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더워질수록 귀신도 진화하고 있다. 화면에서만 보던 귀신은 가고 내 등 뒤를 쫓아오는(!) 귀신이 나타났다. 가상현실(VR) 속 귀신이다. VR의 킬러 콘텐츠로 급부상하고 있는 VR 공포 콘텐츠, 기자가 직접 체험해 봤다. 귀신을 눈 앞으로 튀어나오게 하는 기술에 대해 알아보는 게 목적이었는데….
“으악! 앞으로 못 가겠어요! 앞에 좀비가 나온단 말이에요!!!”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7월 5일 오전, 기자는 서울 충무로역에 위치한 체험식 가상현실(VR) 기기 개발 업체 모션테크놀로지의 사무실에서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체험식 VR 콘텐츠는 사용자의 움직임을 인식하는 기술을 이용해 마치 영상 속에 있는 것처럼 사용자가 걸어 다닐 수 있다.
평소 웬만한 공포 영화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보는 터라, 가벼운 마음으로 기기를 착용했다. 착용해야 할 기기는 헤드 마운티드 디스플레이(HMD)와, 조끼처럼 입는 VR 베스트(vest)였다. 베스트는 보기보다 꽤 무거웠다. 베스트를 장착한 뒤 HMD를 쓰자 시각과 청각까지 모두 막혀 마치 혼자만의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방향감각이 없어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는 기자의 손에 권홍재 모션테크놀로지 연구소장은 “손전등”이라는 말과 함께 물체를 쥐어줬다.
“이제 영상이 시작되면 어두운 병원이 나올 거예요. 손전등을 들어 빛을 비추면 통로가 보이니까 걱정 마세요. 쭉 가시다가 엘리베이터가 나오면 뒤를 돌아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가면 됩니다. 영상 틀어 주세요.”
권 소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자를 둘러싼 곳은 폐병원으로 바뀌었다. 손전등(과 유사한 물체)을 들자 정말 손전등이 향하는 방향으로 빛이 생겼다. 조심스레 발을 옮기는데 왼쪽에서 “끼긱”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워있던 좀비가 관절을 꺾는 소리였다. 너무 놀란 기자는 뛰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등 뒤쪽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설마’하는 생각으로 뒤를 돌자 아까 그 좀비가 기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으악!!!”
수 차례 비명을 질러가며 간신히 체험을 마치자 연이어 두 번째 영상이 나왔다. 두 번째 영상은 폭포에 아슬아슬하게 설치돼 있는 다리를 건너 보물을 가져오는 영상이었다. 조심스레 다리를 건너는데, 정말이지 다리가 후들거렸다. 간신히 보물이 있는 곳까지 도착해 허리를 굽혀 보물 쪽으로 손을 뻗으니 진짜 물체가 만져졌다. “다리 아래로 떨어져 보라”는 권 소장의 제안에 심호흡을 크게 쉬고 다리 옆으로 뛰어내리자 바이킹을 탈 때 느껴지는, 배가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HMD를 벗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손에 들려있는 ‘보물’이었다. 물체는 작은 핸드볼용 공으로 긴 안테나가 붙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손전등에도, HMD에도 같은 안테나가 달려 있었다. 권 소장은 “안테나 끝에 달린 동글동글한 부분이 일종의 적외선 센서”라고 말했다.
사무실에 마련된 체험장은 가로 세로가 각각 8m로 3면에 걸쳐 총 12대의 모션캡쳐용 적외선(IR) 카메라가 설치돼 있다. 카메라에서 적외선을 쏘면 HMD나 손전등(물체) 상하좌우 네 방향으로 뻗어있는 안테나 끝부분에 반사돼 다시 카메라로 돌아간다. 반사돼 도착하는 시간 차이를 이용해 사용자의 위치와 손전등의 위치 등을 파악한다. 이런 방식을 광학식 모션캡쳐라 한다. 자기장을 이용한 자기식 모션캡처 방법도 있지만, 센서와 자기장 발생 장치 사이에 연결이 필요해 사용자의 움직임에 방해가 된다는 단점이 있어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2kg에 달하는 베스트를 벗자 장비 때문인지 식은땀 때문인지 등 뒤가 흥건했다. “베스트에는 뭐가 달려있길래 이렇게 무거운 건가요?”라고 묻자 권 소장은 “작은 컴퓨터가 달려있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답했다. 베스트 뒤쪽에는 이동식 컴퓨터가 달려있는데 그 내부를 뜯어보면 실제 일반 컴퓨터와 유사하다. 작동 중에 발생하는 열을 식히기 위해 팬(Fan)도 달려있다. 베스트는 사용자의 움직임을 좀 더 정밀하게 감지할 뿐만 아니라 앞뒤, 양 옆에 달린 진동 센서로 사용자에게 시각 정보 이외의 정보를 주는 역할도 한다. 기자의 등 뒤에 좀비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도 바로 이 진동센서였다(다시 생각해도 진땀이 흐른다). 광학식 모션캡쳐 기능과 베스트, 이 모든 것을 제어하는 컴퓨터 시스템이 합쳐지면 사용자의 움직임을 mm 단위까지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다.
체험형 VR은 사용자가 직접 움직이니 현실감도 뛰어나고 어지러움도 없었다. 흔히 VR 콘텐츠를 감상할 때 느껴지는 어지러움은 몸은 움직이지 않는데 시야만 움직이는 데에서 오는 인지부조화 때문이다. 체험형 VR은 움직인 만큼만 시야가 변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점이 없다.
단 한가지 아쉬운 점은 ‘접근성’이다. 가정용으로 개발한 것이 아니다 보니 쉽게 접할 수 없다는 것이 단점이다. 이런 체험식 VR 콘텐츠에 가장 눈독들이고 있는 산업은 테마파크다. 놀이공원에 하나씩은 있는 ‘귀신의 집’에 제격이다. 권 소장도 “자세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외국의 테마파크 업체들과는 꾸준히 만나고 있다”고 귀띔했다.
우리나라 역시 VR 테마파크에 시동을 걸었다. 지난 7월 7일 정부가 발표한 ‘가상현실 산업 육성 추진현황과 향후 계획’에 따르면 내년까지 VR 게임, VR 테마파크 등 가상현실 선도 프로젝트에 총 600억 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여러분이 폐병원에서 좀비와 귀신들을 만날 날이 생각보다 가까워질지도 모른다.
“아, 아까 떨어져 죽은 학생이 벽을 타고 올라오는데요?!”
VR 공포 게임 역시 만만치 않았다. 지난 13일 기자가 체험해 본 VR 공포 게임은 내년 상반기 출시를 앞 둔 ‘화이트데이 : 스완송’이었다. 이 게임은 2001년 PC용, 2015년 모바일용으로 출시돼 많은 인기를 누렸던,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공포 게임, ‘화이트데이 : 학교라는 이름의 미궁’을 원작으로 한 게임이다. 내년 상반기에 출시될 VR 게임, ‘화이트데이 : 스완송’은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용으로 HMD, 카메라, 플레이스테이션, 컨트롤러(조이스틱)가 한 세트다. HMD와 컨트롤러에는 자이로센서(회전하는 물체의 위치와 방향설정에 활용되는 센서)와 가속도계가 내장돼 있어 사용자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지를 측정한다. 사용자와 마주보고 있는 카메라는 HMD가 보내는 신호를 받아 세부 보정을 한다.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하고 HMD를 쓰자 어두컴컴한 학교 교실이 보였다. 문을 열고 나가자 교실 복도에 한 여학생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캄캄해서 아무것도 안 보여”, “여기 내가 있을 줄 몰랐지?”와 같이 일상적인 말을 하며, 때때로 기자의 의견을 묻기도 했다(물론 기자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거나 혹은 갸우뚱거리는 정도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예고 없이 나타난 수위 아저씨도 충분히 공포스러웠지만, 압권은 마지막에 등장한 자살 귀신이었다. 그 귀신이 기자에게 손을 내밀며 다가오는 순간 그 귀신으로부터 멀어지려다 게임기를 떨어뜨릴 뻔 했다.
게임을 마친 기자가 “귀신이 꽤 가까이 왔는데도 어색함이 별로 없었다”고 말하자, 화이트데이를 개발한 로이게임즈의 김현만 개발실장은 “공포스러움을 배가 시키기 위해 캐릭터를 실감나게 구현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고 말했다. 로이게임즈는 게임 속 캐릭터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만들기 위해 모션캡쳐 기술을 이용해 직접 3D 모델링 작업도 한다.
김 실장은 “가장 앞선 방법은 ‘스캐닝’”이라며 “일부 게임이나 영화에서는 이 방법을 많이 사용한다”고 말했다. 스캐닝은 마치 우리가 종이에 쓰인 내용을 그대로 스캔해 컴퓨터로 보는 것처럼, 사람의 움직임은 물론 외형까지 3D 데이터로 복사해 컴퓨터로 옮기는 작업이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실제 모델과 똑같이 생긴 3D 캐릭터를 만들 수 있다. 현재 일부 게임이나 영화에서 주로 사용한다.
VR 게임이 현실 같다고 느끼는 데에는 캐릭터의 영향도 컸지만, 생각보다 어지럽지 않다는 것도 한몫을 했다. 김 실장은 “높은 프레임 수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VR은 사용자의 시선에 따라 실시간으로 최적화를 시키는데, 프레임수가 많아야 연결이 자연스럽고 어지러움이 덜하다. 화이트데이는 최대 120 프레임을 제공한다. 김 실장은 “소니 HMD는 어지럼증을 줄이기 위해 하드웨어에서 보정을 하기도 한다”며 “1번 프레임과 2번 프레임 사이의 시간이 너무 길면, 이전의 프레임을 한번 더 추가적으로 넣는 방법으로 120 프레임을 유지하도록 설계돼 있다”고 말했다. 이런 기술을 재투영(reprojection) 기술이라고 한다.
TV나 영화도 프레임 수를 늘리는 추세지만, 보통 24~30프레임 정도를 사용한다. 유독 VR 콘텐츠만 프레임 수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김 실장은 “어지럼증 때문”이라고 말했다. VR 콘텐츠는 영화와는 다르게 실제 내가 움직인다고 느껴야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최대한 뇌가 진짜라고 느껴야 어지럼증이 덜합니다. 프레임 수가 적어지거나 중간에 프레임 수가 바뀌면 멀미를 느끼기 때문에 재투영 기술로 120 프레임을 맞추려고 하는 거죠.”
이 외에도 소니 HMD는 사용자가 움직일 때 시야를 좀 더 좁고 흐리게 보여줘 어지럼증을 줄였다(위의 그래픽 뉴스 참조). 이 기술을 적용하면 VR 사용 시간이 길어질수록 일반 VR에 비해 사용자가 느끼는 불편함이 확연히 줄어든다. 이런 기술과 더불어 탄탄한 시나리오는 공포감을 느끼기에 충분했으나, 필요한 장비가 많다는 것이 단점이다(장비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지출이 많다는 뜻이다). 자금의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는 강력 추천,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다음 콘텐츠를 추천하니 주목하길 바란다.
본격 공포 VR 게임을 경험하기 전, 우황청심환 대신 가정용 VR 기기로 뜨거운 맛을 미리 경험해보자. 사실 기자는 이미 두 콘텐츠를 경험한 터라 가정용 VR기기로 보는 귀신은 우스울 줄 알았다. 하지만 유튜브에 올라오는 VR 공포 콘텐츠 역시 웬만한 2D 공포영화보다 훨씬 더 무서웠다. 현실감이 덜하다 해도 360°영상인데다 귀신이 달려오는 듯한 느낌은 충분히 공포스러웠다.
위에 소개한 두 VR 기기에 비해 가정용 VR 기기는 훨씬 저렴하기 때문에 고품질의 디스플레이나 고도의 하드웨어 기술을 사용하기가 어렵다. 때문에 콘텐츠에서 현실감이 느껴지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다. VR기기 및 콘텐츠 개발 회사 에프엑스기어의 최광진 기술이사는 콘텐츠의 현실감을 살려주는 요소로 화질(해상도)을 꼽았다.
[에프엑스기어의 눈 VR(NOON VR) 기기. 위의 덮개를 열고 스마트폰을 고정시킬 수 있다. 운영체제에 상관없이 4.7~5.7인치 사이의 다양한 스마트폰과 호환된다.]
또 하나의 기술은 ‘다이나믹 스트리밍’이다. 사용자의 시선에 따라 아예 다른 영상을 보여주는 기술로, 용량을 기존 영상의 25%까지 줄일 수 있다. 사용자의 시선을 꼭지점으로 사면체를 만들었을 때 중심부는 고화질로, 그 이외의 부분은 저화질의 영상을 보여주거나, 혹은 아예 영상을 보여주지 않는 방법이다. 예컨대, 사용자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경우 뒤통수 방향의 화면은 보여줄 필요가 없는 영상이기 때문에 아예 까만 화면으로 처리하는 식이다. 페이스북도 올해 1월, 스마트폰에서 고화질의 VR 영상을 즐길 수 있도록 다이나믹 스트리밍 기술을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최 이사는 “공포 영상은 VR로 구현하기에 아주 좋은 콘텐츠”라며 “현실감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보는 사람이 느끼는 공포감이 천차만별일뿐더러, 콘텐츠 자체에 어두운 부분이 많아 (해상도를 경제적으로 높여주는) 두 기술을 적용시키기에도 적합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