해자들의 경우 편도체를 중심으로 형성된 연결망과 전전두엽을 중심으로한 연결망 사이의 관련성이 정상보다 약해져 있었다. 또한, 편도체와 상호작용하는 연결망 내부에서의 연결성도 상대적으로 떨어져 있었다. 향후 300명에 대한 분석 결과가 나오면 더 정확한 상관관계가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윤 교수는 “뇌 전체의 연결망 변화를 분석해 현재 PTSD가 진행 중인 피해자를 진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 교수팀은 강력범죄 피해자들의 뇌 영상과 혈액 샘플 등을 장기간 추적 연구할 계획이다. 그 결과를 토대로 혈액이나 뇌 영상을 분석해서 범죄로 인해 뇌에 생긴 이상을 진단할 구체적인 기준을 마련하는 것까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예방과 회복] PTSD 치료, 뇌 연결망 회복에 달려
뇌 연결망이 변화해 PTSD가 일어났다면, 강력범죄 피해자들의 PTSD예방과 치료에 그 사실을 적용할 수 있지않을까.
강력범죄 피해자의 뇌에서 변화가 발견되기 시작할 때 이를 발견할 수 있다면 증상이 질병으로 발전하는 것을 예방할 수도 있다. 예컨대 PTSD로 발전하기 전단계인 외상후증후군(Post Traumatic Syndrome, PTS)을 보이는 피해자들을 발견해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있다. PTS 증상은 특정한 상황에서 가슴이 뛰면서 호흡이 빨라지고 땀이 나는 등 PTSD와 비슷하지만, 증상이 가볍고 오래 지속되지 않아 문제로 여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미 PTSD로 발전한 강력범죄 피해자들의 회복을 도울 때에도 뇌 연구가 중요하다. 이미 밝혀진, 범죄 외의 원인으로 발생한 PTSD 치료법을 이용해서다. 예컨대 류인균 교수팀은 2003년 발생한 대구지하철참사 생존자들을 추적 조사해 PTSD가 회복되는 원리를 밝혔는데, 향후 치료법이 개발되면 강력범죄 피해자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doi:10.1038/npp.2016.136).
2003년 2월 18일 발생한 대구지하철참사는 50대 남성이 지하철 객실 안에서 화재를 일으켜 192명이 목숨을 잃고 148명이 부상당한 대형 사고다. 류 교수팀은 대구지하철참사 사건 발생 약 50일이 지난 시점부터 생존자 30명의 뇌와 행동에 나타나는 변화를 5년 동안 조사한 뒤 8년 동안 자료를 분석했다. 생존자들의 뇌를 약 15개월 간격으로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으로 촬영해 분석한 결과, 사고 직후 생존자들의 뇌는 편도체가 과도하게 활성화돼 있었다. 범죄 피해자들에게서 발견한 것과 유사한 반응이다. 하지만 약 2년 8개월 뒤부터는 PTSD 증상이 완화됐다(왼쪽 그림). 이유는 편도체와 안와전두피질 부위와의 연결이 강화된 것이었다. 안와전두피질은 활성화된 편도체를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 3년 10개월이 지난 시점에는 편도체와 안와전두피질, 시상 등 주변 부위의 연결성이 정상인 수준으로 돌아갔다.
류 교수팀은 이 원리를 적용한 PTSD 치료 방법도 개발 중이다. 자기장으로 뇌를 자극해 안와전두피질과 편도체의 연결성을 강화시키는 방식이다. 경두개자기자극술(Transcranial Magnetic Stimulation, TMS)이라고 불리는 뇌 자극술은 주로 우울증 치료에 이용되고 PTSD 환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는 많지 않았다. 류 교수팀은 경두개자기자극술로 PTSD 증상을 호전시키는 연구와, 편도체 연결성 강화 효과를 입증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피재하 지원] 스마트폰으로 전문가 지원 받는다
PTSD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강력범죄 피해자들을 조기에 발견하고 PTSD를 예방하기 위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개발도 한창이다. 조재형 서울성모병원 내분비내과 교수(IT기업 iKooB 대표)는 이화여대 뇌융합과학연구원 연구팀과 함께 ‘보드미’라는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고 있다. 보드미는 강력범죄 피해자들의 심리적인 상태를 모니터링하고 기분전환을 유도하는 애플리케이션으로, 이화여대 연구팀과 정신건강의학 전문가, 심리학자, 미술치료, 음악치료 등 각 분야 전문가들과 협업해 만들었다.
현재 정신건강의학과에서 PTS나 PTSD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과정은 설문조사와 면담 등으로, 대부분 병원에서 이뤄진다. 병원 밖에서는 환자 관리가 특별히 이뤄지지않는 상황이다. PTSD 환자 관리에 스마트폰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지만, 정보 제공에 머무르는 수준이다. 당뇨 전문가인 조 교수는 내과에서 당뇨 환자들의 증상이 악화되지 않도록 환자들과 수시로 소통했던 경험을 적용했다. 이용자들에게 설문조사를 보내 상태를 파악하고, 매일 안부 메시지와 음악, 그림, 시 등을 보내면서 이용자의 부정적인 감정을 환기시키는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명상이나 스트레칭, 그림 그리기 등 직접 몸을 움직이는 활동 프로그램과, 실제 PTSD 치료에 쓰이는 안구운동민감 소실 및 재처리 요법(EMDR)을 응용한기능도 넣었다. 아무 콘텐츠나 보내는 것이 아니라 각 분야 전문가들이 엄선한 콘텐츠를 보내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했다. 조 교수는 “웨어러블 기기를 이용해 이용자의 활동량과 수면 패턴 등을 함께 모니터링하는 기능도 더할 계획”이라며 “설문조사 결과와 애플리케이션 이용 빈도, 활동량, 수면 패턴 등을 토대로 이용자의 상태를 상세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보드미의 효과를 검증하는 임상시험을 준비 중이다.

조 교수는 보드미가 치료 장치는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피해자들을 모니터링하고 상태가 나빠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보드미가 제 기능을 발휘한다면 현재 법무부에서 운영 중인범죄 피해자 지원 제도와 함께 상승효과를 낼 수 있다. 현재 법무부에서는 강력범죄 피해자들의 심리적 회복을 돕는 ‘범죄 피해자 지원 센터’를 운영 중인데, 피해자들의 이용이 활발하지 않은 상황이다. 조 교수는 “보드미와 범죄 피해자 지원 센터를 연계하면 피해자들을 더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예를 들어 애플리케이션 이용자에게서 이상 징후를 발견하면 범죄 피해자 지원 센터 담당자에게 알림이 가도록 하는 식이다.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아도 심리치료 전문가가 빠르게 개입해 위험 증상을 보이는 피해자를 돌볼 수 있다.
강력범죄를 경험한 피해자들에게 정신적인 상처가 남을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말이다. 모두가 그들의 아픔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공감한다. 하지만 그 상처가 무엇이며 어떻게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런 측면에서 강력범죄 피해자들의 뇌를 조사하는 연구는 과학자들이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에 함께 동참하려는 새로운 시도다. 류인균 교수는 “뇌 손상은 나이가 어릴수록, 여성일수록, 피해 상황이 반복될수록 치료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