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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ch & Fun] Science Fiction_K박사의 섬




#1

“아뇨, 그건 급진적인 채식주의자들이랑 별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데요.”

차라리 급진적인 채식주의자가 되었다면 훨씬 나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도대체 몇 번째지? 불과 두세 달 전에는 플라스틱이 지구를 질식시킨다며 집안의 모든 세간을 내다버렸고, 그 전에도 하루 종일 탄소발자국을 세고 앉아 있거나 GMO 사용 식품의 방대한 목록을 만들어 외우고 네트워크에 뜬 불매 운동 권유를 모조리 실천에 옮겨서 거의 모든 생필품을 해외 직구에 의존하는 짓들을 벌여온 누나이니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아니, 그래도 똥을 먹다니.

#2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언어와 관습에 의해 촉발된 반작용에 지나지 않아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이는 반응은 선입견에 물든 감각에 의해 잘못 연동된 결과일 뿐입니다. 보세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런데 보는 저는 아무렇지도 않지 않아요. 그럴 수가 없어요.(차마 입 밖에 낼 수는 없었지만) 눈앞에 놓인 것은 하얀색 바탕에 푸른 꽃무늬가 그려진 평범한 도기 접시 위에 어딘가 공상과학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회백색 직육면체인데, 이것의 정체는 다름 아니라 10분 전에 주방 옆 화장실에서 그녀가 보고 온 볼일의 생화학공학적 재처리 결과물이다. 보고 있기만 해도 태곳적 동물 시절부터 인류가 10만여 년 동안 유전자 위에 차곡차곡 쌓아온 모든 원초적인 금기와 터부, 원시적인 미신과 상징, 사회적이고 문화적이며 후천적으로 습득된 모든 거부감들이 한꺼번에 환기되는 듯하다. 아마 이 물체가 모락모락 희미한 김이라도 피워 올리고 있었다면 나는 환각 속에서 구린내를 맡고 비명을 지르며 미쳐버렸겠지만….

그러나 이 회백색 직육면체는 차갑게 굳어 있고 단단하고 야무져 보인다. 마치 그녀처럼. 도대체 그녀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일까? 정말로 이성 혹은 광기는 인류의 태곳적 금기마저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데 과연 배설물과 관련된 금기… 심리적 저항감은 과연 인류의 태고까지, 아니, 그 너머 동물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일까? 어쩌면 그저 서구 근대의 결벽증적인 개인 위생 문화의 산물인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 대규모로 무리 짓는 초식동물이 아닌 다음에야 적어도 포유류 중에서 자신의 배설물을 함부로 다루는 동물은 없다. 많은 동물들이 적 혹은 포식자를 경계해 배변을 감추고 혹은 경쟁자에게 경고하기 위해 일부러 노출하기도 한다. 식분증… 자신의 혹은 다른 동물의 배설물을 먹는 습관도 일반적으로 많은 동물들에게서 관찰된다. 고릴라도 영양분을 재추출하고 효소와 박테리아를 회수하기 위해 대변을 먹는다. 하지만 사람은?

…그녀는 두부와 버터의 중간 정도 질감으로 보이는 회백색 직육면체를 포크로 가볍게 잘라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웃는다.

“드셔 보실래요?”

#3

“…숙련된 전문 인력이 모듈을 설치해드립니다. 모든 유닛은 깔끔하게 포장되어 배송되므로 이웃집의 시선은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공사도 단지 변기를 교체하고 기존의 배수구를 막고 별도의 관을 벽을 따라 주방까지 연장하는 정도니까 소음을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화장실 벽을 뚫는 소리가 가장 큰 문제인데… 에, 뭐, 에어컨 설치랑 큰 차이는 없습니다.”

내가 기자가 아니라 고객으로 보이나? 아니,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는 전부 취재원처럼 보이듯이. 직업이 그 사람을 만들고 그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을 만들어낸다. 교사가 집에서도 훈계하듯 말하고 경찰이 친구들에게도 취조하듯 말하는 것처럼 마케팅 임원은 기자한테도 프레젠테이션하듯 말할 뿐일 것이다. 그래서 기자답게 질문을 던져 본다.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가뿐하고 당당한 표정으로 그가 말을 멈추고 미소짓는다.

“이사님도 댁에 설치하셨나요?”

그는 존경할 만한 전문가적인 태도로 결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가벼우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이어질 수도 있는 모든 질문들을 확고하게 차단하며 답한다.

“아뇨.”

#4

“아녜요. 이건 결코 흔한 도착성애적 증상이 아닙니다. 그럴 거면 좀 더… 날 것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철지난 뉴에이지 사업이나 뭐 그런 것도 아니에요. 수익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를 교주나 구루 같은 거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렇지만 선생님께서 이… 기술을 개발하신 것 맞지 않나요? 그리고 이 기술을 실제로 실생활에 도입하신 첫 번째 사람이고요. 또, 지금 이… 기술을 이용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 기술을 사용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선생님이 이 기술을 개발하신 이유와 동일하지 않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 사람들과 아무런 관계도 유지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그 사람들끼리도 서로 어떠한 커뮤니티도 구성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고요.”

“네, 선생님은 이 기술에 대해 어떤 특허도 신청하지 않았고, 우연히 이 기술을 알게 된 친구 분이 선생님의… 견해에 공감해서 본인도 이 기술을 이용하고, 마찬가지로 취지에 공감하게 된 주변 사람들에게도 시제품을 보급하다가 마침내 특허를 받고 회사를 차려서 상용화된 제품을 판매하기에 이르러서도 전혀 관여하시지는 않았죠.”

K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힘입어 나는 말을 계속 이었다.

“그래서 저는 묻고 싶은 겁니다. 지금 선생님의 기술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선생님의 생각을 추종하고 있는 것이라고 오해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이 기술을 개발하신 선생님께서는, 선생님의 이 기술을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도대체 왜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자신의 똥을 먹기 시작한 걸까요?”

#5

“아니야, 아직도 모르겠니? 채식주의랑 이건 완전히 달라. 아예 다르다고. 채식주의도 결국은 살아있는 무언가를 먹는 거잖아?”

아뇨, 누님. 화분에서 계속 키우면서 열매나 잎, 줄기만 따서 먹는 채식주의도 있다던데요?

“그래봤자 그 열매, 그 잎, 그 줄기는 살아있는 거잖아. 네 팔을 잘라도 잠시 동안은 팔 안의 근육과 신경, 혈액 세포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생명의 핵심은 움직임이고 에너지야. 살아있는 것을 파괴해서, 생명을 죽음으로, 연속된 움직임을 영원한 정지로 바꾸어서 내 생명, 내 움직임만 연장하는 건 모두 죄일 뿐이고. 어쨌거나 내가 먹는 동안이든 내가 먹기 전이든 나와 다른 무언가의 생명을, 삶을, 움직임을, 에너지의 흐름을 끊고 멈추는 것은 모두 죄일 뿐이야. 그걸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행위는 더 큰 죄를 짓는 것뿐이고.”

그러니까, 자기 똥을 먹는 건 그런 죄를 더 이상 저지르지 않으려는 행위라는 건가요?

“그보단 속죄라는 게 더 적절하겠지. 과거의 모든 우리들의 죄에 대해서, 지금도 너희들이 저지르고 있는 모든 죄에 대해서.”

그러면 누나도 그게 고통스럽다는 것을, 상쾌한 행위가 아니라는 것은 인정하시는 거네요?

“아니야, 진정한 속죄는 그동안의 죄에 대해 상응하는 고통을 벌로써 스스로에게 부과해서 그 죄를 삭제하는 그런 대차대조적인 계산이 아니야. 그동안 지었던 죄로부터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잘라내어 앞으로는 더 이상 어떤 죄도 나타나지 않도록 회개하는 거지. 구원은 어디 저 위에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게 아니야. 우리가 회개와 속죄로 만들어 내는 거지.”
 

그럼 저희들이 저지르고 있는 잘못까지 대속한다는 건요?

“우리가 이렇게 속죄할 수 있는 길을 너희들한테 보여줘서 너희들도 자연스럽게 속죄할 수 있도록 돕는 거지. 아니면 도대체 누가 누구 죄를 대속한다는 거야?”

#6

“아뇨. 절대 안 됩니다. 그건 무한동력기계를 만들겠다는 몽상이나 다를 바 없어요. 똑같이 열역학 법칙을 무시하는 멍청한 소리입니다.”

직업상 멍청이들을 많이 상대하긴 합니다만, 이렇게 참신한 헛소리는 또 처음이군요, 라는 표정으로 의사가 말했다.

“인체의 소화 흡수 효율이 그닥 높지 않은 건 사실입니다만, 그렇다고 그걸 재섭취해서 살아가겠다는 건 선풍기 바람으로 풍력 발전기를 돌리겠다는 얘기밖엔 안 돼요. 아무리 살균 정화를 거쳐서 기생충이나 독성 물질을 제거했다고 해도 애초에 영양분이 부족하긴 마찬가지입니다. 그걸 재흡수하겠다는 내장 기관의 효율도 여전히 좋지 않은 건 똑같고요.”

#7

아니, 이 건은 애초에 내가 할 게 아니었다. 그냥 까칠한 호관 씨나 뭐 그런 칼럼에서, 똥을 먹는다고요? 거 참 고소하네요. 그렇게 짧게 웃고 넘겼어야 된다. 그놈의 가족이 뭔지, 누나가 얽혀 있는 바람에 좀 더 알아본다고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며 취재했지만 애초에 그럴 필요가 있는 기삿거리가 아니었다. 그래도 취재비를 탄 탓에 송고했는데, 마침 한국형 핵융합로가 열네 번째로 실패하고 중국 대기근도 정부의 통제로 접근이 허용되지 않으면서 비어버린 메인 자리에 그냥 올라가버렸다. 그리고 연동된 일간지 과학 면에도 올라가고, 쓸데없이 종편 의학 프로그램으로도 연결되면서 갑자기 최대 이슈로 급부상돼 버렸다. 다른 신문사와 방송국에서도 부랴부랴 ‘똥을 먹는 자들’을 찾아내어 ‘세상에 이런 일이!’나 ‘서프라이즈’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시키고 가십성 기사들을 양산해서 뿌려댔다. 그 결과….

#8

마녀 사냥이 벌어졌다. 사람들은 가족, 친지, 이웃 혹은 직장 동료 혹은 지인, 친구 엄마, 엄마 친구… 자기 주변의 누가 과연 똥을 먹는 사람인지 알아내려고 혈안이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이유로 누명을 쓰고 똥을 먹는 사람으로 몰려 직장을 그만두고 셋집에서 내쫓기고 이혼 당하거나 파혼 당했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왕따가 새삼스럽게 불붙었다. 아무리 급식이나 도시락을 보는 앞에서 꼬박꼬박 먹어도, 한 번 똥개라고 찍히면 꼼짝 못하고 따돌림 당해야 했다.

정부 당국에서는 뒤늦게 대책을 내놓았지만 정책이란 게 대개 그렇듯 일단 똥 먹는 자들에 대한 전수 조사부터 나서다가 안 먹어도 될 욕만 잔뜩 먹었고.

홀로코스트 혹은 제노사이드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국내외에서 이슈가 되자 자연스럽게 이 사람들은 하나의 커뮤니티를 구성하고 단체 행동에 나섰다. 처음에는 음식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맙시다, 같은 얌전한 캠페인을 벌이더니, 별반 효과가 없자 나중에는 결국 해외에 어디 섬을 하나 사서는 그리로 단체로 이주해버리고 말았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해외 이주에는 K박사가 주축이 되었다고 했다. 물론 나는 이미 흥미를 잃어도 한참 잃어버린 주제였지만.

#9

그리고 우리는 망했다.

중국의 대기근을 시작으로 인도, 유럽,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서 수많은 작물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말라 죽어버렸다. 과학자들은 지나친 품종 개량과 유전자 조작으로 인한 유전적 다양성 고갈을 원인으로 진단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해결책을 찾을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과학자들이, 그 다음에는 기업가들이, 그 다음에는 언론인들이, 그리고 그 다음에는 국민들이, 그리고 그 다음에야 비로소 정치가들까지 마침내 모든 사람들이 당황했다. 지금까지 2만 년 동안 그랬듯이 변함없이 계속해왔는데 갑자기 왜 이럴까? 알 수가 없었다. 자연이 바뀐 걸까? 우주가 배반한 걸까? 아니면 우리가 뭔가 오해하고 있었던 걸까?

우리는 우리가 지어온 죄를 이제야 벌 받는 걸까?

#10

나는 누나를 찾았다. 누나는 K박사를 따라 남태평양 어느 섬으로 갔다. 남편도 아이도 버리고 갔다면 더욱 극적이었겠지만, 누나도 나도 결혼은 하지 않았다. 우리 세대에서 결혼하거나 아이를 가진 사람은 아주 드물었다. 어쩌면 자연의 이유 모를 쇠락이 인간이 스스로 단종을 선택한 이유와 관련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는 생각도 든다.

누나를 찾는 과정에서 나는 젊은 생물학자 L박사를 알게 되었다. 무슨 이유로 K박사의 뒤를 쫓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K박사의 행적에 대해 가장 많은 자료들을 모은 사람 중 하나였고, 자신이 접근하기 힘든 부분들을 기자인 내가 대신 조사해줄 것을 전제로 나와 공유했다. 그럴 거라면 일간지 기자 쪽이 더 수월할 텐데, 라는 의심이 들었지만, K박사 일행의 행방에 관심이 있는 기자가 어디 있겠어, 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누나의 행방을 찾던 중이라 잘됐다, 생각하고 편집장에게 대충 후속 기사를 준비하겠다며 L박사를 소개하고 허락을 얻어 사심 가득한 취재를 시작했다.

행방불명된 사람들의 남은 가족들에게 나는 어떨 땐 기자로, 어떨 땐 정신 나간 누나를 찾는 동생으로 요령 있게 접근해서 행방불명된 사람들의 행방을 찾을 단서들을 모아나갔다.

그 결과가 남태평양의 어느 이름 모를 섬이었다. K박사를 따르는 2411명의 사람들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한 듯 저마다 제각각 출국했지만, 지구를 몇 번 휘감는 복잡한 경로들은 모두 그 섬으로 수렴했다. 그 섬으로 가는 교통수단은 인근 섬에서 살인적인 가격으로 전세내야만 하는 낚시 보트들이 전부였으며, K박사를 따른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마지막 돈을 탈탈 털어 모두 그 섬으로 향했다.

#11

배에서 내린 L박사가 얼어붙는다. 흔들리는 배에서 파도가 출렁이는 해안으로 내리느라 바쁜 나는 뒤늦게야 섬을 보고 마찬가지로 얼어붙는다.

섬은 오래된 화산섬으로, 현무암질 해안이 완만하게 비탈져 올라가다 갑자기 가파른 산봉우리로 솟구치는데, 해안선 안쪽부터 산기슭까지 온통 눈부신 초록빛 숲이 아른아른 둘러져 있다.

실제로 숲은 가본 적이 없지만, 그동안 뉴스에서 황폐해지는 논밭 사이사이 나왔던, 활엽수고 침엽수고 상록수고 가리지 않고 누렇게 뜬 잎들이 마치 눈보라치듯 휘날리며 말라죽는 광경만 봤던 눈에는, 눈이 시리도록 아린 이 초록빛, 타오르는 듯한 이 초록빛 물결은 몸만이 아니라 생각마저 얼어붙도록 한다.

#12

기묘한 숲. 새소리도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어느 샌가 L박사는 남미 해안 마을에서 밀매한 라이플을 손에 들고 있고, 나도 그가 건네준 권총을 한 손에 움켜쥐고 있다. 권총이라…. 20년 전 헌병 교육대에서 열 발인가 쏘아본 뒤로 처음 잡아 본다. 그때처럼 지금도 예쁘장한, 작고 아름다운 총알이 탄창에 들어있을까―누군가 혹은 무엇인가의 목숨을 노리면서?

그리고, 그러나 숲은 아름답다. 온통 초록빛으로 번쩍이고 녹음을 밤의 줄무늬처럼 드리우며 그 사이사이로 망막을 강타하는 가시광선이 숲과 함께 에너지 변환의 교향곡을 연주한다. (과연 저것이 엽록소가 맞을까? 나무가 맞을까? 햇살이 맞을까? 이것이 과연 현실일까?)

넘치는 생명력이 마치 눈에 보일 듯이 넘실거린다. 나뭇잎 하나하나가 생명이란 본디 이런 것이라고, 보란 듯이, 외치는 듯이 빛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죽음은 어디 있을까? 죽음은 본디 그림자처럼 삶의 빛 바로 옆에 있는 게 아니었던가? 죽어있는 것은 누굴까? 나? L박사? 저 바다 너머의 모든 사람들?)

L박사는 나무들을 보고 휴대컴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리고 있다. 투덜거리는 것도 같고 당혹한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모두 짐작했던 그대로였다는 투 같기도 하다.

“최신판 식물도감인데, 나무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요.”

나는 그가 생물학자라는 것을 기억해낸다. 비록 지금은 19세기 오지 탐험가에 더 가깝게 행동하고 있지만.

“그럼 여기가 새로운 종의 군락지인 건가요? 축하 드립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웬일인지 이를 악물며 L박사가 대꾸한다.
 

적도 아래에서 햇빛은 날카롭게 벼려져 있다. 피부는 삽시간에 난도질당한다. 땀을 물처럼 흘리며 L박사가 말한다.

“보셨죠? 기자님도 지금까지 다 보셨죠? 이 섬에는 저 나무들밖에 없어요. 노래해야할 새들도 모두 사라지고, 이 이상한 나무들 외에는 풀 한 포기도, 이끼 한 움큼도, 벌레 한 마리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요. 그럼 도대체 이 나무들은 어떻게 살아 있는 걸까요? 과연 이런 게 가능할까요? 아무리 나무라는 형태를 취했다 한들, 이렇게 다른 생명과의 접점이 일절 없이 살아남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 그보다는 차라리 기능이라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이 나무들은 생명이라기 보단 그저 기계라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나무들에게서 수상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13

드디어 산 중턱에 올라선다. 머리 위로는 불모의 산봉우리가 가파르게 치솟고, 눈 아래로는 기이한 형상과 비현실적인 녹색의 숲이, 그 너머로는 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누나는, K박사와 그 추종자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L박사는 말없이 산등성이를 따라 섬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는 말없이 그 뒤를 따른다. 마침내 한 바퀴 다 돌고 내려오면서 L박사에게 말한다.

“아무 것도 없네요.”

“그렇지 않아요. 모든 게 다 있죠.” 뒤도 돌아보지 않고 L박사가 대답한다.

*
이미 모든 것을 다 보셨잖아요. 다 알고 계신 거 아닌가요? 이 섬은 죽음의 섬입니다. 이 숲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요. 그저 단백질 기계일 뿐이지요. 이 숲의 나무 숫자를 맞춰볼까요? 이천여 그루 정도일 거예요. 중간에 실패하거나 포기한 개체도 있을 수 있겠지만요.

기억하세요? K박사의 연구가 알려진 뒤 가장 많이 제기된 반론은 1차 소화 흡수가 끝난 것을 재섭취한다고 인체에 필요한 영양소와 열량을 모두 충족시킬 수는 없다는 거였죠. 열역학 법칙에 따라 무한동력이 불가능한 것과 똑같이, 아무리 흡수 효율을 높이고 재차 섭취한다고 해도 결국 외부에서 다시 새로운 영양소를, 에너지원을 공급해줘야 하는 거예요.

만일 문화적 편견과 사회적 차별과 탄압이 없었다면 모든 것이 순조로웠을지도 몰라요. 그들은 집에서 먹는 아침이나 저녁은 K박사의 음식을 먹고 다른 사람들과 먹는 점심은 밖에서 일반 음식을 먹으면 됐을지도 몰라요.

정말 그럴까요? 아니에요. 애초에 K박사가 연구를 시작한 동기도 바로 그 때문이었으니까요. K박사 추종자들의 이상한 믿음 말이에요. 그들 입장에서 보면 틀린 말은 아니긴 해요. 모든 동물은―초식동물마저도, 다른 생명을 죽여 자기 안으로 받아들여 살아가야만 하니까요. 그럼 도대체 어떻게 다른 생명을 죽이지 않고 내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을까요?

합성식이요? 아녜요. K박사와 그 추종자들이 자신들의 배설물을 먹기 시작한 건 결코 불교나 자이나교의 불살생을 곡해한 듯한 추상적이고 사이비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었어요. 지구 행성의 에너지 효율에 대한 정확한 분석에서 비롯한 것이었지요.

인류의 개체수와 평균 수명이 폭증한 이후로 지구 생태계는 복구 불가능한 에너지 손실을 받기 시작했고, 21세기 전후로는 한 행성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생명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전체가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이 행성 안에서는 결코 조달될 수 없게 되어버린 거지요. (1킬로칼로리의 섭취 가능한 식량을 합성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얼마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할까요?)

이 숲이 그 해답이에요. K박사와 그 추종자들… 기자님의 누님도 모두 이렇게 나무가 되어버린 거예요. 겉보기에는 나무지만 분석해보면 아마 경화된 단백질과 석화된 무기질로 나오겠죠.

이제 제 탐색은 여기서 이걸로 끝이로군요. 저는 K박사의 연구가 이런 극단적인 결말을 맺을 것으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아마도 운동은 에너지 소모가 너무 컸나 보죠. 물과 무기질, 태양에너지만으로는 아무리 슈퍼 엽록소라고 한들 동물의 운동 에너지를 지탱할 수는 없었나 봐요. 아무 것도 먹지 않아도 오로지 물만 마시고 하루종일 햇볕을 쪼이며 느리지만 평화롭게 살아가는 푸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했는데….

원래 꿈은 깨기 직전이 가장 아름다운 법이라지요.

*
말을 마친 L박사는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라이플을 어깨에서 내리더니 총구를 입에 넣고 방아쇠를 당긴다.

#14
나는 다시 해안에 나와 있다. 둘이 타고 왔던 보트는 총소리에 놀란 주인이 황급히 시동을 걸고, 나 혼자 숲에서 나오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수평선을 향해 멀어진다.
어차피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도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보트 주인인 어부가 가련하다. 아니 우습다. 아니, 우습기에 더 가련하다. 이미 저 푸른 바다 밑에서는 부유하던 플랑크톤은 모두 사라지고 작은 물고기를 큰 물고기가, 큰 물고기를 더 큰 물고기가 잡아먹는 아비규환만이 남아 있을 뿐일 것이다.

머지않아 모두 사라지리라.

인간 세상도 마찬가지다. 아직은 남은 자원들―아직 죽지 않고 남아 있는 곡식과 열매, 가축들, 무엇보다도 생명력 질긴 대량의 소형 포유류와 파충류, 곤충들을 모조리 소모하고 나면 남은 것은 결국 서로가 서로의 살을 탐하고 물어뜯는 아비규환일 것이다. 한동안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으며 버티겠지만, 약한 자들이 모두 잡아먹혔을 때, 최후의 강자도 결국 홀로 쓸쓸히 굶어 죽을 것이다.

머지않아 모두 다 사라지리라.

#15

모든 것이 사라진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이 섬의 인간-나무들은 아직은 어떠한 꽃도 피우지 않고, 아무런 열매도 맺지 않고 있다. 내가 이 섬에 도착한 것은 도대체 언제였을까? 사흘 전이었을까? 나흘 전이었을까? 아니면 일주일 전? 도저히 모르겠다. 어쩌면 한 달이, 일 년이 지났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사람이 소금물만 마시고 그렇게 오래 생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열대의 낮과 밤은 아무런 계절도, 시간이 흐른다는 어떠한 징표도 세계 위에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낮에는 나무 그늘에서 잠자고 아침저녁으로 목마르면 해안에서 소금물을 마시며, 밤에는 알 수 없는 외로움에 부들부들 떨며 자다 깨는 삶 속에서 영양실조와 수면 부족으로 망가진 내 뇌는 이상한 꿈을 마치 현실처럼 체험한다.

다른 생명을 죽여 스스로의 생명을 잇기를 거부한 사람들이 변하여 만들어진 나무들이 언젠가, 다른 생명을 죽여 스스로의 생명을 잇던 모든 존재들이 사멸해 버린 세계 속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다른 섬, 다른 대륙에서도 그들의 조용하지만 평화로운 꿈을 계속 이어나가는 풍경을.
나는 낮이면 누이와 닮았다고 내 멋대로 정해버린 나무 밑에 누워 잠을 청한다. 이대로 잠들어 죽어버리기를, 죽은 내 육신의 잔해가 누이-나무의 양분이 되기를 바라면서.

나는 밤이면 누이와 닮았다고 내 멋대로 정해버린 나무 밑에서 탈수증과 설사로 고생하며 알 수 없는 한기에 부들부들 떨며 될 수 있는 대로 고통스럽게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류와 나의 모든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고독과 더 많은 고통이 필요하다고. (그러나 과연 존재 자체가 원죄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존재에서 비롯된 원죄를 도대체 어떻게 속죄할 수 있을까? 존재에서 비롯된 원죄를 씻어낼 수 있는 고통이란 과연 어떤 고통일까? 그리고 또, 존재가 곧 원죄이며 동시에 고통이라면, 구원은 존재 자체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누이는 말했다. 고통은 속죄가 아니라고.

누이의 다른 말들이 아픈 머릿속에서 또 맴돈다 : 언젠가 회식에서 닭날개 튀김이 나왔는데, 뼈가 정말 이쑤시개만 했어. 알겠니? 그 야윈 살을 씹고 가느다란 뼈를 뱉는데 문득 그 작고 여린 것이, 어디서 어떻게, 얼마나 살았을지 떠올랐어. 그 다음부터는 못 먹겠더라. 닭고기 말고도. 너도 봤지 않니? 뉴스에서 구제역이나 조류 독감 때마다 그 불쌍한 것들을 사람들이 어떻게 처리했는지? 그게 과연 사람이 할 짓이니? 하지만 누이,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일일이 귀 기울이며 살아가기엔 세상엔 아픈 소리들이 너무 많지 않은가요?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서로 마음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는 것이 현대인의 상식이자 교양, 예의가 아닌가요?

그러나 바다 너머에서 밤바람이 천천히 불어오고 155나뭇잎들은 마치 고개를 젓는 것처럼 힘없이 흔들린다. 아니야, 아니야, 말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무엇이 아닌지 왜 아닌지는 결코 알 수 없다. (존재가 고통이 아닌 걸까? 고통은 속죄가 아닌 걸까? 구원은 어디에도 없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그게 아니라면, 존재 자체가 고통이라면, 고통은 결국 고통이 아닐 것이며, 그렇다면 원죄도 속죄도 애초부터 없었으며 필요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밤의 그림자 속에서 나무들은 존재 자체의 고통으로 줄기와 가지를 뒤트는 듯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영원한 평온 속에 잠들어 있는 듯하기도 한다.

내일은 내가 맞는 마지막 날일 것이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이내 확신으로 바뀐다. 알 수 없는 다급함 속에 비틀거리며 일어나 냉혹하게 반짝이는 별들 아래를 휘청휘청 걷는다. 세상은 이제 오직 이 섬만 남은 것 같고, 나는 최후의 인간이며, 내가 죽으면 세계도 모두 끝날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 해도 뜨지 않고 어떤 꽃도 피지 않으리라.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

시간은 낮과 밤 사이에서 흐르기를 멈춘 것만 같고, 나무들은 저마다의 깊은 꿈속에서 영원을 노래하는 듯하다.

K박사의 이상한 숲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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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박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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