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동물학과의 메이너드 스미스 교수는 유럽초파리를 연구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수컷은 교미를 마친 뒤 연이어 다른 암컷과 교미할 수 있는 반면, 암컷은 교미가 끝나고 24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교미를 하는 것이었다. 수명이 한 달도 채 안 되는 초파리에게 24시간은 상당히 긴 시간이다. 교미할 수 있는 시간의 상당 부분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스미스 교수는 교미 지연이 일어나는 이유가 궁금했다. 일단 수정과는 관련이 없었다. 교미 지연을 겪고도 알을 낳지 않는 암컷이 많았다. 혹시 생식기가 물리적으로 닿는 행위가 교미 지연을 유발했을까. 이것도 아니었다. 교미를 하고도 수컷이 사정을 하지 않은 경우는 교미 지연이 생기지 않았다. 그는 다른 실험을 고안했다. 사정을 할 수 없는 돌연변이 초파리 수컷과 암컷을 교미시켜봤다. 예상대로 교미 지연이 없었다.
교미 행위가 아니라 사정액에 답이 있었다. 스미스 교수는 교미 지연을 보이는 암컷의 생식기를 해부해봤다. 초파리 암컷은 몸 안에 수컷의 사정액을 보관할 수 있는 주머니가 있다. 이곳을 살피던 스미스 교수는 의외의 사실을 발견했다. 주머니에서 활동성 없는 정자만 발견된 경우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 발견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암컷을 변하게 한 건 정자가 아니었다.
정액은 암컷의 몸을 조종한다
미국 노트르담대 생물학과의 조지 크레이그 교수는 1956년 ‘유전학’ 저널에 발표된 스미스 교수의 연구를 관심 있게 지켜봤다. 정자가 아니라면 무엇이 암컷을 변하게 만들었을까. 그는 뎅기열 바이러스를 옮기는 이집트숲모기를 연구하고 있었다. 모기 암컷도 교미 지연이 있었다. 교미를 지연해 모기의 번식을 방해하는 물질을 찾을 수만 있다면 위험한 전염병을 막을 수도 있을 터였다.
크레이그 교수는 1967년 비밀을 풀 실험을 계획했다. 수컷의 여러 분비물을 생성기관별로 나눠서 각각을 모기 암컷에게 주입하는 것이었다. 실험 결과 수컷의 부생식샘(Inside 참조)에서 만들어지는 물질이 암컷에 교미 지연을 일으켰다. 부생식샘은 ‘정자를 제외한 정액’을 만드는 곳이다. 자궁에 정자를 나르는 ‘탈것’인 줄로만 알았던 정액이 독립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모기 12종에서 똑같은 결과가 나타났다.
이 연구를 시작으로 그동안 몰랐던 정액의 역할들이 속속 밝혀졌다. 정액에 들어있는 수백 가지의 단백질이 암컷 몸 안의 수용체와 만나 반응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곧 밝혀졌다. 정액 단백질(SFPs)은 암컷이 짝짓기를 다시 못하도록 만들 뿐 아니라 몸 안에 수컷의 정자를 오래 보관하게 했다. 암컷이 음식을 많이 먹게하고, 알을 빨리 생산하도록 만들었으며, 잠을 덜 자도록 만들었다. 수명까지 단축시켰다. 모든 변화는 한 가지 목표를 향했다. 수컷 자신의 유전자를 널리 퍼뜨리는 것.
정액은 수컷의 무기
정액은 수컷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대표적인 예가 정자 보관이다. 암컷은 생식기 내부에 일시적으로 정자를 보관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두고 있다. 곤충이나 새, 파충류의 정자는 수 주에서 수 년까지 암컷 몸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쥐의 정액에 들어있는 트랜스글루탐산분해효소는 정액을 응집시켜 정자가 보관소로 빨리 이동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정자 보관은 간혹 암컷에게 이익이 되기도 한다. 한동안 수컷을 만날 수 없는 경우 보관해두었던 정자를 꺼내 난자와 수정시키면 되니까.
하지만 암컷의 이익은 부수적이다. 정액은 자신의 정자만을 최대한 오래 생존하게 하고, 다른 정자의 생존력은 떨어뜨려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릴 확률을 최대한 높인다. 하지만 암컷 입장에선 오래된 정자를 내보내고 신선한 정자를 받아들여야 더 건강한 자손을 얻을 수 있다. 정액 단백질의 일종인 유충호르몬은 노랑초파리 암컷이 알을 빨리, 많이 낳도록 촉진시킨다. 수컷 입장에선 정자를 최대한 많이 수정시켜 유전자를 퍼뜨릴 수 있지만, 암컷은 불필요하게 많은 자원을 낭비해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
정액의 역할이 하나 둘 드러날 때마다 과학자들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수컷과 암컷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정액은 수컷의 강력한 무기였다. 미국 우스터대 생물학과 로라 시롯 교수가 이끈 연구진은 작년 12월 발표한 논문에서 정액 단백질이 오래된 ‘성 갈등(Sexual Conflict)’의 역사를 보여준다고 해석했다(오른쪽 표 참조).
암컷은 당하고만 있었나
그런데 암컷이 수컷의 공격에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었을까. 그럴 리 없다. 암컷은 정액 단백질의 이기적인 행동을 결코 가만 놔두지 않았다. 정액 단백질을 들여다보면 암컷과 수컷이 오랫동안 치렀던 치열한 전쟁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일단 정액 단백질은 종류가 많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쥐와 사람에 수백 종류, 노랑 초파리에 200종류 이상, 꿀벌과 모기에 50~100종류가 있다. 정액 단백질은 종에 상관없이 생화학적 유형이 비슷하다. 일단 단백질분해효소와 그 억제제가 있고, 당결합렉틴이 있으며, 항균·항산화단백질, 응집단백질, 트랜스글루탐산분해효소 등이 있다.
유형만 비슷한 게 아니다. 역할도 겹친다. 예를 들어 노랑초파리 정액엔 트립신 유형 단백질분해효소가 15종이 넘게 있다. 포유류 정액에는 세린 단백질분해효소가 여러 개다. 중복된 단백질이 많다는 얘기다. 유전자를 분석해보면, 급하게 진화한 흔적이 보인다.
이는 수컷과 암컷 사이에 ‘군비경쟁’이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창을 개발하면 방패로 막고, 총을 개발하면 방탄조끼로 막는 식이다. 경쟁은 종과 상관없이 모든 수컷과 암컷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다. 노랑초파리와 이집트숲모기는 같은 트립신 유형 단백질분해효소를 가지고 있지만, 이는 공통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정액 단백질이 아니다. 각각의 종이 진화시킨 것이다. 비슷한 생화학적 역할을 하는 단백질도 서로 다른 진화경로를 거쳐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전쟁은 어느 염색체 위에서 벌어졌을까. 정액 단백질 및 수용체와 관련된 유전자는 극히 일부만 밝혀진 상태인데, 암컷과 수컷에게 유리한 유전자가 각각 다른 위치에 있다. 암컷에게 유리한 수용체 유전자는 주로 X염색체 위에 있다. 수컷이 대립유전자를 개발해도 다음 세대에 ‘하나(XY)’만 전달할 수 있는 반면, 암컷은 그걸 무력화하는 유전자를 ‘두 개(XX)’나 전달할 수 있다. 유전자 싸움에서 암컷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수컷에게 유리한 정액 단백질 유전자는 Y염색체가 아니라 상염색체 위에 있다.
경쟁이 다는 아니다
서로 다른 종 사이의 경쟁이나, 동성 개체 사이의 경쟁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하지만 암컷과 수컷이 서로 경쟁한다는 주장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 그걸 의식해서인지, 시롯 교수팀은 논문에서 이성 간 유전자 경쟁을 ‘갈등’으로만 해석하지 않는 시선도 있다고 소개한다. 수컷과 암컷이 경쟁한 덕분에 정교한 번식 시스템을 완성해 나갈 수 있었다는 관점이다. 암컷이 수컷의 정자를 보관하는 것도 종 전체로 보면 이득일 수 있다. 적대적인 경쟁이 아니라 일종의 ‘공진화’를 한 셈이다. 또한 성 갈등은 생식계통을 변화시켜 종 분화를 이끄는 원동력이 됐을 수도 있다. 논문의 말미엔 이런 구절이 적혀있다. “성 갈등이 진화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우린 아직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