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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owledge] 예술의 경지에 이른 변장술

파충류의 속사정 5


동남아시아에는 아주 특별한 도마뱀이 산다. 몸길이 약 20cm 정도 되는 이 작은 도마뱀은 나무 위에서 사는데, 가지에 앉아서 쉬고 있는 모습은 매우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근처로 다가가면 다른 도마뱀들이 보여주지 못하는 기이한 묘기를 보여준다. 옆구리에 달린 ‘날개’를 펼쳐 가지에서 뛰어내려 활공을 하기 때문이다. 멋진 공중묘기를 부릴 줄 아는 이 도마뱀의 이름은 플라잉드래곤. 이들의 옆구리에 있는 날개는 길어진 갈비뼈 사이사이의 피부가 넓게 펴진 것으로, 나무에서 뛰어내릴 때 받는 공기저항을 늘려 활공을 가능하게 해준다. 하지만 이 날개에 활공 이외에 또 다른 용도가 있음이 최근에 밝혀졌다.

떨어지는 낙엽 닮은 도마뱀

플라잉드래곤은 작은 몸집을 가졌지만 날개를 이용해 최대 8m 거리를 활공할 수 있다. 마치 낙하산을 메고 하늘에서 뛰어내리는 파충류계의 특전사라고나 할까. 플라잉드래곤은 나무 위에서 개미와 흰개미를 즐겨 먹는데, 한 나무에서 배불리 식사를 끝낸 뒤에 날개를 펼치고 다른 나무로 이동한다. 하지만 너무 먼 거리를 활공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활공하는 플라잉드래곤 위로는 이들을 노리는 새들이 날아다니기 때문이다.
호주 맬버른대의 다니옐 클롬프 박사팀은 최근 플라잉드래곤에 대한 재밌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보르네오에 사는 다양한 플라잉드래곤을 여러 시간 동안 관찰하고 행동을 녹화한 결과, 사는 나무의 잎 색깔에 따라 도마뱀의 날개색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연안지역의 맹그로브 숲에 사는 플라잉드래곤의 경우 날개가 붉은 색이었다. 반면 저지대의 열대우림에서 사는 플라잉드래곤은 날개가 짙은 갈색, 또는 녹색이었다. 놀랍게도, 이는 서식하는 나무의 낙엽 색깔과 같았다. 맹그로브 숲을 이루는 나무의 잎사귀는 밝은 녹색을 띠지만, 낙엽은 붉은 색을 띠었다. 저지대 열대우림의 낙엽은 짙은 갈색, 또는 녹색이었다.

플라잉드래곤의 날개는 왜 낙엽과 색이 같을까. 클롬프 박사에 따르면, 천적인 새로부터 몸을 숨기기 위해서다. 새를 속이기 위해 최대한 낙엽과 비슷하게 위장을 한 것이다.




뱀도 동경하는 무시무시한 벌레

뉴기니 섬의 비스마르크알락보아뱀은 독이 없는 뱀이다. 독이 없기 때문에 작고 어린 비스마르크알락보아뱀은 천적으로부터 몸을 방어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어린 뱀의 몸 색깔은 눈이 부시도록 화려하다. 밝은 주황색 바탕에 검정색 줄무늬가 있으며 비늘에는 윤기까지 있어, 멀리서도 반짝거리는 이 어린 뱀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다. 이 화려한 색은 점차 옅어져 어른이 되면 완전히 사라진다. 천적으로부터 숨어 지내도 모자랄 어린 시절에, 이 뱀은 왜 이토록 눈에 띄게 화려한 색을 하고 있는 것일까?

비밀은 벌레에 있다. 뉴기니섬에는 어린 비스마르크알락보아뱀 말고도 또 다른 화려한 동물이 사는데, 바로 거대한 인디고대벌레다. 인디고대벌레는 대벌레의 일종이지만, 다른 대벌레와 달리 몸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열대우림의 낙엽 사이를 당당하게 걸어 다니는데, 개미, 도마뱀, 새, 그리고 설치류까지 다양한 천적들을 도망치게 만드는 ‘천적퇴치제’를 가지고 있다.

인디고대벌레는 유독성 물질을 마치 스프레이처럼 천적을 향해 정확히 발사하며, 자신의 화려한 몸 색깔을 이용해 독을 쏘기 전 천적에게 미리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다. 놀랍게도 이 대벌레의 색깔은 밝은 주황색 바탕에 검정색 줄무늬다. 어린 비스마르크알락보아뱀은 인디고대벌레의 화려한 색깔을 따라함으로써 천적들이 얼씬도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다 천적이 거의 없는 어른 뱀이 되면, 대벌레를 굳이 따라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색깔이 어두침침하게 변해버린다.

벌레의 외모뿐만 아니라 행동까지 따라 하는 파충류도 있다. 부쉬벨드도마뱀은 남아프리카의 드넓은 사막에서 살기 때문에 천적으로부터 몸을 숨길 곳이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이 도마뱀의 새끼는 그 지역에서 사는 먼지벌레를 따라 한다. 먼지벌레는 천적에게 강력한 포름산을 발사하는 딱정벌레 종류로, 이들이 쏘는 포름산이 눈에 들어가게 되면 실명까지 할 수 있다. 새끼 부쉬벨드도마뱀은 이 무시무시한 벌레 특유의 흰점박이 무늬를 흉내 내는 것도 모자라 통통거리는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까지 따라 하면서 돌아다닌다. 제 아무리 시력이 좋은 새라 할지라도 먼지벌레와 새끼 부쉬벨드도마뱀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맹독성 뱀은 다른 파충류의 ‘워너비’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많이 서식하는 뱀으로는 우유뱀이 있다. 한때 농부들은 이 뱀이 외양간에서 많이 발견되기 때문에 소의 우유를 훔쳐 먹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유뱀이란 이름이 붙었는데, 사실 우유뱀은 우유를 마시지 않으며 쥐를 잡아먹기위해 외양간을 자주 들락거린다.

독이 없는 우유뱀은 반려동물로도 많이 사육이 된다. 붉은색, 검은색, 그리고 노란색 줄무늬로 덮인 화려한 색상 때문이다. 하지만 우유뱀이 이렇게 화려한 이유는 우리에게 예뻐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바로 같은 지역에서 서식하는 맹독성의 산호뱀을 따라 한것이다. 산호뱀은 화려한 줄무늬를 이용해 천적에게 자신이 맹독성임을 경고하고, 우유뱀은 이 산호뱀의 줄무늬를 따라 해 천적을 속인다. 하지만 두 종류의 뱀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줄무늬의 색깔 배열이다. 붉은색 줄무늬 옆에 노란색 줄무늬가 있으면 맹독성의 산호뱀, 붉은색 줄무늬 옆에 검정색 줄무늬가 있으면 독이 없는 우유뱀이다. 미국에서는 이 두 종류의 뱀을 구분하기 위한 운문도 존재한다. “Red touch black, venom lack, red touch yellow, kills a fellow(빨강과 검정이 만나면 독이 없고, 빨강과 노랑이 만나면 친구가 죽는다).”

우유뱀과 앞서 소개한 비스마르크알락보아뱀, 부쉬벨드도마뱀처럼 다른 위험한 동물을 따라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특성을 과학자들은 ‘베이츠의태’라고 부른다.



무덤에서 나온 산호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연안을 따라 서식하는 스칼렛왕뱀은 우유뱀과 마찬가지로 산호뱀의 줄무늬를 따라 하는 뱀이다. 하지만 노스캐롤라이나주 연안에 서식하던 산호뱀은 1960년대에 멸종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이 지역의 스칼렛왕뱀이 앞으로 산호뱀과 다른 줄무늬로 변화해 버리고 말 것이라고 예측했다.

2014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의 크리스 아칼리 박사팀은 산호뱀이 사라진 지난 50년 사이에 연안에 사는 스칼렛왕뱀에 변화가 일어났는지 조사하러 나섰다. 하지만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뜻밖의 결과였다. 스칼렛왕뱀이 멸종한 산호뱀과 과거보다 더 비슷한 모습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스칼렛왕뱀은 원래 산호뱀보다 덩치가 컸지만 산호뱀과 비슷한 몸집으로 축소됐다. 또 전에는 더 두꺼운 검정색 줄무늬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산호뱀과 비슷하게 가늘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산호뱀이 살아 있던 50년 전까지만 해도 산호뱀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이 연안 지역의 천적들은 산호뱀의 무늬만 봐도 피해 다녔다. 그래서 스칼렛왕뱀은 산호뱀의 줄무늬를 대충 따라만 해도 천적들을 쉽게 속일 수 있었다. 하지만 산호뱀이 사라지자 스칼렛왕뱀은 산호뱀의 무늬를 대충 따라 해서는 천적을 속이기 어려워졌다. 때문에 스칼렛왕뱀은 보다 완벽한 산호뱀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몸집과 무늬를 바꾸게 되었다는 것이 아칼리 박사의 주장이다.

그렇지만 세월이 흐르고 이 화려한 왕뱀에게 독이 없다는 사실이 천적들에게 발각되면 어떻게 될까. 그 순간, 산호뱀을 모방하는 이들의 행위예술은 끝이 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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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박진영 ‘대중을 위한 고생물학 자문단’ 독립연구원
  • 일러스트

    정재환
  • 에디터

    윤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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