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수상자라면 자신의 분야에서 한 획을 그은 과학자들이다. 연구를 흐르는 강물에 비유하자면, 크고 작은 강줄기를 새로 낸 뛰어난 이들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강물을 거꾸로 되돌리기도 한다. 2004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아론 치에하노베르 이스라엘 테크니온공대 교수가 그런 과학자다. 지난 5월 31일, 호암재단이 개최한 노벨상 수상자 특별강연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치에하노베르 교수를 만나 인터뷰했다.
세포에도 문자가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DNA다. 사람의 문자를 빌어 DNA는 알파벳 A, G, C, T로 표현한다. 세포에는 또 다른 문자도 있다. 마치 매듭을 묶어서 기록을 전달하던 잉카제국의 문자 ‘키푸’처럼, 단백질 매듭을 이용해 세포내 단백질에 이상이 있다는 신호를 보낸다. 이때 문제가 생긴 단백질을 표시하는 매듭이 ‘유비퀴틴’이다. 세포의 청소부인 프로테아좀은 유비퀴틴이 표시된 단백질을 찾아 분해한다.
흐르는 강물을 힘차게 거슬러 오른 과학자
지금이야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도 실리는 내용이지만 아론 치에하노베르 이스라엘 테크니온공대 교수가 처음 연구를 시작한 1970년대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모두가 센트럴 도그마(DNA가 정보를 저장하고 RNA와 단백질이 전사와 복제, 번역을 한다는 분자생물학의 기본 원리)에 열광하고 있었습니다. 단백질이 어떻게 버려지는가는 관심 밖이었습니다.”
그의 말처럼 당시 생명과학의 주류는 DNA의 전사와 번역이었다. 단백질의 분해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게다가 당시에는 모든 단백질이 리소좀에서 분해된다고 알려져 있었다. 리소좀이 아닌 다른 단백질 분해 과정을 연구하는 것은 비주류 중의 비주류였다. 그래서 촉망받던 외과의사였던 그가 단백질 분해를 연구하기로 했을 때 모두가 반대했다. 그럼에도 연구에 매진했던 이유는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리소좀은 많은 단백질을 동시에 처리할 때 좋은 방법입니다. 그런데 ‘한 번에 쓰레기를 처리하는 것이 리소좀이라면, 그때그때 쓰레기를 버리는 방법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선배 과학자들의 실험으로 세포가 리소좀 외에 ATP를 사용해서도 단백질을 분해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여기서 큰 도움을 얻었습니다.”
그는 1970년대 후반, 리소좀이 없는 망상적혈구에서 유비퀴틴을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스타덤에 올랐고, 단백질 분해도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새로운 단백질 분해법을 찾아냈지만 연구를 이어나가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비유를 들자면, 호텔을 철거하는 데 5일이면 충분하다고 해보죠. 반대로 좋은 호텔을 세우는 데는 5년도 모자랄 겁니다. 내부 인테리어, 전기 배선 등 고려해야 될 것이 무척 많죠. 처음에 유비퀴틴을 연구할 때는 혼자 호텔을 짓는 기분이었습니다. 연구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외롭고 막막했죠. 그러나 이제는 제가 뼈대를 쌓은 건물의 빈틈을 젊은 과학자들이 하나둘씩 채워가고 있습니다. 호텔을 처음 세우는 것만큼 중요하고 대단한 일입니다.”
호기심이 가리키는 마음의 길
다음 날인 6월 1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성균관대새천년홀에 치에하노베르 교수의 강연을 듣기 위해 전국에서 8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그는 바쁜 일정에도 여전히 유쾌하고 신사다웠다. 인터뷰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 놓으며, 그는 학생들에게 한 가지를 강조했다.
“한국 학생들은 진로를 결정할 때 부모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곤 합니다. 하지만 인생에서 중요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분할 때는 스스로 본인의 흥미를 먼저 확인해봐야 합니다. 자신의 호기심에 귀를 기울여 진로를 결정하세요.”
치에하노베르 교수가 인터뷰 막바지에 했던 말도 비슷했다. “(인터뷰 도중 통역을 도운 권용태 서울대 의대 교수를 가리키며) 권 교수가 65세에 정년이 끝나도, 저는 연구를 계속하고 있을 겁니다(치에하노베르 교수는 권 교수보다 열다섯 살 위다). 목표를 세우는 건 무척 따분한 일입니다. 그 목표를 해결하고 난 뒤에도 인생은 계속되니까요. 궁금했던 무언가를 알고 나면, 이제 또 다른 궁금증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제가 궁금한 것을 연구하며 살아갈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