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일. 갑작스런 추위로 기온이 0℃ 안팎까지 떨어진 날이었다. 해발 700m 고지대에 자리 잡은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이미 겨울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아직 공식 개장을 하지 않아 관람객이 없는 수목원 안 깊숙한 곳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자, 마치 버섯처럼 생긴 건물이 땅 위로 불쑥 솟아 있었다. 산림청이 만든 세계 두 번째 종자저장고 ‘씨드볼트’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영하 20℃ 저장고에 종자 100만 점 영구 보관

버섯 모양의 건물 안에는 향후 수목원을 찾을 방문객들에게 씨드볼트를 소개하는 전시물과,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할리우드 영화 속 지하 비밀 기지로 내려가는 장면을 상상했지만, 아쉽게도 보통 건물의 엘리베이터 내부와 다름없었다.
한 5초 정도 흘렀을까. 지상에서 40m를 내려온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거기서 계단을 따라 다시 2m 정도를 내려오자, 거대한 터널이 나타났다. 길이 127m에 달하는 종자저장소의 중심 터널이었다. 이 터널 좌우로 마치 가지를 치듯 37m 길이의 터널 두 개가 나 있었는데, 현재 그 중 하나가 종자장기저장고로 이용 중이었다. 동행한 장정원 산림청 산림복지시설사업단 시설과 연구원은 “한 터널에 100만 점의 종자를 저장할 수 있다”며 “현재 연간 2만 점씩 모으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장기저장고로 들어가려면 완충지대 역할을 하는 0℃의 ‘전실’을 지나야 한다. 영하 20℃의 장기저장고로 바로 들어갈 경우 종자가 충격을 받아 생명력을 잃거나 활력이 떨어질 수 있다. 보통 1~2시간 정도 전실에 종자를 보관해 안정시킨 뒤 저장고 안이나 밖으로 옮긴다.
전실에서 두꺼운 패딩 점퍼로 갈아입고 장갑을 낀뒤 장기저장고의 문을 열자, 몸속까지 얼려버릴 듯한 한기가 엄습했다. 장 연구원은 “몸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여기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한 번에 최대 5분으로 제한하고 있다”며 직원들과 함께 분주히 움직였다. 연구원들은 두 명이 한 조를 이뤄 하루 세 번씩 장기저장고에 들어온다.
장기저장고 내부는 마치 도서관과 같았다. 종자를 병에 넣고 밀봉한 뒤 기증한 기관별로 구역을 나눠 보관했다. 병마다 QR코드가 붙어 있어 컴퓨터로 미리 종자의 위치를 파악하고 들어올 수 있다. 덕분에 신속히 작업할 수 있다.
냉동실보다 온도가 낮은 저장고 내부에 성애가 생기지 않는 것도 흥미로웠다. 장기저장고를 설계한 두영엔시스의 최해룡 이사는 “염화리튬수용액 제습제를 써서 상대습도를 40%로 유지하고 있다”며 “용액을 저장고 내부에 분사한 뒤 습기를 머금은 용액을 공조설비를 이용해 다시 저장고 밖으로 빼내고, 열을 가해 수분을 날려 보내 재사용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전실과 저장고를 가르는 문에는 히터가 설치돼 있어 얼음이 생기지 않는다.
영하 20℃와 상대습도 40%는 종자를 휴면 상태로 장기간 안정적으로 보관하기에 가장 적합한 조건이다. 종자는 온도와 습도 조건이 갖춰지면 갖고 있는 양분을 이용해 스스로 발아를 시작하는데, 영하 20℃와 상대습도 40%의 조건에서는 종자의 수분 함량이 5% 미만으로 유지된다. 종자의 발아를 안정적으로 억제할 수 있다.
저장고를 가동하는 데 필요한 전기는 서로 다른 두 곳에서 공급되기 때문에, 어느 한 쪽에 문제가 생겨도 가동하는 데 문제가 없다. 전기 공급이 모두 끊길 경우 자체 발전기로 한 달 정도는 충분히 저장고를 가동할 수 있다. 또 발전기마저 멈춘다 해도 지하 터널의 온도가 한여름에도 15℃를 넘지 않기 때문에 저장고 내부 온도가 급격하게 높아지지 않아 한동안 버틸 수 있다.
장기저장고 내부에 들어온 지 5분이 채 되지 않아 손발이 따끔해지기 시작했다. 함께 들어온 일행 한 명은 약한 두통을 느꼈다. 다시 전실을 거쳐 밖으로 나왔지만 몸속에서 한기가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산림청은 2009년 야생식물 종자를 영구보관하는 씨드볼트를 처음 계획했다. 야생식물은 쉽게 말해 ‘잡초’다. 일부러 많은 돈을 들여 지하공간을 파내면서까지 잡초의 종자저장고를 만든 이유가 뭘까. 김재현 산림청 산림복지시설사업단 시설과 연구관은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는 주로 식량작물의 종자를 보관한다”며 “야생식물은 식량작물보다 종류가 더 많고 향후 식량과 약물, 산업자원 등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안전하게 장기간 보관할 곳이 없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게다가 한국은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개발도 상국가와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이들 지역에서 나는 알려지지 않은 야생식물자원을 확보하기에 좋다. 과거 연구자들은 마치 문익점처럼 다른 나라의 식물종자를 무단으로 가지고 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은 국제 규제가 생겨 까다로운 절차를 거처야 한다. 씨드볼트는 다른 나라의 야생식물 종자를 보관해 주면서 합법적으로 연구용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씨드볼트는 야생식물에 대한 기초 연구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야생식물은 식량작물에 비해 기초적인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종자의 수명이나 발아 조건 등 기본적인 특징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김 연구관은 “해외에서 맡긴 종자를 연구해 경제적인 이윤을 얻을 수 있게 될 경우 합법적으로 이익을 공유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향후 기업체에서 특정 야생식물을 이용해 제품을 개발할 경우 발아 조건 등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는 특성이 대부분 밝혀진 식량작물을 저장하기 때문에 이런 연구 기능 없이 말 그대로 종자를 저장하기만 한다. 씨드볼트 소속 연구원들은 향후 국내 야생식물 약 3000종을 자체적으로 수집하는 한편 해외 기관과 협약을 맺어 외국 야생식물의 종자를 보관하고 연구할 계획이다.
고려대 야생자원식물종자은행 연구팀과 함께 종자의 수명을 예측하는 수학 모델도 연구할 계획이다. 현재 고려대 연구팀은 과, 속별로 대표적인 종자를 분석해서 수명을 예측하는 수식을 만들고 있다. 종자의 성분 함량을 이용해 저장 수명을 추정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종자 저장을 준비하고 연구하는 전체 과정을 따라가던 중, 전자현미경실에서 멸종위기식물인 매미꽃을 볼 수 있었다. 지리산에서만 볼 수 있는 꽃이다. 전자현미경으로 보이는 매끄럽고 복잡한 패턴이 인상적이었다. 이동준 산림청 산림복지시설사업단 시설과 연구원은 “매미꽃 같은 멸종위기식물을 우선순위로 수집해서 종자를 보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약재로 무분별하게 쓰이는 식물도 마찬가지다. 겨우살이는 항암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어 향후 자생지가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씨드볼트는 내년 초까지 종자 저장 및 연구 기능을 완벽하게 갖추고 국립백두대간수목원 개장과 함께 본격적으로 가동을 시작할 예정이다. 장정원 연구원은 “2023년까지 약 30만 점의 종자를 모아 보관할 계획”이라며 “중심 터널에 종자장기저장고 터널을 4개까지 만들 수 있기 때문에 400만 점 이상의 종자를 영구 보관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