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article/2015/07/133663712855b8642e14738.jpg)
“한 번 마셔보고 판단해 보세요.” 길쭉한 유리병 두 개에는 각각 투명한 액체와 반투명한 자주색 액체가 담겨 있었다. 쌀로 직접 빚은 소주라고 했다. 슬쩍 시계를 봤다. 오전 10시 30분이었다. 눈 딱 감고 한 모금을 꿀떡 삼켰다. 투명한 소주를 마시자 “캬~”소리가 절로 나왔다. 반면 자주색 소주는 “음~” 좀 더 부드럽고 감칠맛이 났다. “자주색 소주가 더 순한 건가 보죠? 알코올 특유의 향이나 쓴맛이 덜하네요.” 강희윤 경기도농업기술원 농식품개발팀 박사가 웃으며 말했다. “알코올 도수는 똑같이 30도입니다. 다만 자주색 소주에는 고구마 성분과 자일리톨이 첨가됐어요. 어때요, 단맛이 첨가되니까 목 넘김이 훨씬 부드럽죠?”
과일 맛이 알코올 맛을 가린다
김광옥 이화여대 식품공학과 교수팀은 2008년 7가지 소주의 맛을 평가하고 ‘시판 소주 제품들의 관능적 특성 및 소비자 기호도’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도수가 높은 S소주가 도수가 낮은 소주보다 오히려 알코올 맛과 향이 덜 느껴지는 것으로 평가됐다. 연구팀은 “(도수가 높은) S소주는 인공적인 과일 향과 단맛이 다른 시료에 비해 높게 평가됐다”며 “상대적으로 알코올 맛과 향이 약하게 느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과일 향과 단맛이 알코올의 쓴맛과 톡 쏘는 느낌을 줄인다는 얘기다. 이를 ‘마스킹 효과’라고 부른다.
마스킹 효과는 어떤 감각이 다른 감각을 지워버리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시끄러운 카페에서 친구와의 대화에 집중하다 보면 주변 소음이 들리지 않는다. 청각뿐만이 아니다. 후각, 시각, 그리고 미각에서도 마스킹 효과가 일어난다. 강 박사는 “짜고 매운 보쌈 김치에 설탕을 넣어 달게 만드는 것도 같은 이치”라며 “인간의 혀는 잘 속는 편이라 같은 소주라도 단맛을 첨가하면 마시기 편하게 느낀다”고 말했다. 시판 소주의 단맛은 소주를 보다 잘 삼키게끔 제조사에서 첨가하는 감미료 맛이다. 인공적인 과일 향은 알코올을 발효할때 생기는 에틸 아세테이트, 에틸 숙시네이트 등에서 비롯된다.
시판 소주와 달리, 과일 소주는 다양한 과일즙을 첨가한다. 이런 과일 소주가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10~20여 년 전에도 대학가에 과일 소주 열풍이 불었다. 다만 그 때의 과일 소주는 기업에서 생산하는 게 아니라 각 주점이 소주에 과일을 담가 직접 만드는 것이었다. 요즘 시판되고 있는 과일 소주는 직접 만든 것 보다 뒷맛이 깔끔하고 과일의 단맛과 향이 더해졌다는 평가가 많다.
최근의 열풍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유자맛 소주를 개발한 조판기 롯데주류 상품개발팀장은 “알코올과 과즙 사이에 과학적인 상관관계는 없다”고 말했다.
“소주에는 알코올 이외에도 다양한 첨가물들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둘만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건 의미가 없죠. 가장 중요한 것은 소비자들이 새로운 맛에 얼마나 만족하느냐입니다. 제품 개발 단계에서 20종류 이상의 과실주를 시음하고 선별했습니다. 제품 개발이 한창일 때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입안에서 유자향이 가신 적이 없을 정도였어요.”
이런 방법을 식품공학에서는 ‘관능평가’라고 한다. 동일한 식품, 동일한 성분이라도 사람마다 미각을 느끼는 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성분을 토대로 맛을 평가하기란 쉽지 않다. 그보다는 잘 훈련된 검사원들이 직접 먹어보고 맛, 냄새, 식감 등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평가한다. “알코올과 과즙의 어떤 성분이 서로 시너지를 낸 거냐”고 꼬치꼬치 캐묻는 기자에게 강 박사가 “일단 마셔보라”며 아침부터 소주를 권한 이유다.
![](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article/2015/07/111727401155b864ae4de2c.jpg)
과일 소주는 왜 투명할까
취재를 한창 하고 있는 도중에 시판 중인 과일 소주를 한 번도 마셔보지 않았다는 지인에게서 이런 질문을 들었다. “그럼 그 유자 소주는 노란색이야?”
대부분 과일에는 플라보노이드, 안토시아닌, 탄닌계 색소가 들어 있다. 과일즙을 넣었다면 소주도 색이 있어야 한다. 더구나 이런 색소는 열을 받거나 산을 만나면 폴리페놀 화합물이 생성돼 색깔이 변한다. 배나 사과를 깎아놓고 공기 중에 놓아 두면 갈변하는 현상이 그 예다. 강 박사는 “식품은 살균을 위해 마지막에 반드시 열처리를 하기 때문에 생과즙을 첨가하면 색이 변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시판 중인 과일 소주는 전부 투명하다. 비결은 뭘까.
답은 제균필터에 있다. 열처리로 살균하는 대신 미세한 필터에 걸러 미생물을 제거하는 것이다. 또 다른 비결은 청징농축액이다. 천연과즙을 제조하는 데는 즙을 짜거나 여과하는 방법, 그리고 청징법 등이 있다. 이중 청징법은 과즙을 탁하게 하는 물질을 제거해 투명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수용성 단백질을 응고해 침전시키고 분해효소로 전분이나 섬유질 등을 제거한다. 청징농축액은 이렇게 만든 과즙에 고형으로 만든 과일과 향이 나는 합성착향료를 섞은 것이다. 조판기팀장은 “제품을 처음 개발할 때부터 소주처럼 맑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색이 나는 과즙 대신 투명한 청징농축액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혹시 이런 첨가물 때문에 일반 소주보다 숙취가 더 심하지는 않을까. 답은 “아니오”다. 강 박사는 “알코올이 분해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아세트알데히드가 숙취를 유발하는 것”이라며 “양주가 깔끔한 건 독해서 많이 못 먹어서일 뿐”이라고 말했다. 과일 소주가 달콤하다고 정신 놓고 먹다가는 다음 날 일어나지 못할수도 있다는 얘기다. 언제나 술은 적당히 즐기는 게 중요하다.
![](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article/2015/07/163741382955b864f106e70.jpg)
![](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article/2015/07/201539951455b864f7655f2.jpg)